연구개발 투자와 기초학문의 미래
류지석 / 문화공간 봄 대표
노벨상의 꿈 – 열망인가 콤플렉스인가?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관심이 쏠린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대열에 들어섰으나, 평화상을 제외하면 아직 수상자가 없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지만 올해도 수상자 명단에 우리나라 학자의 이름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노벨상 수상자는 공식적으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는 이중국적자를 포함하여 수상자의 국적이 매우 복잡한 경우가 많고 알프레드 노벨이 수상자 선정에 인종과 국적이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했기에 공식적으로는 수상자의 출생지만 기록한다. 198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미국 국적의 찰스 피더슨은 대한제국 시절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는 것이 되지만 본인은 물론이고 실제로 그를 대한민국의 수상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중국의 경우 일찍이 외국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지 국적을 취득한 학자가 수상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2000년 이후에만 (미국 국적자 1명을 포함한다면)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 배출하였다. 노벨상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와 자주 비교되는 나라는 일본이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래 2023년 현재 미국 국적 취득자 3명을 포함하여 총 2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만 25명의 수상자가 있고 경제학상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상을 받았다.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 유일한 학사 출신으로 정밀기기 제조회사인 시마즈 제작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민간기업의 연구소이지만 단기적 성과를 요구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와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결합한 결과였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중에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받지 못한 드문 경우이다. 경제 규모나 과학기술 분야의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직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아쉬운 점이다. 인구가 1,000만 명도 되지 않는 헝가리가 노벨상 수상자를 15명이나 배출한 사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헝가리는 전체 예산의 10%를 교육에 투자하고 창의성을 중시한 헝가리의 교육 정책이 이런 성과의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지금도 헝가리는 의학과 수학, 물리학, 화학 등 기초과학이 발달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자료를 살펴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2022년 기준으로 한국은 4.96%로 세계 2위이며 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는 세계 1위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논문 수도 연간 6만여 편이나 된다. 일본은 10만여 편이지만 인구가 2.5배 많고 경제 규모도 3배 정도이니 상대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논문 편수가 적은 것이 아니다. 정량 평가로 볼 때 우리나라의 수준은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도 노벨상에 근접한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이 있고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수준도 상당히 높다. 세계적인 학술정보기관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수상권 후보로 선정한 연구자들도 여러 명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은 마치 올림픽 금메달처럼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목표로 신화화된 지 오래다. 어떤 이공계 대학이나 자사고에는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를 위한 좌대를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정부나 연구기관이 노벨상 수상을 위한 보고서와 대책을 내놓았고 각종 매체에서도 노벨상에 대한 특집기사를 쏟아내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가 노벨상에 대하여 지나친 집착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해외 석학들도 한국이 ‘노벨상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하거나, ‘노벨상 콤플렉스’가 노이로제 수준에 이른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에 실린 보고서도 “한국에서 그동안의 연구들이 노벨상을 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집중했지, 노벨상 수상이라는 목표 자체에는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하였다.
노벨상은 기초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중요한 성과를 낸 학자에게 수여하므로 그 과정은 험난하고 오랜 기간의 투자와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뤄내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10여 년간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의 연구 생애주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평균적으로 핵심 연구를 시작한 나이는 38세이고, 핵심 연구는 평균적으로 25년 후인 53세에 완성되며, 69세에 수상에 이르는 패턴이 그려진다. 이 분석은 기초과학 분야에서의 장기적인 투자와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기초과학의 발전과 연구개발비 삭감 파문
최근 과학계를 뒤흔든 가장 중요한 주제는 내년도 연구개발 예산의 대폭 삭감이다. 지난 3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자문회의 제47회 운영위원회를 열고 “2024년 국가연구개발 투자 방향 및 기준안”을 발표했다. 보도에 따르면 기술 주권 확립과 미래 성장 기반 확충을 위해 국가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고, 과학기술을 혁신해 산업 대전환을 통한 경제도약을 이끌고, 사회의 지속가능성까지 확충한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2024년도 연구개발에 올해와 비슷한 수준의 투자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이 30조 원에 이르는 국가 연구개발 예산의 대수술을 지시하자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뀌어버렸다. 지금까지 양적 팽창에만 초점을 맞춰 부실 연구 논란이 끊이지 않던 국가 R&D 관리를 효율화해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시스템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한국연구재단,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 한국산업기술진흥원 등에 감사관들을 보내 현장 감사를 벌였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적정하게 운영되는지 감사에 착수하고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전문성·공정성이 확보되도록 개선 방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사실 대학과 기업,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예산을 나눠 먹는데 급급해 상업화가 어려운 보여주기식 ‘깡통 특허’와 성공률이 100%에 가까운 부실 연구를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들이 ‘약탈적 이권 카르텔’이라면 당연히 문제점을 찾아내서 개선하고 필요하면 예산 삭감과 예산 재배분을 통하여 국가 연구개발비의 효율적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만한 재정 운영을 바로 잡는 작업이 불과 두어 달 만에 졸속으로 이루어진 데다 과학계나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지난 10여 년간 국가연구개발 예산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의 수출규제와 팬데믹이라는 예외적인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긴급하게 많은 예산을 단기간에 투입하여 빠른 결과를 얻어내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비효율과 나눠먹기식 편법이 개입할 여지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졸속으로 삭감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과기정통부는 휴일에 비상 간부회의를 소집하는 열정을 보이며 예산을 수정, 삭감하였다. 그런데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르면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투자를 위하여 5년 단위의 중장기 투자전략을 짜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을 운용하게 되어있다. 문제는 올해 3월에 발표한 ‘2023-2027 R&D 중장기 투자전략’에서 제시했던 5년간의 재정지출 규모 145조 7000억 원이 불과 두어 달 만에 내놓은 새로운 운용계획에 의해 24조 8000억 원이나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연구개발 분야 예산은 전체 규모만 설정되어 있을 뿐 세부 분야별 계획도 포함되지 않은 상태로 제출되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급격한 예산 삭감에 따른 여러 문제점을 제기하고, 그간 투입된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의 성과에 차질을 빚을 수 있으며 과학기술정책의 신뢰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지난 8월 정부의 조정된 예산안이 발표되자 대학과 출연연구소를 중심으로 예산 삭감이 불러올 문제에 대한 우려와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같은 과학계 원로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예산 삭감이 가져올 구체적인 피해는 우선 박사후연구원의 사회진출이 막히게 되고 신진연구자들의 연구 기회가 줄어들면서 기초연구 연구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분야에 따라서는 내년도 예산이 70~90%까지 삭감되면서 기존에 진행 중인 연구도 중단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투자한 연구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나아가 미래의 과학계를 이끌어갈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을 가져올 것이다. 2022년 우리나라는 세계혁신지수 순위에서 스위스, 미국,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6위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6위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지표는 인적자원 및 연구로 4년째 1위를 지키고 있다. 반면에 인프라는 13위, 시장성숙도는 21위, 제도는 31위를 기록했다. 결국 우리나라의 혁신 경쟁력의 중심은 인적자원과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바탕이 되었는데 현재 상황으로는 바로 이 부분이 취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전략적인 연구과제의 경우 보통 3년에서 7년 정도의 계획으로 진행된다. 대학과 출연연구소는 연구비의 30% 정도를 인건비로 지출하고 60% 정도를 직접비로 연구에 투입한다. 만일 예산이 갑자기 줄어든다면 어떻게 대응하게 될까? 예를 들어, 시약, 재료,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는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연구책임자로서는 박사후연구원(포닥) 같은 비정규직들의 계약 해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포닥은 어느 연구팀에서나 실무 연구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연구 진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대전 지역의 출연연구소에서만 1,000명 이상의 연구원이 연구 현장을 떠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공계 탈출 현상과 의대 쏠림이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이번 연구비 삭감에 따른 논란은 과학자들의 직업 안정성에 대한 회의를 가중시킬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의 한 축을 이루는 정부출연연구소는 이번 예산 삭감의 후폭풍을 그대로 맞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출연연구소의 구조적 문제 중 하나인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있다. 출연연구기관이 기관 고유사업 등을 포함한 정부로부터 받는 출연금 외에 국가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해 연구비와 연구원 인건비를 충당하는 제도로서 과학계는 연구자들이 하향식 연구과제에 매달리면서 창의적 연구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지난해 출연연구소의 총예산은 5조 5,160억 6,300만 원이다. 이 중 정부 출연금이 2조 1,426억 1,200만 원으로 38%를 차지한다. 연구과제중심제도를 통한 정부 수탁과제 규모는 2조 5,774억 4,200만 원으로 46.7%를 차지한다. 나머지 예산인 7,960억 900만 원은 민간 수탁과제 등에 따른 금액이다.
출연연구소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외부 과제를 확보해야 하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구 활동의 안정성이 저하되고 단기성과 위주의 연구 수행에 집중하며 기초연구에 소홀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재정기여도 중심의 성과급 제도를 운용하는 구조는 과열된 경쟁을 촉발했고, 기관보다는 개인 중심의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기관과 기관, 연구자와 연구자 간의 협력 연구에도 어려움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는 이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의 지원 예산을 대폭 늘리는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
내년도 연구개발 예산의 조정에서 특이한 점이 있는데 국제협력과 인재 양성의 예산은 2조 8,000억 원으로 대폭 증가한 것이다. 글로벌 연대를 통한 초일류 혁신역량을 확보하고 세계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목표가 제시되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준비 없이 무작정 예산부터 늘려놓고 연구개발의 국제 협력을 하라고 압박한다면 돈만 낭비하고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국 그럴듯하게 급조된 사업계획서로 연구비를 받더라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비판은 고스란히 현장의 연구자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세계의 최고 일류급 학자들은 이미 충분한 연구비와 훌륭한 연구 여건을 가지고 있어서 오랫동안의 교류와 신뢰가 쌓였을 때 협력이 가능하며, 선진국의 최고 연구기관이 돈만으로 그들의 연구개발 현장을 열어서 우리 연구자들을 맞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결국 일방적인 퍼주기식 연구비를 욕심내는 과학자는 이류와 삼류 연구자들이거나 진정한 협력보다는 돈에 관심이 있는 ‘체리 피커’와 같은 기관일 위험성이 높다.
기초학문 연구의 중요성
이번에 불거진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과 관련하여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학계와 정치권에서도 예산 복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젊은 비정규직 연구원들의 인건비에는 영향이 없게 하겠다거나 일부 예산은 다시 조정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으니 그 결과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연구개발 예산이 다시 복원되더라도 이번 논란을 단지 일회성의 사건으로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연구개발 정책 전반에 걸친 거시적이고 장기적 관점의 성찰과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연구 인프라와 재정투입의 효율성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선진국을 따라잡아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가 아닌 ‘선도자(first mover)’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강력한 연구개발 투자와 정부 주도의 체계적인 하향식 계획을 통해 학계, 산업계와 강한 유대를 구축해 여러 과학기술 분야와 산업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와 성과는 미흡하였는데 그 이유는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성찰과 철학의 부재에 있다.
노벨상 수상도 기초연구에 대한 단기적 성과를 위한 투자 대신에 창조적 연구에 대한 장기적 지원이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1911년 카이저 빌헬름 학회로 설립된 막스플랑크협회(MPG)는 과학 진흥을 목적으로 독일 내 여러 연구소를 관리 및 경영하는 독립 비영리 연구기관의 연합회로서 연방 정부와 주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현재 자연과학, 생명과학, 인문학 분야의 총 80여 개 연구소가 공익 증진을 위한 기초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혁신적이거나 자금과 연구 기간이 많이 소요되는 연구 분야를 중점적으로 지원하는데 단일 연구기관으로는 가장 많은 3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일본의 경우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이화학연구소(RIKEN)는 1917년에 설립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많이 수상할 수 있던 비결로 자유로운 연구 환경과 미국이나 유럽 등으로 유학을 떠나는 대신 일본에서 스승과 제자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창적인 연구를 하는 분위기를 꼽는데 이화학연구소도 그런 연구기관으로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초과학에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투자한 역사는 선진국에 비하여 매우 짧다. 우리나라 정부가 기초과학연구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함으로써 과학기술 선진국을 지향하고 국민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해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을 제정한 것은 1989년 12월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창조적 지식 및 원천기술 확보와 우수 연구인력 양성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부출연연구소인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설립된 것은 2011년 11월이었다. 독일이나 일본에 비하면 한 세기가 늦은 시점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설립은 응용 및 개발 기술에 집중해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한계에 달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보다 근원적인 기초연구에 집중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대학이나 출연연구소가 수행하기 어려운 긴 기간의 연구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연구를 전담하는 기관이다. 기초과학의 미지 연구 영역에서 장기형, 대형, 집단 연구 형태로 연구를 수행하는 모델을 도입하였다. 막스플랑크협회나 이화학연구소가 바로 이 영역에서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기초과학연구원 지하실험연구단은 암흑물질과 중성미자와 같은 매우 희귀한 상호작용을 측정하여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실험과 연구를 목적으로 2022년 10월 세계 6위급 지하 실험시설을 완공하였다. 강원도 정선군 예미산의 이름을 따서 ‘예미랩’이라 이름 붙인 이 시설은 지하 1,000m 깊이에 있는 한덕철광산업의 신예미광업소 갱도를 활용한 6년간의 공사 결과이다. 앞으로 좋은 실험 결과가 나온다면 노벨상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308억 원이 투자된 이곳에서의 연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성미자 특성 연구에 사용되는 '섬광 단결정 검출기'를 생산하는 러시아의 수출이 중단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산 삭감의 영향으로 내년도 연구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예미랩은 내년도 운영 예산으로 20여억 원을 요구했는데 10억 원만 배정되었다. 그마저도 예산 조정과정에서 삭감되어 실제 배정된 액수는 7억여 원이라고 한다. 과학계의 난제를 풀기 위해 야심차게 도전한 연구자들은 부족한 예산을 메꾸기 위해 뛰어다녀야 할 지경이 되었다.
한국의 기초과학 분야 연구예산은 정부 연구개발예산의 14.4%에 해당한다. OECD 국가들의 평균은 17.2%이고, 미국은 16.8%, 일본은 15.8%이니 우리나라의 예산은 낮은 편에 속한다. GDP 대비로는 0.26%이며 OECD 국가들의 평균인 0.42%보다 낮다. 과학기술의 핵심은 물리, 수학, 화학, 생명과 같은 기초과학이며 이 분야의 연구가 곧바로 응용연구와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70-80년대의 이차전지 연구가 수십 년 후 전기차 시대를 열었고 RNA와 나노입자에 대한 꾸준한 연구가 코로나 백신으로 이어진 것처럼 기초과학의 연구 성과는 당장 국가 산업과 연결되진 않지만, 시간이 지난 후 인간 생활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올 것이다.
이덕환 교수가 잘 지적하였듯이 현대의 과학은 이미 ”모두를 위한 과학“으로 성격이 변화하였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과학기술정책의 핵심은 ‘창의적 연구개발’이다. 과학자와 연구자들이 훌륭한 성과를 창출하고 지식과 경험을 축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근시안적으로 더 빨리,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과학기술정책의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창의적 연구’는 상당 수준의 비효율과 자유로움을 허용하는 환경에서만 발휘될 수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경험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실한 실패’를 용인하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하면 새로운 지식을 더해 세계 지식경제를 선도하며 아울러 미래 국가 발전의 동력을 찾아가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과 같은 기초학문의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의 제목에 ‘기초과학’이라는 단어 대신 ‘기초학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개발비와 관련된 논의에서 주로 이공계 분야의 문제만 논의되었고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10여 년의 인문사회 분야 연구지원은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1.5~1.7%에 불과하다. 올해까지 연구개발 총예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인문사회 분야 연구비 예산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인문학 분야의 연구개발비는 GDP 대비 비중이 0.08%로 세계 평균(0.11%)보다 낮다. 미국과 영국은 정부 연구비 예산의 7~9%를 인문사회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사회와 문화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하며 인간과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가치를 제공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연구 분야의 개발과 미래의 연구혁신은 인문사회 분야와 과학기술 분야의 융합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예를 들면 최근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에서 과학은 기술과 데이터 분석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은 정책, 정치, 외교, 법률 등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놓치고 있는 핵심은 기후변화가 근본적으로 인류의 활동에 의해 촉발되었으므로 기후변화를 초래한 기술의 발전 및 인간 삶의 변화에 담긴 인간의 욕망과 태도, 책임과 같은 문제를 성찰하지 않고는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정의와 불평등과 같은 윤리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통한 융합적, 통섭적 접근이 필요하기에 최근 ‘기후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 영역의 필요성과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인문학을 개인의 교양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의 지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종의 공공재 내지 사회적 자산으로 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인문학 분야의 학술생태계 자체가 급속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대학에서도 실용적인 분야에만 관심이 있고 소위 말하는 돈 되는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인문사회 분야의 기초학문은 고사 위기에 놓여있다. 그런데 구글이나 스카이프 같은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철학자들의 조언을 넘어 사내에 최고철학책임자(CPO)를 고용함으로써 현재 4차 산업혁명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비즈니스 환경에서의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 있다고 한다. 최고철학책임자는 삶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기업이 추구해야 할 목적과 지침을 제공하며 도덕적 목적과 수익성이 결합된 혁신을 지향하는 비즈니스를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에 사람의 가치와 기술을 접목하려 할 때 최고철학책임자는 보다 ‘도덕적인’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침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은 우리의 현실과 멀어 보이지만 합리적 사고와 책임감 있는 리더십을 갖춘 기업인들의 이런 혁신적이고 선도적인 시도가 세계 최고 기업이 가진 경쟁력의 원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연구개발비를 둘러싼 문제가 일회성 논란으로 끝나지 말고 기초학문의 중요성과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성찰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류지석 / 문화공간 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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