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8. 신주와 미호②

박기철 승인 2024.02.26 17:06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8-2. 황제가 총애하는 미호

놀라지마. 어느날 키가 2m가 넘는 덩치 큰 남자가 내가 모시던 공작의 집으로 왔어. 첫인상부터 우리부리했어. 당시 내가 모시던 공작은 번역을 잘 해서 번역을 의뢰하러 온 고객이려니 여겼지. 눈초리가 날카로왔지만 그는 잘 생긴 남자였어. 말하는 폼새나 몸가짐도 호탕했어. 공작은 그에게 굉장히 유난히 정중하게 대했어. 매우 높은 사람이려니 생각은 했지. 내가 그에게 먹을 걸 갔다 주려고 다가가니까 날 뚫어지게 쳐다보더군. 어릴 적부터 나는 남자들의 그런 시선을 하도 많이 당해봐서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 이쁜 여자인 나는 그런 거에 익숙해서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가 집에서 나가자 공작은 나한테 와서 조용히 말했지. 이제 너를 내 곁에서 놔줘야겠다고. 아까 그 장신의 우리부리한 남자가 바로 황제인데 그 황제가 나를 분명하게 원한다고 하면서… 아! 나는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그리 실망하지 않았어. 원래 여러 남자들을 겪었기 때문일 거야. 속으로 생각했어. 드디어 나는 여자로서 정상에 서게 되는구나. 내 나이 19, 황제의 나이 31살 때였어.

아니 너는 그렇게 남자가 바뀌어도 별로 감정의 요동이 없네. 널 많이 위해 주면서 널 사랑하던 공작이 너와 이별선언을 하는데 그냥 신분상승을 생각했단 말이야? 너란 여자 참 대단하다.

어쩌겠어. 이미 많은 남자들이 나를 거쳐갔잖아. 그러니 그런 이별에 이미 익숙하며 노숙해진 경험 탓도 있고 나의 상냥한 품성이 많은 여러 남자를 품을 수 있는 모성애적 재능 덕도 있었겠지. 난 바로 다음 날 황궁으로 들어갔어. 황제는 날 보더니 무지하게 좋아하더구만. 난 그렇게 황제의 애인인 정부가 되었어. 평민에서 하녀로, 하녀에서 포로로, 포로에서 창녀로, 창녀에서 공작부인으로, 공작부인에서 황제의 정부로… 엄청나지 않아. 그런데 여자인 내가 정부(情婦)로서 모실 황제는 남자로서 실로 엄청난 싸나이였어. 그냥 시시한 황제가 아니었어. 키만 큰 게 아니고 생각이 큰 사람이었어. 그냥 황제가 아니라 대제(The Great)였어. 나중에 역사가 그를 그렇게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하게 되지. 그는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를 강국으로 바꾸는 대업적을 달성했기 때문이야.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신하들이랑 이웃 옆나라 여러 선진국들을 다니면서 견학도 하면서 많이 배우려고 노력하던 지도자였어. 이 때 그는 황제 신분을 숨기며 평민 옷을 입고 아주 털털하게 다녔다고 하더군. 그냥 일반인처럼 다녔대. 신하들과 같이 시장바닥에서 거친 음식이나 술도 꿀떡꿀떡 잘 먹고 마셨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남자를 중에서 제일 호방한 호탕한 호쾌한 남자였어. 생각에 거침이 없었어. 고리타분한 격식과 형식을 싫어했어. 그의 생각은 매우 실용적이었어. 실제로 쓰일 뭔가를 만드는 거에 관심이 많았어. 한마디로 그는 진정한 실학자였어. 그리고 참다운 개혁가였지. 그는 야망이 큰 황제였지만 나한테는 그냥 순순한 남자였어. 여자를 매우 좋아하는 호색한이었다는 그는 나를 자신의 황궁으로 끌어들이자 주로 내 방으로 왔어. 물론 나보다 예쁜 정부들도 많았겠지만 황제는 나한테 끌려왔어. 왜 그랬을까? 내가 무슨 요망한 방중술 같은 걸 익혀서 황제를 잠자리에서 까무러치도록 기쁘게 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었어. 난 그냥 이쁜 여자였어. 그런데 난 모성애 재능이 있는 여자라고 아까 말했잖아. 황제가 나를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어. 황제는 나한테 오면 세상 고민근심걱정 다 없어지는 것같다고 말했어. 나한테 안기면 그 큰 키의 황제가 그냥 어린 아이 같았어. 내가 그 남자를 품는 상당히 부드러운 매력 때문이었겠지. 황제는 안면두통일지 모를 편두통이 심했는데 나한테만 오면 그 끔찍한 통증이 사라진다고 했어. 결국 나는 편두통 치료사로서의 정부 역할을 제대로 한 거지. 결코 곁에 없어서는 안 될 여자였던 거지. 편두통이라는 게 신경성인 경우가 많거든. 신경이 안정되면 통증이 사라지고 신경에 예민하면 통증이 심하다고 하더군. 그렇게 나는 대제로 불리게 된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정부가 되었어. 지금 여기서도 편두통이 심하면 분명히 날 찾겠다며 수소문하고 다닐 텐데 그 사내 보고 싶네. 그런데 나의 정상은 또 있었어. 더 높은 신분상승의 정상, 그리고 또 더 나아가 최후의 정상이 남아 있지. 듣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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