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37)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5장 폭발직전 버든마을(3)

이득수 승인 2024.04.29 00:00 의견 0

“그렇지만 나는 아이다. 시집을 여러 권 낸 시인이 어데 흔하나? 그리고 공무원사회에서 서기관이면 군인으로 치면 거의 장성급이라면서. 나는 그런 니를 제일로 친다. 절마들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저만큼씩이라도 출세한 것이 자랑인 모양인데 나는 그래도 우리 동창 중에서는 마 친구 니가...”

“마, 됐다. 내러가자.”

15. 폭발직전 버든마을(3)

자리를 파하고 부산에 사는 진순호란 친구의 승용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열찬이 니도 인자 동창회 자주 좀 나오너라.”

학교에 다닐 때나 중소기업사장이 된 지금이나 조용조용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드러나는 법이 없는 신중한 친구가 말을 꺼냈다. 얼마나 성실하고 변함이 없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원으로 들어간 신발밑창 가내공업이 점점 확장해서 상당한 회사가 되었을 때 일개 사원인 그를 픽업해서 사장자리에 앉힐 정도의 착실한 친구였다. 같은 기수에서 총동창회장을 맡아 총동창회 체육회를 개최할 때 회장이 한 돈천만 원 경비를 대어야 하는데 망설이기만 하는 박을락이를 내세우고 자신이 조용히 얼마간의 돈을 부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처럼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가 그렇지.”

안락동에 사는 친구가 내리려 하자

“야, 우리 노래방 딱 한 시간만.”

하고 차를 세우자

“술도 취했지만 니 차는 우짤라꼬?”

“차야 대리운전하면 되고 모처럼 우리 가열찬시인 노래 한번 들어보자.”

해서 또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도우미아가씨의 가슴에 만 원짜리를 찔러주고 놀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아따 많이도 마셨네. 열두시 전에 오면 누가 세금이라도 메기나?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기어이 열두 시를 넘겨서 오네.”

혼자 텔레비전을 보다 소파에서 잠이 든 영순씨가

“그래 서울의 용호친구랑 동창들은 많이 왔던가요?”

“아니, 용호, 주원이, 원길이, 서울 아이들은 안 왔어. 용호는 집안잔치래.”

“그래. 어서 씻고 자소.”

하고 안방으로 건너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새 잠이 들었는지 대충 씻고 나오자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자리를 펴고 자려던 열찬씨가 탁자위에 놓인 휴대폰을 보더니 살그머니 서재로 들어가 의자에 기대앉으면서 뽁뽁뽁 번호판을 누르더니 한참 만에

“옥자씨 자나?”

“...”

“그 새 잘 있었나? 전화도 없고.”

“이 늦은 밤에 웬 일로? 이제 전화 안 하기로 했잖아?”

“응.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서.”

“가정을 지켜야지. 나도 남의 가정에 피해주고 싶지 않고.”

“그게 아니고 오늘 울산의 결혼식에 갔다가 청량의 산골짜기에 백숙을 묵으러 갔는데 개구리가 우는 논과 솔밭이 있는 야산과 무덤을 쳐다보니 옥자씨가 생각나서.”

“피이.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뭐.”

“아니야. 정말 미안해.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

“정말 미안해. 내게 욕이라도 실컷 해주면 미안하기라도 덜 할 텐데.”

“...”

“그리고 말이야. 아직 태어나지도 못 한 우리의 그 아이, 4개월이 조금 넘어 옥자씨가 떼었다는 그 아이가 얼마나 불쌍한지.”

“...”

“이 봐. 듣고 있어?”

“...”

그 순간이었다.

“보소! 당신 지금 거기 무슨 소리요?”

고함과 함께 열찬씨의 휴대폰이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니, 당신이!”

“도대체 무슨 소리요? 아직도 첫사랑 순영이를 못 잊는다고, 뭐 그 여자가 당신 아이를 떼었다고?”

“아, 아니야.”

“아니기는? 그러니까 지금도 죽고 못 살지. 혹시 안 떼고 낳은 아이는 없소? 살았으면 한 마흔쯤 되었겠네?”

“아, 아니야. 여기는 진주여자야.”

“뭐 진주라? 이 덜 떨어진 화상아, 첫사랑 순영씨말고도 또 여자가 있단 말이지?”

“왜 당신도 들어서 알잖아? 면사무소 댕길 때 진주아가씨.”

열찬씨의 신혼시절 형수 김해댁이 무슨 자랑거리처럼 영순씨에게 면사무소에서 사귀던 아가씨가 있었고 어머니명촌댁에게 마치 며느리처럼 그렇게 잘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해서 하루는 볼이 부어서 몸 저 누운 걸 황망 중에 일어난 경과며 지금은 파독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현지인과 결혼했을지도 모르니 아무 걱정 없다고 달래서 겨우 수습한 적도 있었다.

“독일 갔다던 그 여자가 와 갑자기 나타났노?”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한국에 있었대. 독일이 아니라 고향진주로 간 거지.”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자기도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을 텐데?”

“아니야. 나 때문에 아직 결혼을 안 했대. 남자를 못 믿어서.”

“그럼 그 뿐이지. 이제 와서 당신을 찾으며 우짠단 말이고?”

“찾아서 찾은 것이 아니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이름을 발견했데. 시집소개와 함께.”

“저런 또 신가 시집이 문제를 일으켰네. 돈도 안 되는 그 놈의 개똥문학!”

“...”

그러고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신 우짤낀데?”

“우짜기는?”

“내 하고는 살만큼 살았으니 인자 진주 여자 쪽에 가봐야지.”

“무슨 소리?”

“남자가 양심이 있어야지. 그라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버리고 말 것가?”

“그게 아니라...”

“내일 당장 진주로 가소. 부산에는 안 와도 되요.”

“무슨 소리?”

“내 당장 짐을 싸줄까?”

“와 이라노?”

“인자 나는 다시 찾지도 부르지도 말고 내일 날 새면 진주로 가소.”

“와 이라는데. 여보!”

“여보소리도 하지 말고!”

하면서 안방으로 들어가 탕! 소리도 요란하게 방문을 닫고는 아무리 사정을 해도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술이 너무 취해서인지 그 급박한 사정에서도 쓰러져 잠이 들었던 열찬씨가

“...?”

잠에서 깨자말자 뭔가 심상찮은 느낌에 정신을 가다듬다

(아!)

방바닥에 내팽개쳐진 휴대폰을 보고서야 비로소 간밤에 있었던 일이 흐릿하게 생각나 그 꿈인지 생신지도 모를 어지러운 상황, 차라리 꿈이라면 좋을 순간을 생각하다 급한 대로 안방 문을 두드리며

“여보, 자나? 미안해!”

“...”

손잡이를 돌려봐도 문이 잠겨있었다.

“미안해. 문 좀 열어봐.”

“진주에 이적지 시집도 안 가고 기다리는 여자가 있는데 내가 왜 문을 열어줘?”

“...”

“그렇게 애탄지탄 못 잊는 여자가 있으면 당장 가서 살면 되지. 문은 와 자꼬 열어라 카는데?”

“미안해.”

“두말 할 것 없이 진주로 가소. 생각해보니 그 여자도 불쌍하더군. 천지에 능력도 없고 인정도 없는 저 인간한테 나하나 희생하면 되지 죄 없는 진주여자는 왜 또?”

“...”

“두 말 할 것도 없이 진주로 가소. 내 사는 거는 내 알아서 살 테니까. 지금 옷가방 사주까? 진주로 부쳐주까?”

아직은 너무 완강해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던 열찬씨는 문득 여기 보다는 진주의 옥수씨가 더 놀라고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얼굴을 보고 악을 쓰며 욕이라도 하지만 자다가 변을 당한 그 외로운 여인은...

머리가 지끈지끈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냉수를 한 컵 마시고는

“여보, 내 휴대폰 고쳐올 게.”

“오기는 마러 와? 곧장 진주로 가지.”

“또 그런다. 내 갔다 올 게.”

조심스레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옳지. 진주로 가는구나. 인자는 다시 오지도 마소.”

영순씨의 목소리가 뒤따라 왔다.

급한 대로 아파트 앞의 휴대폰가게에 들러 보여주니

“이거 너무 심해서 여기서는 물론 서비스센터에서도 고쳐 질지 모르겠네.”

해서

“보소. 서비스센터가 어데 있소?”

물어서 안락동의 한전 맞은 편 서비스센터에서 한참이나 기다리는데

“가열찬손님, 여기는 올레가 아니고 SK입니다. 올레는 수안동 동래전화국 옆에 있습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 버스를 타고 한참 걸려 한국통신올레에서 수리를 의뢰하고 기다려

“그 많이 닳았는데 어르신 웬만하면 하나 바꾸시죠. 요새 새로 나온 스마트폰은 가볍고 성능도 좋고 또 효도 폰으로 신청하면 값도 싸고.”

수리공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예.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하는 순간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려 화가 난 영순씨는 아닐 테고 놀라고도 궁금한 옥자씬가 보다하고 전화기를 귀에 대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만 숨이 턱 막혔다. 뜻밖에도 순영씨의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예. 순영씨가 어찌?”

“그 보다 열찬씨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닌데요.”

“요새 자꾸 꿈에 보이다가 마지막에 흐릿하게 사라지는 모습이 심상찮아서 통 잠이 안 와요. 별일 없는 거지요?”

“예. 별일은 무슨 별일? 그런데 순영씨 건강은 요즘 좀 어때요?”

“조금씩 힘이 붙어 영감님하고 회동동 밭에 자주 가지요. 열찬씨 정말 별일 없는 거지요.”

“예. 아무 탈 없답니다.”

하면서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영순씨와 옥자씨 사이에서 난처해 죽을 판에 어쩜 순영씨의 전화가 다 오다니...

“참 며칠 전 원동교 밑에 지나가는 열찬씨를 봤는데 허리도 꼿꼿하고 걸음걸이도 씩씩하고 괜찮던데 말입니다.”

“그래요? 언제?”

“한 일주일 됐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지 맞은편에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나는 가슴이 멎을 것 같이 놀라 하마터면 ‘아, 열찬씨!’ 하고 소리칠 번하다가 깜짝 놀라 영감 눈치를 보기가 바빴는데.”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다리 밑에서 유심히 날 쳐다보던 사람이 순영씨였어요?”

“예. 열찬씨는 내가 얼굴 타지 말라고 뭘 덮어쓴 바람에 미처 못 알아봤을 거예요.”

“미안해요. 첫사랑이니 뭐니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정작 얼굴도 못 알아 봤으니.”

“뭐. 괜찮아요. 열찬씨만 별일 없으면.”

“그래요. 나중에 성수자시인이랑 연락해서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

“예. 그런데 정말 아무 일 없지요?”

“예.”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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