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말댁 일은 울산동생 니도 들었제?”
“예. 화옥이형님 일도 그 형님 둘째아들 진철이가 내하고 동갑이라서 잘 압니더.”
“그래 나중에 대동댁이야기는 울산동생 니가 부산동생한테 해주고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옴말댁이야기나 한번 해 볼까?”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찬씨네 집에서 앞세메로 향하는 골목 남쪽의 길고 구불텅한 담안에 옴말댁이 있었다. 가장인 옴말박손은 키가 작고 조용조용한 사람이라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지만 아내 옴말댁은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성격도 괄괄해서 앞세메에서 빨래를 할 때나 어울려 밭을 매거나 항상 그 커다란 목소리와 거침없는 말투로 좌중을 이끌어나갔고 그 집 뒤 긴 골목길을 걷던 사람들은 언제나 옴말댁의 커다란 목소리를 듣기마련이었다.
부농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밥을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 옴말댁이 처음 시집왔을 때 이웃들에게 택호걸이 술 한 잔을 내고 택호를 받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아무튼 열찬씨가 자라나던 당시에는 모두들 옴말댁으로 부르고 있었다.
“동생 니도 알다시피 그 집에도 형제가 좀 많나? 내보다도 두 살 많은 주택이형님을 비롯해서 진택이, 영택이, 정자, 영자, 영복이, 숙자, 영덕이 오롱조롱 칠남매를 키우는데 하루는 장에서 까지매기를 사와서 지져서 저녁을 먹는지 골목을 걸어가던 둔터댁인가 누구의 귀에
“엄마, 아부지는 와 온 마리 주고 나는 와 반 마리 주노?”
“마 시끄럽다.”
“나도 온 마리 주면 안 되나?”
“이 노무 종내기야, 여게 한 마리썩 다 줄 까지매기가 어데 있노?”
“그라면 아부지는 와 온 마리를 주노?”
“시끄럽다. 마 탁 때리죽이 았아뿔라.”
그리고는 다음날 마을아낙들이 공동으로 모를 심는데 평소 옴말댁의 기세에 눌려 지냈던 그 아낙이
“참 희안도 하제? 우리 마실에 서방은 까지매기 온 마리 주고 자석들은 까지매기 반 마리를 주는 집이 다 있단 말이야.”
“그 기 무신 소리고?”
“신랑각시 얼매나 사이가 좋으면 나매만 온 마리 주고 새끼들은 반 마리 주겠노?”
“얄궂어라 그 기 눈데?”
“어제 저녁에 내가 앞세메서 빨래 이고 가다가 들었지. 앞세메 앞집이면 누겠노? 툭 하면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가 아이가?”
하는 순간
“이년의 안들이! 그래 니가 봤나?”
성격이 불같은 오말댁이 심던 모포기를 던지고 그대로 아낙을 덮쳐 논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고서 바로 온마리댁으로 불리다 마침내 옴말댁이 되었고 나중에는
“옴말댁이 보소!”
하고 불러도 웃으며 대답했고 아이들도 자신들이 처음부터 옴말댁아들, 딸로 알고 있었다.
그 장남 주택씨는 외탁을 했는지 옴말댁처럼 덩치나 목소리도 크고 특히 콧대가 곧은 사내다운 얼굴이라 있는 집에 태어나서 좀 배웠으면 한 가닥은 했을 인물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언양국민학교를 나와 6.25때 군대에도 다녀와 부지런하고 농사 잘 짓기로 소문난 만호 아버지 박일룡씨, 이까리장사 엄수봉씨와 더불어 마을에서 알아주는 총각들이었는데 같은 마을의 차동댁 딸 순남씨와 연애를 해서 버든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동네혼사를 벌여 전례가 없는 혼사로 동네 풍기를 어지렵혔다며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을에서 알아주는 잘난 총각과 예쁜 처녀의 결합이라 반은 부러움이었다.
그렇게 해서 큰 아들 정대를 비롯하여 줄줄이 아이를 낳고 잘 살았는데 크게 배운 것은 없어도 여기저기 부지런히 드나들며 마을일에도 앞장서고 제법 알아주는 젊은이가 되더니 군사정권이 들어오고 잘 살기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래도 버든에서는 좀 배운 축에 들어가는 홍주아버지 서구장과 함께 황무지 비슷하게 묵어있는 봉당골의 밭을 반듯이 개간하고 집을 지어 처자식을 솔가하여 당시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수박을 심어 언양장에 내다 팔아 솔솔이 재미를 보아 독농가로 뽑히기도 하고 당시 울주군 전체에 시범사업으로 시행하던 배단지조성사업에도 면사무소에 다니는 열찬씨가 시키는 대로 선뜻 도장을 찍고 동의해 목돈도 들어가고 결과도 알 수 없는 사업에 시원시원하게 참여하기도 했다.
열찬씨가 객지로 나간 이후로는 잘 마주치지는 않았는데 구획정리사업을 맡았던 둔터어른밑에 드나들며 간혹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날로 살림이 늘고 출입이 잦아 이제 버든을 대표하는 부자로 또 마을의 유지로 알려졌다고 했다.
마을이 수용될 당시에 담이 길고 마당이 넓은 옛날 옴말댁 집터는 장남 주택시가 봉당골로 올라가고 나서 그 때까지 미혼이던 영복이, 정자, 영덕이 세 동생이 자라서 출가를 하고 옴말댁 내외가 다 죽은 후에 공장에 다니는 외지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있었는데 그 생가를 비롯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아직도 팔지 않은 얼마간의 전답이 여기저기 출가해서 살던 형제들의 관심사가 된 것이었다. 원래 그리 많은 재산도 아니고 당시로서야 집을 비롯한 재산의 대부분을 부모제사를 모시는 장남이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치부되던 시절이라 다들 알아서 객지로 나가 돈을 벌고 제 알아서 시집장가를 가면 본가에선 그저 마을잔치나 벌여주던 정도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객지에서 고생께나 한 동생들이 장남이 보상을 받아 큰돈이 생긴다고 하니 너나없이 관심을 가지고 지난 설에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 평소에는 3,4년에 한 번도 잘 안 오던 객지로 나간 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빠짐없이 찾아와 모처럼 7남매는 물론 따른 식구까지 수십 명의 대가족이 모였지만 마을일이나 바깥출입에 익숙한 주택씨가 봉당골의 너른 집에 고기를 굽고 회를 사와 능수능란하게 접대를 했다.
그 중에서도 일찍 객지로 나가 고생 끝에 서울에 정착했지만 제대로 한번 재산도 못 모으고 여태 연립주택에 살면서 회사택시를 모는 차남 은택씨는 자신도 이미 일흔이 넘은 데다 몸이 아파 일도 잘 할 수 없다며 보상이 나오면 지금이라도 제 몫을 일부라도 좀 떼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고 부산으로 시집가서 산복도로에 붙은 동네미장원을 운영하는 막내딸 정자씨도 입장이 비슷해 둘이 한 패가 되어 요즘은 장남, 차남과 딸이 따로 없다며 노골적으로 보상금의 분배를 요구하자 잠잠하던 영복씨, 영덕씨도 은근히 한 몫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자 주택씨가 집안의 장남으로서 또 버든의 유지로서 몸에 익은 당당한 자세로 이번 추석에 다들 봉당골집으로 모이면 미리 보상금을 받아 많든 적든 성의 끝 나눠줄 것이라며 시원시원하게 약속했다.
그래서 잔뜩 기대에 부푼 형제들이 저마다 성의껏 큰형님 주택씨와 큰 올케 순남씨에게 줄 선물을 사들고
“오빠, 잘 지냈능교?”
“형수, 오랜만임더.”
추석날 오후가 되자 그 먼 서울과 부산에서 속속 봉당골로 올라갔지만
“대름 어서 오소. 고모도 어서 오고.”
주택씨의 처 순남씨와 장남 정대씨 내외가 반갑게 맞이하기는 했으나 주택씨가 보이지 않자
“형님은 요?”
“오빠는 어데 갔능교?”
물었지만
“아까 점심 잡숫고 알라들이랑 강아지 데리고 얼멍거리 쌓디마는 안 보이네. 어데 친구집에 마실이라도 갔는가?”
하고 상을 차려 호박떡과 정구지지짐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해가 저물자
“노인네가 길도 험한데 이적지 와 안 오노? 전화나 해보지.”
해도 휴대폰에서는 신호는 가는데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메시지를 남기라고만 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갈만할 곳을 물색했지만 엄수봉씨나 박일룡씨 같은 친구들이 모두 이사를 가거나 죽어서 딱히 전화를 해 볼 데도 없었다. 혹시 아랫마을이나 읍내에 나갔다 어두운 길에 넘어지기라도 했는가 싶어 아들 정대씨가 승용차로 서울산톨게이트옆으로 난 산길을 몇 번이나 되짚어보아도 기척이 없었다.
그렇게 전 가족이 뜬 눈으로 새다시피 하고 아침이 되자
“이거 무슨 일 있는 거 아이가?”
“지서에 신고라도 해야 되는 거 아이가?”
형제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이다. 그 양반이 길을 모르는 것도 아이고 허튼 짓을 할 양반도 아이고 쪼깨만 더 기다려 보자.”
아내 기남씨의 말에 건성으로 아침식사는 했지만 다들 넋이 빠져 허둥대다 오후 두 시가 넘자
“혹시 형님이...”
서울의 택시기사 은택씨가 차마 말을 뱉지 못 하고 입술을 달막거리자
“맞다. 돈을 갈라주기 싫어서...”
환갑진갑을 다 지낸 늙은 미용사 정자씨가 남편 보기가 민망한지 고개를 가로젓다
“도망간 거다. 혼자 다 묵을라고 우리를 피한 거다!”
하는 순간
“아이구야!”
여기저기 비탄의 목소리가 터졌다.
“설마?”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길을 피하며
“그 양반이 눈에 뭐가 씐 것도 아이고 그랄 택이 있나?”
아내 순남씨가
“야야, 전화나 한 번 더 해 봐라!”
해서 일제히 전화를 한다고 법석을 떠는데 이제는 아예 전원이 꺼져있다고 했다.
“아이구, 망했다. 형님이 그랄 줄을 몰랐다.”
“어데 장남만 사람이가 다 같이 아들딸 놓고 늙어가는 처지에 오빠사 묵고살 만 한데 못 묵고사는 동생들 좀 주면 안 되나?”
탄식이 늘어지자
“설마. 쪼깨만 더 기다려 보지. 무슨 연락이 오겠지.”
아내 순남씨가 달래고 아들 정대씨가 쇠고기를 사와 내외간이 굽고 지져 술상을 차려주자
“아이구, 망했다. 큰소리 탕탕 쳐놓고 인자 서울에 우째 가노?”
“사랑에 속고 돈에 운다더니 우리가 그렇구나? 인자 우리 형제는 형제도 아이다. 남보다도 못 한 사람, 혼자 묵고 도망가는 도둑, 아니 강도다!”
정자씨의 청승이 늘어지며 다들 술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참, 이 집터는 아부지 죽고 안주 안 팔았으니 아부지명의로 되어있을 끼다. 요새는 법이 바뀌어 형제들 도장을 안 찍어주면 안 넘어간다 카더라.”
누군가의 말에
“인자 우리는 형제도 아이다. 큰 오빠가 돈 안 갈라주면 절대로 도장도 찍어주지 말자.”
하는 소리에 다들 눈을 빛내는데
“그 기 옛날 임시조치법 때 말캉 형님한테 넘어갔다 카던데.”
막내 영득씨가 나섰다. 큰 형님 밑에 자식처럼 자라 출가를 할 때 크게 얻어 나온 것은 없지만 늘 언양땅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마을의 돌아가는 사정은 어느 정도 아는 것이었다.
“아이구, 망했다!”
“오빠는 인자 형제도 아이고 사람도 아이고 원쑤다 원쑤!”
정자씨가 악을 쓰자 정대씨 내외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설마 온 저녁에는 들어오겠지. 기다려 보자.”
아내 순남씨가 힘없이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시다 떠들다 졸다 밤이 새고 날이 밝아 해가 중천에 올라 정대씨 내외가 콩나물국을 끓여 아침상을 봐 왔지만
“이 판에 밥이 넘어가나? 내가 인자 이집 구석에 발걸음을 하나 봐라! 물 한 모금도 안 묵을 끼다.”
정자씨가 악을 쓰자
“인자, 형님도 아이다. 도동놈 박주택이!”
은택씨도 소리소리 지르는데 눈가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아이구, 분하고 억울해라. 장가 갈 때 살림 한 푼 안 내준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 늙어서 인지라도 한 푼 주면 처자석들 앞에 체면서고 얼굴 나고 얼매나 좋았겠노? 나는 놀부보다 더한 우리 형님이 요번에 한 푼 주면 개인택시라도 한 대 사서 그 지긋지긋한 회사택시 그만 둘라고 했는데...”
방바닥을 두드리며 중언부언하는데
“형님, 보소. 우리가 이래 있는 동안은 큰 형님이 안 들어올 것 같심더. 있어봤자 뾰족한 수도 없는데 마 헤어집시더. 귀자야, 니도 일라라. 니나 내나 식구들 보기 체면이 없지만 그렇다고 우짤끼고?”
영복씨가 나서 분위기를 진정시키는데
“아이구, 이럴 줄 모르고 나는 돈도 안 가져와서 집에 갈 차비도 없다. 서울까지 걸어가야 되겠다!”
은택씨가 지갑을 열어보며 한탄을 하자
“아이구, 혹 떼러 와서 혹 붙이고 가네.”
핸드백에서 작은 손지갑을 꺼내 열어본 귀자씨가
“나도 돈이 십 만원 밖에 없네.”
은택씨에게 건네주며
“이거면 차표는 끊겠제? 아이구, 형제간에도 있는 놈이 더 무섭네. 오빠 니캉 내캉 없는 우리끼리는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자.”
하고 눈물이 글썽한데
“형님, 그 돈은 넣어두소. 차표는 내가 끊어주께.”
영복씨가 나서 조카 정대씨의 승용차로 급한 데로 멀리서 온 두 사람을 도호리마을앞 울산역으로 실어 보냈다.
역에서 돌아온 정대씨가 쉰이 가까운 아내의 눈치를 흘낏흘낏 보며 집 안팎을 치우고 방을 쓸고 닦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형수, 우리는 감데이. 나중에라도 형님 오시면 다문 얼마씩이라도 주고 형제들 마음 좀 풀어주라 카소. 내사마 송신해서 인자 명절에 큰집도 못 오겠소.”
간곡하게 말하자
“내가 말은 해보겠지만 그 양반이 어데 내 말을 들어야지.”
순남씨도 혀를 끌끌 찼다.
“정대야. 니 중간에 끼어서 욕 받다. 난주게 아부지 들어오시거던 전화해라. 돈은 둘째고 사람 행방은 알아야 안 되겠나?”
자기보다 다섯 살 많은 막내삼촌의 말에
“알겠심더.”
하고 다들 떠나보낸 뒤에 비로소 커피 석 잔을 끓여 순남씨와 아들내외가 둘러앉아 말 한 마디도 없이 후후 커피 잔만 불어대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더니
“내다. 너거 삼촌들 하고 고모들 다 갔나?”
주택씨의 목소리에
“야, 갔심더. 그 보다 아부지 어데 계시능교?”
“니 알 거 없고. 엄마도 잘 있제?”
“야. 그 보다 아부지 와 그라는데요? 삼촌들하고 고모가 울고불고 난리아잉교?”
“마, 시끄럽다!”
“...”
“그 기 어데 내 혼자 잘 묵고 잘 살라꼬 그라나? 다 니 잘 되라고 하는 짓이다.”
“...”
“내 인자 집에 갈 끼다. 너거 엄마 보고 저녁 채리놓아라 캐라. 내 배가 고파 죽겠다.”
“...”
그렇게 끝난 부자간의 대화가 이튿날 바로 온 마을에 퍼지고 훗날 두고두고 말이 된 것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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