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당하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당신 시방 무슨 말 할라꼬 뜸들이요?”
“당신도 짐작하는가 베. 군에서 이런 꼴을 당하면.”
“그래 알았어요. 말 안 해도 잘 아니 제발 그만 둬요.”
“아, 알았어.”
하면서도 열찬씨가 이빨사이에 낀 음식물찌꺼기를 이쑤시개로 파 내 화장지에 문지르면서
(국 쏟고 ** 데이고 *대주고 빰 맞고...)
기어이 그 고약한 가사를 허밍하기 시작했다.
18. 만두가게 개업(3)
집에 와서 샤워를 한 뒤 각자 낮잠을 한 숨 자고난 오후 네 시경 현서를 보러갔는데 머리위에 모빌이 돌아가도 아이는 별 반응도 없이 새까만 눈동자를 그냥 정면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신생아실에서 같은 날 태어난 열댓 명의 영아 중에
제일 콧날이 오똑하고 머리숱이 새까맣던 아이는 일곱 칠이 다 가고 두 달이 가까워지자 동그란 얼굴윤곽과 하얀 살성과 이목구비의 조화가 묘하게 어울려 역시 미인은 뱃속에서 부터 타고나오는 구나 싶게 영서와 가화, 두 언니와는 어딘가 기본바탕부터가 다른 것 같았다.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이 하나 나왔군.”
이이의 뺨을 쓸어보며 흐뭇하게 웃는 열찬씨에게
“그렇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야.”
영순씨가 또 표정이 시무룩한 지라
“아, 왜 또?”
열찬씨가 짜증을 내자
“아이가 반응도 느리고 표정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그건 제 스스로 너무 미인인 것 같아 뻐기는 것 아닌가? 그리스신화의 자아몰입, 자아자찬이라는 나르시시즘이라고 말이야.”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열찬씨에게
“보소!”
정색한 영순씨가
“당신은 명색 할아버지가 되어 시방 농담이 나오능교? 아아 어마이는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오는 판에.”
“응?”
“세상 아이들이 우리 슬비, 정석이처럼 곱고 쉽게 카는 줄 아능교?”
“그래? 그럼 병원에 가서 의사하고 상의해 보면 되지?”
“슬비라고 그 생각 안 했겠능교? 의사가 아직 어리다고 좀 더 커봐야 안다고 해서 아이 애미애비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죄 없는 일에 무슨 탈이 날 택이 있나. 내가 보기에는 아이가 나중에 신중하고 사려 깊은 아이가 될라꼬 저러는 것인지도 몰라. 봐, 지금도 어딘가 깊은 상념에 빠진 것 같잖아? 다 삼신할미가 지 알아서 해줄 거야.”
“아이구, 답답해라. 말이나 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러고서 한 열흘쯤 지나 슬비가 다시 회사에 복직하면서 영순씨가 갓난애 현서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단순히 갓난애 현서만 보는 일이라면 견딜 만하지만 초등학생 영서을 깨워 옷을 입혀 학교에 보내고 낯 시간엔 되도록 밖으로 나도는 김 서방의 아침을 먹이고 대체로 저녁은 먹었느냐 물으면 예, 먹었다고 하지만 갈치찌게나 뭐 맛있는 게 있다고 먹어보라면 밥 한 그릇을 너끈히 비우는 지라 먹든, 안 먹든 저녁식사도 나름 준비태세가 되어 있어야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48평 너른 집의 청소에다 아이를 업고 시장을 봐오는 일까지 하루 종일 소파에 등 붙일 틈이 없다고 했다. 저녁이 되어서 슬비가 들어오면 둘이서 아이 목욕을 시키고 우유를 먹여 잠드는 것을 보고서 보통 저녁 아홉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구, 어깨, 허리, 팔다리야! 그래서 아이는 일찍 낳아 제 어미가 길러야하는구나. 8년 전 영서를 키울 때는 아직 50전이라 그렇게 피로한 줄을 몰랐는데 이젠 저녁에 집에 와서 누울 생각밖에 없네.”
하며 씻자말자 소파에 쓰러지는 지라
“밥이나 제대로 먹고 댕기나? 정신 좀 차리고 당신 침대방에 가서 자.”
해서 자러 들어가면서
“참, 당신은 밥이나 묵고 댕기나? 아침에 해 논 밥이랑 반찬이 그대로 있네.”
“응 점심은 라면하나 끓여먹고 저녁은 친구 만나서 술 한 잔 하고.”
“아이 하나 때문에 제 부모는 물론 우리 내외까지 온 식구가 다 고생이네. 그나마 주말이 되면 좀 나으려나?”
하다가도 토요일이 되면
“일주일 내내 일하고 접대한다고 술 마시는 어마이 지는 또 얼매나 힘들겠노?”
모처럼 둘이 오붓하게 한나절을 보내고 점심이나 먹으려 나가자고 생각했던 열찬씨를 두고 또 딸네집에 가는 것이었다.
“당신은 힘도 안 드나? 집에 와서 죽니 사니 하지 말고 휴일날은 지 애미한테 맡기지.”
“당신은 그런 소리 하지 마소. 내가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아이 둘을 낳아 키울 때 우리 엄마가 직장 댕긴다고 단 한 번도 아이를 안 떼 주고. 당신도 명색 아이애비라는 사람이 잘 노는 아이 집적거리다 울면 감당을 못 하고 나를 부르고, 내 그래서 아이 보는 일에 포원이 져서 내 딸이 시집가면 절대로 안 그럴 것이라 결심했지.”
“그래 고생이 많다.”
“어데 그 뿐인가? 잔정도 없고 솜씨도 없는 우리 시어머니가 집에 오면 아이를 안 봐주는 건 둘째 하고 아이애비가 부모 보는 앞에서 아이를 안으면 안 된다고 보는 아이도 못 보게 하고.”
“그건 그 때 시절이 다 그랬으니까.”
하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참, 당신 캔 맥주 하나 마셔볼래? 날도 덥고 몸도 처지는데 기분전환사마.”
하면서 한 번은 캔 맥주 하나를 꺼내와 뚜껑을 따고 냉장고에 넣어둔 땡초, 구서동 밭에서 직접 재배한 청양고추를 된장에 찍어먹게 하자
“야, 겁나게 시원하네. 땡초도 짭짜롬하고 얼큰한 것이 십년 먹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하고 얼굴을 펴는지라 다음 날부터는 날마다 영순씨가 올 시간에 맞춰 캔과 땡초나 오이를 준비해 먹게 하니
“당신도 참 고생이 많소.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데다 마누라 저녁참도 다 챙기고.”
“아니야. 나는 낮에 낮잠도 자고 책도 보고 산책도 하고 인자 맘이 많아 잡혔어. 잘 하면 장편소설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당신이 당신 좋아하는 작품을 쓰는 건 참 좋지만 내가 문학을 몰라 별도로 도와줄 수도 없지만 먹고 마시고 잠자고 생활불편이라도 덜어주어야 되는 데 여건이 안 되어 미안해.”
“그 야 다 자식일인데 난들 자유로울 수가 있나? 됐어.”
하며 일요일 하루만은 웬만하면 구서동 밭에 다니기로 하니 또 하나의 문제가 성당의 미사인데 하는 수 없이 새벽미사를 다니기로 했다.
어느 일요일에는 비가 와서 밭에도 못 가고 열찬씨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아침도 안 먹고 송장처럼 침대에 널브러진 영순씨를 깨워
“아침 굶었으면 점심이나 먹어야지.”
억지로 식탁으로 데려왔으나 상위에는 라면 한 냄비와 김치 한 보시기뿐인지라
“에게게! 이게 점심이라고?”
하면서 한 젓가락을 집던 영순씨가
“라면을 기차게 삶았네. 덜 익지도 않고 너무 익어 풀어지지도 않고.”
“서당 개 3년이라고 내가 퇴직한 지 벌써 3년이 넘어 나중에 혼자 살 일이 있을까 봐 조금씩 연습한 것이 이제 라면하고 계란프라이는 이제 전문가수준이지.”
“맞아. 당신이 노른자까지 익힌 프라이를 접시에 담아오는 걸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싶기도 하고 재주가 매주인 사람도 제 답답하면 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다 들어.”
하다
“참, 아이들 간식비랑, 시장비, 병원비같은 생활비는 슬비가 주나?”
“처음에 월백만원 준다는 것을 내가 30만원만 받았는데 사실은 좀 모자라.”
“그래?‘
“하는 수 없지. 나도 자기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니 우리 생활비도 좀 덜 드는 셈이고 또 딸과 사위가 다 직장이 흔들리는 판에 그런 걸 따질 수도 없고. 그래서 딸 가진 죄인이란 말이 다 나오나 봐.”
“그래도 실비 한 50만원을 받아. 부모자식이 문제가 아니라 셈이란 건 그 누구와도 정확해야만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 거야.”
“다음 달부터 그러든지.”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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