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151) 19세기 우봉 조희룡이 유배 살았던 전남 임자도 답사

19세기 조희룡 유배지 임자도 혼자 다녀와
3년간 유배 살았던 ‘만구음관’ 복원돼 있어
이곳서 8곡병풍 등 대작 제작, 책 4권 집필

조해훈 승인 2024.07.30 11:34 의견 0
임자도 이흑암리마을의 조희룡 적거지로 가는 입구. [사진= 조해훈]

지난 7월 21일 혼자서 19세기 시·서·화에 뛰어났던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1789~1866)이 유배 살았던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임자도(荏子島)에 답사를 다녀왔다.

차가 없는 필자는 이날 동생 차를 빌려 타고 오전 9시에 하동 화개 지리산에서 출발했다. 광주광역시와 전남 무안을 거쳐 임자도로 들어갔다. 섬이므로 임자대교 제1·2교를 건넜다. 조희룡이 유배 살았던 이흑암리로 바로 갔다.

휴게소 두 곳에 들르고,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보니 4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조희룡 적거지(謫居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햇살이 강했다. 적거지 인근의 집들 담벼락 곳곳에는 조희룡의 매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적거지는 주차장에서 가깝고 표지판이 잘 돼 있어 찾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가 유배 살았던 집으로 올라갔다. 조희룡은 1851년 7월 왕실전례(王室典禮)에 개입되어 임자도에 유배되어 3년간 지내다가 1853년(65세) 3월 18일에 귀향하였다. 그가 ‘만구음관(萬鷗唫館)’으로 이름 지어 유배 살았던 당시의 집은 무너져 오랫동안 터만 남아있다 새로이 황토색으로 복구돼 있었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마루에 앉아 마을 앞의 들판인 파밭과 그 너머의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다. 들판은 조희룡이 유배 살 당시 바다였다고 한다. 그가 이 곳에 햇수로 3년간 유배 살면서 지은 시와 그림을 떠올려보았다.

복원된 조희룡 적거지. [사진= 조해훈]

조희룡은 화가와 서예가로 명성을 날린 조선 말기 경아전(京衙前) 계통의 중인(中人) 출신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배 시(詩)는 자신의 시집인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에 100여 수가 수록돼 있다. 이 시집은 조희룡이 유배길에 오르던 때부터 3년째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금강을 건너던 시점까지의 다양한 경험을 대체로 시기순으로 배열돼 있다. 조희룡이 임자도에서 창작한 시는 그의 유배 체험에서 나온 서정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학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그가 한시와 그림 창작에 몰두하면서 한시와 그림 두 예술의 관련 양상을 집중적으로 모색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시화일체론(詩畫一體論) 성향으로 분석된다.

그가 유배지에서 지은 시를 한 수 보자.

“숨 쉴 동안 올해 얻은 손주 잊기 어려워(抽息難忘今歲孫·추식난망금세손)/ 태어난 지 십 일 만에 나는 집을 떠났네.(生纔十日我辭門·생재십일아사문)/ 점점 자라 아비는 알고 할아비는 모를 테지(漸長知父不知祖·점장지부부지조)/ 후회스럽게도 갖고 있던 초상화 없애버렸다네.(悔洗七分遺像存·회세칠분유상존)- 옛날에 조그마한 초상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을 없애버렸다(舊有小像今洗之·구유소상금세지).”

조희룡의 적거지인 '만구음관' 마루에 앉아 셀카를 찍은 필자. [사진= 조해훈]

조희룡은 태어난 지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손주를 집에 남겨두고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러다보니 유배기간 동안 가장 눈에 밟히는 존재가 바로 손자였다. 숨 쉬는 동안, 즉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소중한 손자이다. 하지만 그 손자는 점점 자라면서 아버지만 알고 할아버지인 자신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그렸던 자신의 초상화라도 남겨두고 올 것을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이 시는 어린 손자가 너무나 보고 싶은 평범한 할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조희룡은 적거지 주변에 오죽(烏竹) 수십 그루를 주위에 옮겨 심었다. 조희룡은 매일 바닷가에 나가 백구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그러다 ‘화구암(畵鷗盦)’이란 편액도 걸었다. 임자도에는 김태라는 이가 먼저 유배와 살고 있었다. 그는 외로운 심사를 돌을 주우며 달랬다. 그는 바다에서 주은 기이한 돌을 조희룡에게 주고 글씨와 그림으로 바꾸어갔다. 조희룡의 「괴석도(怪石圖)」(간송미술관 소장)는 이 무렵 그려진 것이다.

조희룡의 적거지에서 바라본 마을의 집들과 바다. [사진= 조해훈]

조희룡은 원래 대나무는 거의 그리지 않고 주로 매화와 난을 그렸다. 그러나 유배지 집에 틀어박혀서는 매일 대를 그렸다. 이때 나온 대나무 그림 중 하나가 「노기사죽(怒氣寫竹)」이었다. ‘성난 기운으로 대나무를 그린다’는 뜻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대나무 그림에 쏟았다. 그는 적거지에서 ’화아일체(畵我一體)‘를 깨달았다. “연기·구름·대나무·돌·갈매기가 그림의 정취를 제공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림 속의 사람이 되지 않으랴.” 자신이 그림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조희룡은 이처럼 유배지에서 화아일체의 경지를 체험하였다. 그의 예술혼이 유배지에서 한층 깊어지고 넓어진 것이다.

그는 특히 유배 기간 중 대작들을 만들어나갔다. 당호가 있는 조희룡의 작품 총 19점 중 8점이 이때 나왔다. 이것들 모두가 병풍·화첩·대련 등이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8곡병풍인 「묵죽(墨竹)」, 일민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홍백매8연폭(紅白梅八連幅)」, 간송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8곡 병풍의 대나무 그림인 「노기사죽(怒氣寫竹)」 등이다. 이흑암리 앞바다의 용난굴에 다녀와서 122cm×27cm의 「용매도(龍梅圖)」(이화여대박물관 소장)을 그렸다.

조희룡의 적거지 앞 바다. [사진= 조해훈]

또한 그는 유배 기간에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가 임자도에서 쓴 책은 모두 4권이다. 산문집 『화구암난묵』, 시집 『우해악암고(又海嶽庵稿)』, 편지글을 모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 예술이론서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을 썼다.

이흑암리 마을 팡 도로변에 세워진 '조희룡 기념비'. [사진= 조희룡]

필자는 조희룡의 적거지 마루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바닷가로 나갔다. 백사장에는 유난히 갈매기들이 많았다. 그가 자신의 적거지를 「만구음관(萬鷗唫館)」, 즉 ‘만 마리의 갈매기를 읊는 집’이라고 명명한 것은 ‘그만큼 적거지 앞 바닷가에 갈매기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두 세 시간 섬을 빙빙 돌아도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주민이든, 여행객이든 만나면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건만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 문인화’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조희룡의 유배지는 섬이어서 그런지 그다지 환경이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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