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에 집 뒤 차산(茶山)에 올라갔다. 고사리도 꺾고 녹차 잎도 따기 위함이었다. 고사리는 친척 및 친구들과 몇 차례 꺾었지만 찻잎은 올해 처음 채취한다.
같은 하동군 화개면이지만 섬진강변에 위치한 상덕마을 등은 찻잎이 빨리 올라와 필자의 차밭보다 대략 일주일 전부터 딴다. 필자의 차밭은 쌍계사 말사인 국사암 마을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아 찻잎 올라오는 게 늦은 편이다. 찻잎이 올라오지 않다가 기온이 높아지니 갑자기 잎이 쑤욱 올라왔다.
차산에 오르니 부춘마을에 사시는 거문고 연주자인 율비 김근식(72) 선생과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지내신 강순형(70) 선생이 찻잎을 따고 계셨다. 화개면에는 녹차농사를 짓다 일손이 없어 그만둔 차밭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필자의 차밭에서 거의 해마다 찻잎을 따 차를 만드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인연 때문일 게다. 원두막에서 함께 인사를 나눈 후 각자 또 찻잎을 땄다.
지난달 3월 30일에 필자의 일가들이 목압서사에 와 1박2일 쉬었다 돌아갔다. 필자의 고향인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노이동 갈실마을에 살고 있는 조호곤(65) 부부와 조병옥(69) 조카님 부부가 목압서사 연빙재에서 하루 묵으며 화개장터와 쌍계사, 칠불사 등을 둘러보고 차산에서 고사리를 꺾었다.
화개장터 표지석 앞에서 조호곤 부부 조병육 조카부부 필자
지난 4월 13일에는 필자의 대학 문학회 친구인 황근희 부부와 유인식 부부가 1박2일로 놀다 갔다. 벗들은 목압서사에 온 첫날 바로 차산으로 올라가 고사리 등을 꺾었다. 두릅과 엄나무는 많이 피어버려 수확량이 적었다. 이튿날 벗들은 칠불사에 가 아자방(亞字房)을 구경하고 돌아갔다.
필자 원두막에서 황근희(왼쪽 두번 째) 부부와 유인식(오른쪽 두 번째) 부부
올해는 특히 차산에 멧돼지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많았다. 칡뿌리를 캐먹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구덩이 규모가 거의 군대 참호 수준이었다. 돌들을 헤쳐 던져놓고 구덩이를 파 칡뿌리를 캐먹었을 것이다. 구덩이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필자가 늘 칡넝쿨을 잘라내기 때문에 큰 뿌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고생 고생하여 겨우 작은 뿌리 정도를 캐먹었으리라 생각하면 안타깝기까지 하였다.
지난해는 낫으로 칡넝쿨 제거하다 왼쪽 엄지손가락 위쪽을 자른 탓에 계속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하느라 차산 관리를 좀 부실하게 하였다. 그렇다보니 올해는 억새 등이 너무 많이 번져 일거리가 엄청났다. 낫으로 틈 날 때마다 잘라내어도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제도 고사리와 찻잎을 채취하면서도 낫으로 억새와 묵은 고사리 등을 쉼 없이 잘라내었다. 고사리 수확량이 평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옆구리에 메고 다니는 베가방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양이었다. 사실 고사리가 나는 면적이 적다. 고사리 농사를 전문적으로 짓는 분들이 보면 “이것도 고사리 밭이라고 하요?”라며 비웃을 정도이다.
고사리 꺾는 친구
고사리가 올라오는 땅의 면적은 작아도 사흘에 한 번씩은 꺾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사리가 피어버린다. 이날은 닷새 만에 고사리를 꺾었다. 그러다보니 피어버린 고사리가 많았다. 핀 고사리는 손으로 꺾어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쓸모도 없으면서 높게 자란다. 그게 묵은 고사리가 돼 차나무를 덮는다. 결국 잘라내야 하는 것이다.
차나무 사이에 군데군데 고사리가 올라온다. 올해 여덟 번째 차 농사를 짓는 필자는 낫으로 야생차밭에 골도 만들고 사람이 그 사이를 다닐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런 골에 고사리가 몇 개씩 올라오는 것이다. 차산 안쪽에 있는 차밭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낫질을 하면서 대충 고사리를 꺾고 나니 율비 선생이 원두막에 앉아 계셨다. 원두막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시는데 강 선생도 오셨다. 강 선생이 율비 선생에게 “피리를 불든지 해서 노래 한 자락 해보시오.”라고 주문해 즉석 ‘원두막 콘서트’가 열렸다. 율비 선생은 “앞니가 빠져 피리 소리가 잘 안 난다.”며, “대신 우쿨렐레를 연주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에서 우쿨렐레를 꺼내 몇 곡을 연주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필자와 강 선생은 박수를 쳤다.
차산 원두막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율비 김근식 선생
연주가 끝나고 필자가 “율비 선생님 녹차 잎 딴 걸 보니 1kg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계단에 놓인 율비 선생의 찻잎이 든 가방을 보니 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러자 강 선생이 “율비 선생, 한 30분 정도 바짝 따 1kg 500g은 만듭시다.”라며 두 사람은 아래 차밭으로 갔다. 필자는 위쪽 차밭에서 찻잎을 땄다. 한 삼십분 가량 더 찻잎을 딴 후 두 사람은 먼저 내려갔다. 오후 5시 반쯤이었다. 필자는 찻잎을 좀 더 땄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찻잎이 올라오지 않아 더 이상 딸 잎이 없었다. 필자가 딴 찻잎은 어림짐작으로 300g정도 될 것 같았다.
시간이 늦어지자 벌레들이 눈과 얼굴에 자꾸 달라붙어 더 이상 차산에 있을 수 없었다. 차산에서 내려오면서 필자가 일명 ‘베이스캠프’라고 부르는 움막으로 갔다. 움막에 들어가자마자 낫으로 대나무를 하나 잘라 벽체를 보완했다. 말이 벽체이지 철제 뼈대와 지붕만 있는 움막에 필자가 대나무를 한 그루씩 잘라 가로 세로로 벽체로 묶어 붙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금방 날이 어두워졌다.
집으로 내려와 고사리와 두릅, 찻잎을 구별해 정리를 한 후 부엌에서 가스불로 고사리를 삶았다. 삶은 고사리를 옥상에 널어놓은 후 찻잎을 덖고 비볐다. 그런 과정에 다리에 길쭉하게 화상을 입고 말았다. <글·사진 = 조해훈>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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