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먹사니즘’과 절정경험 ②절정경험(peak experience)

조송원 승인 2024.08.30 10:45 의견 0

당신은 하루에, 일주일에, 혹은 한 달에, 더 길게는 일 년에 몇 번이나 ‘절정경험’을 하는가?

절정경험의 종류는 다양하다. 오르가슴(orgasm), 소울가슴(soulgasm), 러너스 하이(runer's high), ‘아하 체험’(aha experience), 법열(法悅) 등등이다. 딱히 이름할 수는 없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자신도 의미 있는 존재라는 확인에서 얻는 만족감, 음악이나 예술 감상을 통한 정신적 고양감, 독서를 통해 얻는 감동과 지적 만족감도 절정경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간략한 용어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오르가슴은 절정의 성적 쾌감을 뜻한다. 소울가슴은 영혼(soul)과 오르가슴의 합성어(soul+orgasm)로서, 영혼의 깊은 만족감이나 기쁨을 뜻한다. 러너스 하이는 강도 높은 유산소 운동 과정에서 느끼는 쾌감이나 행복감이다.

아하 체험은 부지불식간에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와 같이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순간을 말한다. ‘유레카 효과’라고도 한다. 법열은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에 느끼는 황홀한 기쁨을 말한다.

굳이 다양한 절정경험들의 높낮이를 따질 필요가 있으랴! 각자가 처한 처지 ‘지금 여기’에서 얻는 소중한 것들이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처지에서건 누구나 절정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사이비(似而非) 절정경험과의 구분이 필요하다. 사이비 절정경험의 대표적인 게 중독(addiction)과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이다.

중독은, 어떤 물질(마약, 술, 담배 등)이나 행동(도박, 게임, 섹스 등)이 자신 그리고/혹은 타인에게 해를 끼침에도 그것을 지속적·강박적으로 소비·활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도박 중독, 게임 중독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섹스중독자도 있다고 한다.

길티 플레저는 ‘죄책감이 드는 즐거움’ 정도로 옮길 수 있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데, 막상 즐거움을 얻고 나면 뭔가 뒤가 찝찝한 것을 말한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럽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야동’ 감상, 야밤에 라면 먹기, 뒷담화하기, 악성 댓글 달기, 딥페이크(불법합성물) 성범죄 등이다.

사람은 즐거움과 보람으로 산다. 절정경험과 사이비는 다 같이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보람 유무에서 차이가 난다. 왜 그럴까? 에너지 투입하는 고통의 유무가 관건이다. 세상의 이치는 자명하다. 에너지 투입이란 고통 없이 거저 얻는 즐거움은 뒤끝이 안 좋다. 보람이 없다. 세상사뿐 아니라, 즐거움이나 기쁨의 획득에도 공짜 점심은 없다.

누구에게나 자아실현은 로망이다.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잘 몰라도, 하여튼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먹사니즘’에 허덕이는 현역 세대와 앞만 보며 질주했던 기성세대, 다들 자아실현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 아닐까?

마는, 자아실현은 멀리 있지 않다. 절정경험을 하는 순간이 바로 자아실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1908~1970)의 ‘욕구 5단계 이론’을 보자. 사람의 욕구는 생존, 안전, 소속감과 사랑, 인정, 자아실현의 순서로 나아간다. 대체로 아래 단계의 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위의 단계 욕구는 생겨나지 않는다.

굶어죽을 지경인 빈곤상황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장에서 인정욕구나 자아실현 욕구가 생기겠는가. 우선 살고 볼 일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생존에 지장 없고 그 생존이 안전한 상황이 되면, 소속감과 사랑이나 인정, 그리고 자아실현의 욕구는 순서에 별 상관이 없다고 필자는 추론한다.

매슬로도 인간의 욕구는 단계적으로 하나씩 찾아드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사람은 생존>안전>소속감과 사랑>인정>자아실현의 크기로 모든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생존에서 인정욕구까지 채운 사람도 자아실현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허기가 진다. ‘내가 바란 삶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반면에 안전만 확보되면, 소속이나 사랑, 인정을 뛰어넘어 자아실현으로 치닫는 사람도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자아실현에 몰두하는 것이다.

어떻게 소속과 사랑의 안온함도 없이, 남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을까? 매슬로에 의하면, 위 단계의 욕구를 잘 채운 사람은 설사 아래 단계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더라도 불안한 상황을 의연하게 버텨낼 수가 있다.

하여 조직의 보호가 없어 불안해도, 사랑이 없어 외로워도,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해도 서운한 감정 훌훌 털고 자아실현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실현은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다. 그래서 매슬로는 자아실현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절정경험을 최대한 자주, 거듭해서 느끼는 일상을 살라’는 것이다. 절정경험을 하는 순간이 자아실현의 순간이니, 자주 거듭하여 순간이 시간이 되고, 시간이 세월이 된다면, 자아실현의 정도는 높아지고 그만큼 헛헛함은 줄어들겠지.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이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가치는 아니다. 자아실현 추구로 보통의 삶이 무너지고 외롭고 추워지기 십상이다. 반면, 자아실현은커녕 인정욕구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소속감과 사랑 욕구를 채움으로써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욕구를 다 채우려함은 차라리 지나친 욕심이리라. 하나의 채움은 하나의 비움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외롭고 추우면서도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삶이나, 자아실현을 못해 좀은 헛헛해도 세상의 인정을 받거나 소속과 사랑의 안온함을 누리는 삶, 모두가 소중하다. 이 사실을 대한 깨달음 또한 ‘아하 체험’, 곧 절정경험이지 않으랴!

안전을 간당간당하게 확보하고,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주로 활자와 그 내용의 새김질(사색)을 통해 절정경험을 한다. 그 절정경험을 글로 승화하려 한다. 그러나 한해에 수십 편을 쓰지만, 아직도 글쓰기는 감당하기 벅차서 두렵다. 그 절정경험을 가리사니 잡아 맥락이 닿게 풀어내는 일에는 언제나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다. 가슴도 턱 막히고 답답해진다.

그 과부하를 견뎌내고 긴장을 풀려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 가끔씩은 폭음도 한다. 절정경험의 플러스 효과를 중독의 마이너스 효과로 다 까먹는 셈이다. 곧, +-=0이다.

그러나 어쩌랴! 0+0=0인 삶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게 내 생겨먹은 대로의 삶이고,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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