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 서상균]

21. 교장선생님의 욕심과 의심치매(11)

이튿날은 모처럼 자식들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크게 한판 벌여보자는 마장공 영신씨의 제안으로 모두 일찌감치 산우회사무실로 모이기로 하고 열찬씨가 나서는데
“보소. 같이 갑시다. 내 영신이 오면 당신은 연산로터리까지 태워다 줄께.”
영순씨도 냉장고에서 만두 서너 도시락과 함께 선물로 들어온 미에로 화이바 한 상자를 들고 나오다 뭔가 아쉬운 듯 신발장을 열고 이리저리 뒤지더니 빨간 여자운동화 한 켤레를 꺼내
“할망구 발에 클라나? 크면 며느리라도 주겠지.”
하며 챙겨 넣는데
“언니 문이 열렸네?”
하며 역시 무언가가 담긴 불룩한 비닐봉지를 든 영신씨가 나타났다. 여기 선물로 들어온 참치 캔 선물세트라고 했다. 둘 다 교장선생 사모님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산우회사무실에서 아홉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만나 다섯은 원탁 훌라판에, 넷은 사각 고스톱판에 붙어 신명나게 게임을 벌여 점심 먹을 개평을 떼어 오후 한 시쯤 일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리더니
“보소. 일이 잘 해결됐다. 교장선생님도 사모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고 작년처럼 그래도 지내기로 했다.”
평소에 안 붙이던 <님>자를 꼬박꼬박 붙이는 것이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우째 그래 쉽게 해결이 됐는데?”
“오늘은 두 양반이 정신이 말짱하더라. 그라고 빨간 운동화가 너무 맘에 든다 카더라.”
“잘 되기는 됐는데 언제 또 정신이 해까닥 할 지 모르겠네.”
“무슨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자기가 참치통조림 지져서 밥을 준다는 것을 동래구청 앞에 모시고 나와 <김밥천국>에서 점심까지 대접했지. 이제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래, 수고했어.”
하고 점심을 먹고 와서는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다들 용돈이 넉넉하니 판을 키우자며 500원에서 시작하는 판돈도 1,000원으로 두 배로 키우고 개평도 없이 따는 사람이 다 가져가기로 했으니 모처럼 노름다운 노름이 벌어진 것이었다. 겨우 본전에 미치다 다시 조금씩 잃어 두어 시간 지나자 열찬씨는 이미 꽤 많은 돈을 잃었는데
“그 누구 전화지? 정신없는데 전화 좀 받고 하지.”
자신은 게임에 끼지 않고 이 판 저 판을 넘나들며 대형이 터지면 눈을 찡긋거리며 천 원짜리 한두 장을 얻어 여남 장을 손에 쥐고 입이 헤 벌어진 손사장이 휴대폰을 들고 보니
“국장님, 전화 온 줄도 모르네.”
하고 건네주는 순간
“여보세요?”
하던 열찬씨가 그만 움찔했다. 저 건너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교장선생이었다. 저쪽에서 말이 떨어지기를 한참이나 기다리는데
“이 국장, 땡큐 없나?”
하고 판을 돌리던 친구들이 열찬씨의 순서가 되자
“이 판은 나가리 하고 가국장은 전화 받고 이따 하지.”
하는 바람에 패를 놓고 문을 열고 나가 계단에 서서
“여보세요. 이야기 잘 끝났다면서요?”
쏴아, 얼굴을 덮치는 찬바람에 미간을 찌푸리며 기다리는데
“마, 만두하고 운동화 갖다 주면 뭐 다 되는 줄 알고?”
“예?”
“살구씨로 야시 꼬신다고 이 늙은이들을 아주 가지고 놀라캤나?”
“...”
“당장 운동화랑 만두랑 참치 캔도 가져가고 우리 거름 내 놔?”
“이야기 잘 됐다던데 왜 또 이러십니까?”
“잘 되기는? 개 코로 잘 됐나? 남의 거름이나 훔쳐갈라고 사람 꼬시면서.”
“예에?”
하는 순간
“어데 거름만 훔쳐가나? 아주 남의 밭을 통째로 삼킬라고 문중 답인지 아닌지 물어보는 사람이.”
사모의 목소리, 심술이 가득한 새파라동동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구, 심청궂기는 마귀할멈이 따로 없네.”
춥고 화도 나서 저도 모르게 나오는 말에
“당신 방금 뭐라캤노?”
“...”
“뭐, 마귀할멈이라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거름도둑놈이!”
“...”
“당장 두 사람 다 밭을 빼. 내일 당장 거름이랑 짐 안 빼내면 배달증명 보낼 끼다!”
“예? 뭐라고요?”
“밭을 빼라고. 밭주인을 마귀할멈이라카는 사람하고 우째 얼굴을 보겠노?”
“아니, 마귀할멈짓을 하니 마귀라 카지요?”
“뭐라고, 임마!”
“임마?”
“그래. 임마지. 이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아!”
“아니 이 양반이?”
“뭐라? 니 지금 나하고 막보자는 말이지.”
“예?”
“당장 밭 빼!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야!”
“...”
“니가 국장이면 내 아들은 교수에 의사에 세무사야! 한방에 보낸다!”
“보소!”
“보소는 암소 뭐가 보소고.”
“아니 이 어른아! 당신이 성질머리가 그래 고약해서 아아들한테 뭐로 가르쳤소?”
“뭐라? 내 성질이 어때서?”
“욕심은 하늘 똥구멍을 찌르고 인색하기는 자린고비 뺨을 치는 약봉다리에 가죽꼴기에 구두쇠에 심술은 놀부요, 할마씨는 뺑덕어멈 보다 못 하고.”
“뭐라고? 그러고도 니가 내하고 얼굴을 볼끼가?”
“얼굴을 보든 말든 좀 교육자답게 노시요. 그러고도 교장선생이라니 원 내가 다 부끄럽네. 교장은커녕 교감이나 선생도 못 되는 학교 소사도 당신보단 인품이겠다.”
“뭐라꼬! 이 새끼야!”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소. 듣는 새끼 기분 나쁘다.”
“야, 임마!”
“...”
전화를 꺼버리고 다시 훌라판에 들어갔지만 실수가 잦아 자꾸만 돈을 꼴았다. 그럭저럭 저녁식사시간이 되어 가는데
“보소. 당신 교장선생 하고 싸웠소?”
“응 한판 했지. 하도 말 같잖은 소리를 해서.”
“오늘 겨우 달래놓고 왔는데 웬만하면 좀 참지.”
“그게 그렇게 되나? 자꾸 억부소리를 하는데?”
“우짤랑교? 인자.”
“우짜기는? 아마도 물망골 농사는 물 건너 간 것 같다.”
“아이구 골치야. 우리 영신이가 또 무슨 원망을 해댈지.”
“...”

결국 모든 것이 끝이 났다. 너무나 허무한 종말이었다. 영신씨를 만나 미리 의논을 한 영순씨가 먼저 전화를 걸어 두 동서가 모두 밭을 빼 새 곡식은 심지 않되 미리 심어놓은 양파와 마늘은 6월까지 두기로 했다.

이제 어디로 가서 다시 농사를 짓느냐가 문제였지만 그 보다는 비료와 농기구랑 퇴비를 어디로 옮겨가느냐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급히 해결해야 될 일은 한창 농사에 재미가 붙은 처제 영신씨를 어떻게 하느냐가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지. 우리가 밭을 구하면 저거도 데꼬가고 못 구하면 같이 농사를 작파하는 거지.”
“그러게 당신은 왜 가만있는 황서방네를 끌어들인 거요?”
“뭐라꼬?”
열찬씨가 귀가 차서 허허 웃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는 순간 슬쩍 자기는 빠지고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뒤로 빠지는 그 고약한 버릇은 피난민에다 장기복부자로 사화생활에 적응을 못해 늘 허덕이는 아버지와 결백증에 가깝도록 깔끔한 어머니사이에 맏딸로 자라면서 저도 모르게 어머리를 본떠 생긴 버릇, 되도록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아니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본능적 방어전략인지도 몰랐다.
“어렵거나 힘들 때는 부부가 똘똘 뭉쳐야지. 물론 당신도 황당하고 힘들겠지만 직접 농사를 짓는 나만 하겠어. 그렇다면 남편의 심정이 어떤지도 걱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해야할 텐데 그저 자기는 책임이 없고 상대방이 잘못 했다며 도로 공격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
“옛날부터 땅주인의 횡포는 나라님도 못 막는다더니 과연 그러네. 나름 산전주전을 다 겪었다고 생각하던 자신이 이렇게 8순 노인에게 당할 줄을 몰랐네.”
“그러게 말이야. 평생 컵라면 하나, 커피 한 통도 안 사오는 노인데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끓여 먹이고 과일을 사다 깎아 먹이고 보신탕에 곰탕집에 외식을 시키고 만두와 순대를 가져다 먹인 것이 이렇게 아무 보람도 없이 끝나다니...”
서글픈 표정의 영순씨가
“이번에 운동화도 그랬다. 하도 모양과 색깔이 다 예뻐 엄마를 줄라고 그랬는데 말이야. 하다 못 해 열한 살이 된 영서가 신어도 될 일인데 그 야시 같은 할마시한테 뒤통수를 맞았네.”
“그깟 간식이나 외식, 운동화나부랑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그럼 얼마나 더 갖다 바쳐야 하는데?”
“박경리의 <토지>를 보면 추수가 끝나면 다음해에 땅을 뺏기지 않으려고 지주도 아닌 관리자격인 마름에게 씨암탉을 가져다 바치는 장면이 나와요. 무슨 꼬투리를 잡아 내치면 전 가족이 굶어죽게 되니까. 또 망시논을 매고난 뒤의 오뉴월 염천에 아낙네들이 지주가 좋아하는 새우젓을 담기 위해 토하(土蝦)를 잡는다고 법석을 뜨는 장면도 나오지. 그 뿐 아니라...”
“또 더 있나?”
“농노제가 시행되던 중세 유럽에서는 초야권(初夜權)이라고 해서 소작인의 딸이 시집을 가려면 결혼식 전날에 지주인 영주(領主)와 먼저 동침을 해야 허락이 떨어지는 말 같지도 않은 제도가 다 있었지.”
“그래?”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만물 중에 가장 부끄러움을 모르는 막된 종자(種子)란 뜻인가 봐. 영화를 보면 미국개척 당시의 백인지주들도 흑인노예의 딸들이 초경만 터지면 범했고 시베리아의 슬라브족이나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어. 소작인의 딸이 인물이 반반할 경우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범하고는 종모법(從母法)이라는 법을 만들어 거기서 태어나는 아이는 자식이 아닌 종으로 삼아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했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식으로 아무소리 못 하고 교장선생한테 당했단 말인가?”
“그것보다 더 하지. 힘이 약한 옛날 소작인들은 억지로 빼앗겼지만 우리는 두 고약한 늙은이에게 제 발로 모든 걸 갖다 바치고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그렇구나. 내가 미쳤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