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 교수의 생활 풍수(2) ... 풍수지리는 뭘까? - 역사
김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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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1 20:33 | 최종 수정 2021.01.0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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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의 역사
풍수지리학의 역사는 중국 후한시대에 살았던 청오(靑烏)의 《청오경(靑烏經)》에 서 그 시작을 찾고, 한국으로의 전수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당나라의 선사(禪師) 장일행(張一行)으로부터 통일신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에 싹튼 풍수지리학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교를 불교로 정함으로써 승려들에 의하여 도입된 이 학문이 마침내 사원 건립과 도읍지 선정에 크게 기여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훈요10조 중 제2항을 통하여 “전국의 사원은 도선이 산수 순역을 살펴서 개창한 곳 이외는 세우지 말라”고 자손에 게 전언까지 했다.
조선 초기에는 무학대사, 정도전 등 풍수대가들의 진언에 따라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니, 경복궁과 사대문 등은 풍수지리학의 원리에 준하여 건립되었다. 또한 유명한 지리서인 《택리지》의 <팔도총론편>에서 한양을 논하기를 “백악(白岳)은 현무(玄武:주산), 인왕(仁旺)은 백호(白虎), 낙산(駱山)(옛 서울대 동쪽의 편의 산)은 청용(靑龍), 남산(南山)은 주작(朱雀)”이라 했다.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은 또한 음택에 큰 비중을 두었는데, 효와 조상숭배를 강조하는 유교사상과 부합하여 거의 신앙화 되기까지 했다.
비극의 식민지시대에는 일제가 한국인의 풍수사상을 역이용하여 길지에 철주를 박고 지맥을 파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적 자포자기를 유도하는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얼마 전부터 일본이 박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으려는 운동은 풍수지리학에 바탕을 둔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계급사회로써 천민은 글과 풍수를 배울 수 없었으므로 명문가와 명신(名臣)중에서 풍수지리사가 많이 나왔고, 불교계에서는 입산수도하는 고승이 풍수에 통달하여 덕을 쌓은 사람에게 혈을 찾아주었다는 덕담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풍수로 인하여 민간에서는 산송(山訟)도 많이 발생했지만 탐욕이 없었던 명인・명사와 불교계 의 고승이 풍수학을 통달 전승시킨 것이 전통 풍수의 맥이 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로서는 유교계에서는 정도전(鄭道傳), 남사고(南師古), 이지함(李芝函), 맹사성(孟思誠), 채성우(蔡成禹), 안정복(安鼎福) 이외에도 많은 명사가 있었고, 불교계에서는 도선국사(道詵國師), 무학대사(無學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일지대사(一指大師), 일이대사(一耳大師), 진묵대사(眞黙大師) 외에도 많은 명사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을 기점으로 풍수지리학이 학문으로서 최고의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도 풍수지리학의 강좌가 개설되고 있으며, 학과가 생겨 전문 풍수학을 연구하며, 또한 대학 부동산 관련 학과에도 풍수지리를 응용하여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기범인문·地理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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