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안으로는 나를, 밖으로는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 말의 곡식도 만 섬의 은혜가 될 것이며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내 베품을 헤아려 남이 갚을 것을 바란다면
비록 천 냥의 많은 돈일지라도 한 푼의 공덕도 되기 어렵다.
- 施恩者(시은자) : 은혜를 베푸는 사람.
- 內不見己(내불견기) : 안으로 나를 보지 않음, 즉 내 마음에 은혜를 베푼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 外不見人(외불견인) : 밖으로 상대방을 보지 않음, 즉 남이 내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 斗粟(두속) : 한 말의 곡식. 粟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
- 萬鍾(만종) : 많은 양의 곡식. 鍾은 본래 용량의 단위로 一種(일종)은 ‘여섯 섬 네 말(六斛四斗육곡사두)’ 이다.
- 利物者(이물자) :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 즉 베푸는 사람.
- 計己之施(계기지시) : 자기가 남에게 베푼 것을 계산하는 것.
- 責人之報(책인지보) : 남이 갚기를 요구함. 責은 ‘요구하다, 독촉하다’ 의 뜻.
- 百鎰(백일) : 많은 돈. 一鎰(일일)은 ‘스무 냥(二十兩)’ 이다.
- 一文(일문) : 한 푼의 돈, 엽전 한 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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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 - 진정한 보시는 ?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말한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는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無住相布施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것으로서,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었다.
이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 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푸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 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요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보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란, 땔나무를 팔아 노모를 봉양하던 일개 나무꾼인 육조(六祖) 혜능(慧能)으로 하여금 출가의 대발심(大發心)을 일으킨 구절로 『금강경』의 요체이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 이다.
우리의 본성은 원래부터 항상 맑고 조촐하여 모든 상대적 현실에 상응(相應)함이 맑고 밝은 거울과 같아서 물건이 오면 비추고(照見) 물건이 가면 비추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되(照空) 그 거울에는 털끝만한 상(相)도 머물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오고(來) 간(去) 것은 물건뿐이오, 거울 그 자체에는 오고 감에 흔적이나 집착이 없는 것이다. 본래 맑고 깨끗한 우리 인간의 본래심(本來心)도 이처럼 시비(是非)ㆍ선악(善惡)ㆍ미추(美醜)ㆍ호오(好惡) 등의 분별을 상대에 따라 역연(歷然)하게 비추되, 그것에 끌리고 머물러(執着)서 혼란이나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깨끗한 거울처럼 나타남에 비치고 지나감에 자취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응무소주(應無所住)의 마음은 맑고 조촐한 본래심, 즉 진성(眞性)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세계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의 혜능이 오조(五祖) 홍인(弘仁)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게 된 오도송(悟道頌) 속에 잘 나타 있다.
홍인대사는 수상좌인 신수(神秀)가 지은 「이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앉지 않게 하라 -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물사특진애)」 라는 게송(偈頌)을 보고 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혜능이 지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오 -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라는 게송을 보고는 인가했다. 그리하여 홍인의 인가를 받아 종통을 잇고 의발(衣鉢-발우와 장삼)을 전수받았다.
▶예수님의 가르침 - 오른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마태복음 6장 1절~4절)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저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른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두 번째 가르침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씀이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남들 모르게 은밀하게 도우라’ 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어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 있겠는가? 둘 다 내 손인데 어느 한 손이 한 일을 다른 한 손이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씀은 결국 ‘니가 해 놓고도 니가 몰라야 한다’ 는 말씀일 것이다. 애써 기억하지 말라는 말씀을 넘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절로 행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의식하지 않은 무의식의 베품, 베품의 체질화, 이것이 바로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대중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꼭 새겨들어라는 사전 언급을 하셨는데 그 말이 바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경구(警句)이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냥 듣지 말고 잘 새겨들어라’ 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한 귀는 우리 머리의 양 옆에 붙은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알아먹는 들을귀(속귀)’ 를 말한 것이다. 말해도 알아듣질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 ‘말귀도 못 알아먹는 그런 귀는 뭐 하러 달고 있느냐? 떼어서 수제비나 끓여 먹지, 이놈들아!’ 라고 질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다시 오신다면 말귀도 못 알아먹는 우리들을 향해 이번에는 분명 이렇게 친절하게 고쳐 말씀하실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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