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송도바다와 송해 선생님

포토 에세이 통산 제1059호(2020.8.10)

이득수 승인 2020.08.09 12:01 | 최종 수정 2020.08.09 12:31 의견 0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 선생.

옛날에 1년에 딱 열두 번인 전국노래자랑이 전국을 한 바퀴 도는데 약 15년이 걸리고 점차 시군구가 늘어나면서 20년이 걸려도 단 한 번도 <전국노래자랑>을 유치하지 못한 구청이나 군청이 있다고 들었다. 민선시대가 되면서 누가 가장 빨리 <전국노래자랑>을 유치해 전 선거구민을 기쁘게 하고 마지막엔 해당 시장, 군수, 구청장이 직접 출연해 지역도 소개하고 노래도 하며 시상식까지 참석하며 선거구민에게 얼굴을 알리고 표를 모으는 이 빛나는 자리는 시군구 기초자치단체장의 가장 호사스런 꿈의 하나였다. 

그런데 부산서구에 22년 정도를 근무한 내가 한 번은 담당계장으로, 또 한 번은 담당과장으로 <전국노래자랑>을 유치하여 두 번 이나 송해 선생님을 모시고 부산송도해수욕장의 횟집에서 코가 비틀어지게 술을 마시고 20세 이상의 연장자 앞에 먼저 다운이 된 사람이니 나도 참 별난 인종이기는 하다.

송해 선생님과 첫 번째 만남은 1993년 변모 구청장을 모시고 서구청 기획실에서 근무할 때인데 당시 기획실장 이명희란 분이 매우 매사 적극적인 추진력과 기획력에 충성심을 두루 갖춘 분으로 늘 새로운 성과를 꿈꾸던 사람이라 감사계장시절 교통사고로 복직 후에도 다리를 저는 나를 명색 서열 1번 기획계장으로 추천하고 그 첫 임무를 <전국노래자랑>을 유치하라고 오더를 내린 것이었다.

피난 시절 임시수도이던 도청이 있던 서구, 충무동 해안시장과 공동어시장, 그 유명한 송도해수욕장이 있던 부산서구는 누군가 좀 노력했더라면 진작 유치를 하고 남았을 터인데 무사안일을 제1의 미덕으로 삶던 당시 <자유당 때 들어온 간부>들에 의해 단 한 번 거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원래 그 아이디어를 낸 것이 노래자랑 주관부서인 총무과 문화계가 아니니 자기들은 할 수 없다는 부서이기주의에 밀려 아이디어를 낸 기획실에서 직접 일을 맡아야 된다고 회피해서 이 일복 많은 사내의 몫이 되고 말았디.

그리고 유치계획안을 만들어 서울의 방송국에 찾아가니 “아니 송도해수욕장과 임시수도가 있는 부산 서구가 아직 한 번도 노래자랑을 안 했다구요?”

놀라면서 즉석에서 순서를 잡아 석 달 뒤엔가 노래자랑을 열었다. 부산시 전체에 예선안내의 플래카드를 다는 일과 60며 명의 스텝이 2막3일을 묵새길 숙소와 식당준비와 예산 등을 두량하는 일 외에 우리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어떻게 송해 선생을 만나 대접하는가, 그래서 서구에 대해서 좋은 멘트를 끌어내는가 였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직접 전화를 하니

“아, 송도해수욕장은 피난시절 내가 날마다 가던 곳이라 내발로 찾아갈 테니 내가 보고 싶으면 며칠 몇 시에 거북섬 앞으로 나오세요.” 했다.

그래서 약속된 오후 네 시에 술 잘 먹고 일 잘 한다고 소문난 기획실장을 모시고 가니 커다란 방송국버스가 서더니 참으로 조그맣고 볼품없는 노인 하나가 얼굴이 시꺼먼 소장수 같은 사내를 하나 데리고 내렸는데 나중 알고 보니 악단장이었다.

송도해수욕장 [부산 서구청 홈페이지]

수인사가 끝나자 마자 송해 선생은 송도에 왔으면 부산의 대선소주를 마셔야 된다면서 횟집으로 향했고 넷이 스무 병 이상 소주를 비우며 서구청 최고의 술꾼인 두꺼비 이명희 실장과 술고래  이득수계장 팀이 완패해서 어떻게 집에 갔는지도 모르는데 이튿날 고령의 송해 선생은 행사장인 구덕실내운동장에 우리보다 먼저 나와 무대를 점검하다 우리가 가자 손을 잡아주며 껄껄 웃었다. 송도 촌 강아지들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혼이 났을 테니 속은 좀 어떻냐고...

두 번째는 그러고 8년이 지난 2003년 바뀐 구청장이 느닷없이 <전국노래자랑>을 유치하겠다는 거였다. 그 당시는 주기가 15년이나 20년이 되어야 돌아오는데 8년 만에 또 한다는 건 무리라고 하니 그럼 문화관광과장이 자리를 내려놓으면 대신 할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잘랐다. 천재형에 일욕심도 많아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성격이 너무나 표독한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설령 구의 예산이 바닥이 나든, 담당공무원이 복장이 터져죽든 자기 목적인 한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이미 안면이 있는 구민(유권자)과 악수를 하거나 술을 마시며 그 눈빛을 들여다보며 정말 자신이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은 표를 달라고 하소연하는 일에 단 한 번도 망설임이 없는 사람임에 그 일을 거슬리다가는 또 수많은 경쟁자가 승진을 도모해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벌이는 행정사무관의 복마전에서는 어떻게 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물론 대학생 둘이 딸린 내가 소신을 위해 밥줄을 내어놓는다는 일이...

서울의 방송국에 눈치를 알아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어디 전국의 지자체가 부산서구뿐이냐고 아예 들어볼 생각도 않았다. 업무지시를 내리고 사나흘 내에 결과보고가 들어가지 않으면 무지하게 화를 내고 자리운운을 예사로 하는 사람이라 나와 담당계장, 담당직원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렇게 막바지에 몰려 더 이상 물러갈 곳이 없자 내가 꾀를 낸 것이 우리가 직접 송해 선생을 만나 8년 전 송도에서 소주대회를 하다 초장에 뻗은 젊은 계장인 제가 이제 <문화관광과장>이 되었는데 독재자 구청장이 다시 노래자랑을 유치하라고 하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못 하면 나는 과장자리를 내어놓고 동사무소 동장으로 간다고 통사정을 하러 가기로 했다.(내일 계속)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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