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술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젊은 직장인과 동료여성은 퇴근길에, 남편의 귀가가 늦은 아내는 아이들 재우고 남편을 기다리며 소주 한 잔씩 하는 세상이 되었다. 굳이 사랑을 잃은 사내가 아니더라도, 버려진 여인이 아니더라도 문득 직장에서 물러나거나 아직도 취직을 한 번 못 해본 청년들 까지 이 땅의 백수들은 이 시대의 가장 외롭고 슬픈 술꾼들이다.
새마을운동과 산업화가 성공하기 전인 1970년 어름까지 술은 그렇게 아무나 함부로 접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서양의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제물로, 또 동양의 독한 곡주(穀酒)들이 천신과 농사신, 조상신들을 위해 바쳐 졌을 뿐이다.
그 귀한 제주를 제사가 끝난 뒤 부족전체가 나눠 마시는 것이 바로 축제였다. 한모금만 마셔도 가슴이 홧홧하며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눈앞에 무지개가 펼쳐지는 신비한 음료, 신의 손에 이끌려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환청과 환상속의 군무(群舞)는 달이 지고 해가 뜨도록 계속되었고 환각에 사내 하나가 같이 춤추는 여인하나를 끌고 숲으로 사라져도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제사를 주관하고 축제를 집행하는 세력들이 단군처럼 정치적 지도자를 겸하기도 했지만 차츰 제관(祭官)이나 무당으로 전문화, 세습화 되면서 그들은 거의 매일 제사 술을 음복하고 둥둥둥 가장 원초적인 타악기 북과 장구를 울리며 광란의 춤을 추고 마침내 달빛 아래의 질펀한 잡단정사가 벌어졌으리라.
그래서 제사와 축제가 벌어지는 자리는 술과 성희가 질펀한 타락의 자리로 변해갔다. 애초 하늘과 신의 뜻을 받들어 인간세계의 질서를 담보하려던 자들이 매일 술에 취한 마귀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시점에도 신전에는 몸을 파는 여인이 득실거리고 그런 여인을 사는 거친 사내들의 입가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동양에서도 다름이 없어 골골이 다 무너진 초가집에 웅거하는 무당 당골네는 곡식이나 엽전을 들고 오는 거의 모든 사내 앞에 치마를 걷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소주 한 잔쯤은 아무 걱정 없이 마실 수 있는 세상, 설령 일을 않고 국고를 축내는 생활보호대상자들도 날마다 라면안주에 소주 한잔을 마시기에 넉넉하고 미국의 생활보호자들은 그들끼리 돌아가며 파티를 연다고도 했다
반면 그런 민중보다 훨씬 고아한 심성을 가진 선비나 시인은 일생 내내 술이 너무 고팠다. 사극을 보면 왕의 방엔 항상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안주와 시녀가 따라다녔고 일개 군수나 장군이 전략을 짜는 자리에도 반드시 커다란 고기뭉텅이 안주가 있었고 그 술상을 봐 주는 아름다운 여인과 장막속의 불을 끄곤 했다. 술이란 본래 권력의 부산물이지 시인의 몫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시의 원조로 삼는 당시(唐詩)의 두 대가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는 늘 술이 궁핍했다. 말이 좋아 신선이지 여기저기 떠돌며 권력에 빌붙어 며느리를 범함 타락한 당명황의 궁에 들어 양귀비 같은 왕의 여인들이 미모나 칭송하던 이백은 그 질펀한 술자리 몇 번 갖지 못하고 한갓 부랄 없는 환관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또 시성 두보는 일생 내내 술을 많이 사줄 수 있는 벼슬한 친구를 찾아 대강 양자강을 떠돌며 오롱조롱한 자식들이 먹을 양식과 자신이 마실 술을 찾아 헤매다 당뇨가 심해져 막걸리도 못 넘어갈 때쯤 죽었다. 초사로 유명한 비운의 시인 삼려대부 굴원도 날마다 강가에서 울었다고 했는데 그가 왕의 신임을 잃고 세상으로 버려진 것보다도 반쯤 취한 술이 시나브로 깨어나는 것이 서러워서 울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도 다름이 없다. 봉이 김선달과 재담꾼 정수동의 무리 역시 늘 술이 아쉬운 한량들이었고 술 한 잔에 시 한수의 김삿갓은 평생 자신이 지은 죄를 잠깐 잊을 수 있는 환각제인 술을 찾아 헤매었지만 술을 마실 기회 여인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방랑시인이 아니라 늘 술이 아쉬운 비렁뱅이로 길 위에 쓰러져 죽은 것이다.
영변약산의 진달래꽃처럼 서럽도록 붉은 한국인의 심성을 읊던 김소월역시 술이 궁해(생활고로) 아편을 먹었고 남들보다 빨리 저 너머 세상을 본 이상(李湘)도 아내를 팔아 술을 마시는 기둥서방일 뿐이었다. 기러기 날개에 서린 달빛처럼 마디마디 서러운 감성시인 박재삼도 그 선한 눈빛 가득 술의 갈증을 담고 위장병으로 죽었고 명촌리의 머리가 허연 무명시인하나는 술이 흔한 시정(市井)에서 젊음을 보내는 바람에 40년 반복된 폭음의 대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가장 가난하면서도 가장 운치 있게 술을 마신 시인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국화와 술을 사랑한 도연명을 거명할 것이다. 그의 고백서 <오류선생전>을 보면 늘 술이 아쉬웠지만 구할 수 없었고 친구가 술을 갖추어 부르면 반드시 술이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항간에는 맑은 술을 좋아하는 이백을 시선, 탁한 막걸리를 좋아하는 두보를 시성으로 부르는데 이는 그들의 천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들의 형편이 그 정도였을 것이다.
주로 친구에게 술을 얻어먹은 도연명은 청탁을 가리지 않았으니 그냥 주옹(酒翁)으로 불러도 좋고 늘 손님으로 얻어먹었으니 주객(酒客)이래도 좋을 것이다. 억지로 출세를 하거나 무리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주가 술을 주면 고요히 마시고 세상이치를 통찰한 그가 어쩌면 이백과 두보를 뛰어넘은 술의 달인 진정한 주객이지만 그가 세상에 대한 단 하나의 불만은 자신이 마실 술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었다. 선대의 주객 도연명을 존경하며 그의 시 한편을 올린다.
擬 挽歌辭(의 만가사, 죽어 떠나는 만장에 붙여)
千秋萬歲後 천추만세후
誰知榮如辱 수지영여욕
但恨在世時 단한재세시
飮酒不得足 음주부득족
오랜 세월이 흘러간 후
누 있어 나의 영욕 이야기하랴
오직 한(恨) 되는 일 남아있거니
세상에 내 마실 술 그리 없었나?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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