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한 살의 동화(童話)」 ... (14)경계인과 깍두기
말년일기 제1215호(2021.1.14)
이득수
승인
2021.01.13 15:56 | 최종 수정 2021.01.2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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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 번 연옥(煉獄)을 언급했는데 그 연옥이 천국과 지옥사이의 단순한 공간개념이 아니라 죄 많은 영혼들이 지옥을 가는 길목에 있는 대기소로서 천당이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나 긍정의 공간이 아니라 곧 지옥에 떨어질 자들에게 더한 층의 공포를 주기 위한 공간, 즉 죽음보다 더 처절한 비탄(悲嘆)의 공간임을 알았다.
그런데 살아있는 인간의 세계에도 연옥처럼 중간지대가 있으니 바로 경계인(바운더리 맨)이라는 개념이다. 이 말은 원래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과감하게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는 진보도 아니면서 고인 물처럼 침체된 현실을 비판을 하면서도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량을 한다면서 시간만 허비하는 중장년의 세대로 젊고 개혁적인 자식세대로 부터 <쉰 세대> 또는 <꼰대근성>이나 <수구꼴통>이라고 불리는 세대를 말한다.
무려 4000년 전 멀리 이집트 상(上)왕조에 파피루스에 적혀있기로 <요즘 젊은이는 도무지 버릇이 없어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다>라는 기록처럼 인류사회는 이제 겨우 외침이나 도난의 걱정이 없고 가족과 함께 따뜻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이 안온한 현실을 고수하려는 부모세대와 그 모든 것을 타파하고 보다 멀리 보다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아들세대의 부자갈등 내지 세대갈등이 있어왔고 그 와중에 자기가 처한 보수의 부조리에 회의하면서도 개혁에 참여하지 못 하는 중년이나 좀 멀고 힘들기는 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세 세상을 꿈꾸면서도 현실적 안온함을 벗어나지 못 해 망설이는 결단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이 곳 시간개념, 역사적 의미의 경계인이다.
그렇게 두 개의 세계의 경계에 서서 어느 곳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경계인이 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여당도 야당도 아닌 신당을 매번 창당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을 못하는 이론만 무성한 정치인, 또 구조적으로 장교도 병사도 될 수 없어 박쥐로 비방 받는 준사관(준위)도 있고 동물을 집합시키면 날개 있는 새라면서 빠지고 새를 모이라고 하면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동물이라고 우기는 박쥐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잡이로 지역사회는 물론 역사발전에 전혀 도움이 아닌 부정적 존재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그 <경계인>이 아무데도 끼지 못하고 별 성공도 없이 그냥 어중간히 나부대는 사람으로 <깍두기>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쓰이며 주변의 그 비슷한 사람을 지탄하거나 놀리더니 마침내 9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에 그 덤벙대기만 하는 깍두기의 이미지로 일확천금을 벌어들인 스타가 다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일상생활에 늘 자잘한 실수를 범해 웃음거리가 된 개그맨 유재석이 외발자전거를 타며 자주 넘어지는 어벙한 연기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지금 씨름꾼 강호동과 쌍벽을 이루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개그맨으로 엄청난 몸값을 받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저 연기가 그럴 뿐 개그맨 유재석은 매우 성실하고 주변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세금을 잘 내는 모범납세자, 노인을 잘 돌보는 효성이 깊은 젊은이에 기부와 봉사에도 모범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놀라운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내 기억으로 미국의 여자골프계를 호령하던 재외동포 미셀 위(위성미)가 아무 생각 없이 천방지축으로 뛰어 <메뚜기>라고 불리는 유재석을 찾아 한국에 돌아와 같이 방송에 출연해 이 시대의 한 흐름인 깍두기세대를 각인시킨 바 있다.
이 깍두기 또는 메뚜기의 이야기를 오래 한 이유는 지금 내 삶의 모습이 완전한 삶과 죽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깍두기>이기 때문이다. 깍두기도 깍두기 나름 <서울깍두기>의 맛 좋은 별미 깍두기라면 좋으련만 삶의 즐거움을 거의 다 잃고 고통만 남은 채 아직도 저 완강하고 영원한 어둠, 죽음에도 이르지 못 한 내가 바로 그 어중간한 삶의 표본이 되고만 것이다.
이제 살아온 모든 일들을 회고하여 밉든 곱든 나를 지나간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겠지만 죽을병에 걸린 일흔한 살의 내 입장에서 아직도 살아있으니 신화든 동화든 뭔가 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새삼 그런 글을 써보고도 싶으니 못난 깍두기의 입장에서도 인간의 꿈과 욕망은 끝이 없는 셈이다. 그냥 모순이라고 보기엔 아쉽고 꿈이라고 보기에는 허술한 이 어중간히 남은 목숨, 나는 참으로 어수룩한 깍두기인 것이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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