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2)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4장 서촌댁 ②닭싸움꾼

이득수 승인 2022.03.01 15:33 | 최종 수정 2022.03.04 14:40 의견 0

4. 서촌댁 ②닭싸움꾼

그렇게 쓰러진 서촌댁은 들판 가득 가을까마귀가 내려앉아 베어낸 그루터기의 하얀 무서리사이로 나락이삭을 찾고 꽁꽁 언 연당의 빙판으로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한겨울이 되도록 도무지 일어나지 못 했다.

날만 새면 할머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세 살 금찬이, 여섯 살 귀찬이도 줄곧 누워서만 지내는 할머니를 떨어져 일곱 살짜리 오빠 일찬이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큰며느리 상남댁과 장손 동찬이는 늘 찡그리는 그 얼굴로 걱정이 되는 듯 바라보기는 해도 달리 말이 없었고 작은 며느리 명촌댁은 남편 기출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닭을 잡고 열합 죽을 끓여 올렸다. 나이 열여섯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온 다리도 절고 눈치도 늦은 시골처녀를 그래도 이만한 살림꾼으로 만들어낸 것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다정하도 말이 없는 시어머니의 조용함 보살핌이었고 그래서 늘 두려우면서도 믿고 의지하는 따르는 며느리였다.

기출씨는 서촌댁을 아예 자기네 작은 방으로 모셔 큰딸 갑찬이, 작은딸 순찬이와 함께 기거하도록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한밤중에 환자 옆을 비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들에 나갈 때도 꼭 들여다보고 나간다고 인사를 했지만 집에 들어오면 손도 씻기 전에 먼저 어머니를 들여다보고 억지로 일으켜 저녁을 같이 먹고 자리에 들기 전에 한참이나 어깨나 허리를 주무르다 손을 가만히 잡아주면서 자리를 지켰다. 부모 없는 자식이 없다고 하지만 유복자로 태어난 그로서는 오로지 어머니 서촌댁 한 사람이 부모의 전부였고 유일한 언덕이었고 그 언덕마저 이제 무너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살며시 눈을 감고 가는 숨소리를 내며 깊은 회상에 잠겼다 한 번씩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서촌댁의 심정을 기출씨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 먼 전라도 지리산 달궁이라는 깊은 골짜기에서 이 외진 언양골짝으로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나타나 벙어리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이력을 숨긴 그 키가 팔대장승 같은 처녀는 하필이면 하늘과 땅이 하얗게 얼어붙어 하나가 된 것 같은 봉당골의 눈밭에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끼니도 잇지 못하는 왜소하고 게으른 청년 복성씨를 만나면서 이 가난한 마을 버든사람이 된 것인지, 그건 아무래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 내막을 끝끝내 숨겨 가슴에 묻고 저승에 갈 것임도... 

맏딸 귀남이와 선출이, 재출이, 또출이와 기출씨 자신의 5남매를 낳고 다시 열 명도 넘는 손자손녀를 줄줄이 거느리게 되었지만 불의의 사고처럼 물거리가 상한 참가자미를 먹고 둘째, 셋째 아들이 비명횡사를 하여 두서의 어느 도랑가에 묻히고 남편을 닮아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질이 유하지만 너무나 게을러 만날 구들장만 지던 장남 선출씨는 4년 전에 감기가 덧나 죽었고 입하나 줄인다고 남의 집 아이보기로 보낸 열일곱의 큰딸은 무단히 주인집 아들에게 봉변을 당한 피해자이면서도 몸을 버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밥걱정도 못 면하는 한미한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 서로가 먹고살기가 고달파 30년 넘게 내왕도 못하고 지내다 지난봄에 겨우 만난 것이 추석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저 먼저 저 세상에 가버린 것이었다. 

다섯이나 자식을 낳았지만 어느 하나 배불리 먹이거나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 해 늘 한이 되었지만 그나마 유복자로 제 아비 얼굴도 모르는 기출씨를 빼고는 이미 죄다 어미를 앞서 제 아비가 떠난 저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어머니 서촌댁의 회환과 안타까움이 어디 그뿐이랴? 그 깊은 산중에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란 외로운 처녀로서 늘 그녀의 곁을 지켜주던 아버지 텁석부리 강포수며 이름처럼 곰통 같은 오라비 곰쇠, 녹두장군을 따라나섰던 아비와 낯선 언양땅에 뿌리를 내린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오빠와의 단 두남매, 그 오라비의 추억이며 70평생을 두고 맺힌 아픔과 한과 안타까움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미련을 다 버리고 떠나가기에도 다리를 저는 장손 동찬이, 제 아비와 할아버지를 영판 빼닮아 늘 구들장만 지고 누웠다 집을 나간 얼굴이 희고 부드러우며 성질이 유한 정찬이, 대구로 식모살이를 가서 어느 직공과 야반도주를 해버렸다는 손녀 복찬이, 그 설운 유복자마저 대를 잇는 것인지 제 삼촌에 이어 또 하나의 유복자로 태어난 귀찬이와 사람은 착하지만 어딘가 옹골차지가 못해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떻게들 집안을 이끌지 걱정이 되는 상남댁, 명촌댁이 두 며느리들도 적잖은 걱정거리로 한 평생을 되돌아보는 그녀의 마음에 앙금이 될 것이었다.

어떤 때는 일부러 말을 시켜보려고 스물다섯 동찬이, 스물셋 정찬이, 열셋 상찬이, 열 살 종찬이의 큰집조카 4형제의 나이와 이름을 순서대로 말해보라고 하니 번번이 이름의 순서나 나이를 까먹고 단 한 번도 제대로 맞히지를 못 했다. 그래서 이번엔 머리가 헝클어져 자주 방바닥에 떨어지는 서촌댁의 은비녀를 눈앞에 흔들어 보이면서 

“어무이. 이 은비녀는 언제 누가 사준 겅교?”

물어보면 어떤 때는 

“울아부지 강포수가 지리산 호랑이를 잡아 호피(虎皮) 팔아 사준 거지.”

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울 오빠 곰쇠가 곰을 잡아 웅담을 팔아 사준 거지.”

하면서 언양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던 날 성뚝 앞에서 치만이형과 함께 칼을 찬 왜 순사와 드잡이를 하다 도망을 가기 직전 숨어있던 남천내 공굴 밑에서 옆집 총각 근수를 통해 전해주라고 한 사실을 도무지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이젠 정신도 왔다리, 갔다리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촉 바른 순찬이가 

“아이구, 우리 할매 정신없는 것 좀 봐라. 인자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다. 탕국냄새가 난다, 떡 냄새가 난다. 그지?”

눈만 껌뻑거리는 제 언니 갑찬이를 쳐다보다 

“이 노무 가시나가 무신 소리를 하노?”

기출씨의 눈총을 받았다. 

 

지난밤에 유독 잠을 설치고 잔기침을 많이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닭이 다섯 마리나 든 삼태기를 매고 장에 나가던 기출씨가 삼태기롤 내려놓고 

“어무이, 장에 갔다올 께요.”

인사를 하는데 오늘 따라 정신이 돌아왔는지 면경(面鏡)을 세워놓고 하얗게 센 머리를 빗고 있던 서촌댁이

“간밤 꿈에 너거 아부지가 왔다갔다. 오늘 날 데불러 온다캐서 내가 시방 머리를 빗고 있다. 야야, 너거 아부지 잘 찾아오구로 대문도 활짝 열고 축담 밑에 내 신도 좀 엎어놓아라.”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야야, 장에 갈 때 뚝다리 조심해라. 그라고 장터나 물문껄에 차도 조심해라. 요새는 간간히 차에 치어 다리를 뿌수고 죽는 사람도 있다면서. 니가 우리 집에 기둥아이가? 누가 무슨 일을 당해도 니는 괜찮아야 된데이.”

괜한 소리만 같으면서도 가슴이 뭉클해서

 “야, 갔다오겠심더.”

하는데 

“내가 전에 회남진 절에 가서 물어보이 그래도 내한테는 유복자 니가 자식노릇을 하고 니 밑에서 집안을 거둘 자식, 좀 괜찮은 자식들이 태어난다고 하더라. 부자삼대 없고 거지삼대 없다카이 니가 우짜든동 고생 좀 해라. 니 자식이나 손자들 대에서는 우리집안도 남 안 부럽게 필지 누가 아노?”

꺼져가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어갔다. 영판 석암선생이 하던 이야기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서 순찬이를 불러

“할매가 좀 이상하다. 니는 종일 할매 옆을 비우지 마라. 절대 닭 전에 오면 안 된다! 알았제?”

오금을 박고 집을 나섰다.

 

장에 나가자마자 촌 아낙들이 곡식자루와 함께 머리에 이고 오는 닭을 여남은 마리나 빼앗다시피 싸게 사서 집에서 매고 온 닭들과 함께 손쉽게 부산장꾼에게 팔아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키가 작은 송대 능골 아낙의 닭을 사서 넘기고 들어갈 때 아이들 줄 강냉이박상도 좀 사고 어머니에게 국을 끓여드릴 미역이나 광어도 좀 사야겠다고 돈을 세어보고 있는데

“어이, 버든에 키다리! 인자 슬슬 시작해볼까?”

닭 싸움꾼 권장학이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타났다. 적을 땐 너덧 명, 많을 땐 예닐곱이 되는 닭장수 중 하나가 경기돈가 충청도어디의 장바닥에서 보고 왔다는 닭싸움을 우리도 시켜보자고 하는 바람에 별 준비도 없이 장꾼이 많은 저녁나절 장마당에 동그란 금을 긋고 제 가끔의 수탉으로 술내기 닭싸움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 당사자들도 간이 옴쭐옴쭐 애간장이 다 타면서 제 닭이 이겨 기고만장하게 막걸리를 얻어 마시는 것이 너무 좋아 신명을 내곤 했다. 그 별것도 아닌 일이 우연히 지나가다 쳐다보는 장꾼들의 재미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점심을 먹고 나면 각각 자신의 수탉을 들고 나서는 닭 장수는 물론 수많은 장꾼들도 묘한 긴장감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슬슬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닭싸움이 반복되고 더러는 다쳐서 더는 싸움을 시킬 수가 없거나 잘 일어나지도 못 하는 닭이 생겨나면서 닭싸움은 처음의 막걸리 내기에서 어느 듯 돈내기로 변했고 싸움꾼도 단순한 닭 장수들 뿐 아니라 특정 닭 장수나 닭에 돈을 걸거나 직접 제 닭을 들고 나오는 전문 닭싸움꾼들이 생기기도 시작했다. 

방금 느물느물 웃으며 나타난 권장학이는 대대로 장터거리에서 국밥과 막걸리를 팔던 집 아들로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자신도 마누라에게 장사를 시키고 빈둥거리다 해방직후에는 노름쟁이 조 서방을 따라다니며 술밥이나 축내던 팔자 좋은 건달이었다. 그런 그가 한 두 번 닭싸움에 끼어들어 조금씩 재미를 보다 마침내 자신의 투계까지 가진 전문 닭 싸움꾼이 된 것이었다. 

우연찮게 닭 싸움판에 끼어든 기출씨도 언양바닥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축이었는데 그것은 뭔 일인지 시키기도 전에 제 스스로 신명을 내는 순찬이가 수탉의 힘을 올린다고 일찬이, 귀찬이까지 데리고 앞새메며 연당, 복걸로 다니며 돼지풀이나 물상추사이에 숨은 개구리를 잡으려 나서면서 장닭들이 한층 사납고 힘이 세어졌기 때문이었다. 순찬이의 회초리를 맞아 개구리가 사지를 뒤틀며 진저리를 치면 일찬이가

“야, 개구리가 다리 편다! 다리 편다!”

귀찬이와 마주 보며 손뼉까지 치며 신기해했지만 순찬이는 한눈 한 번 파는 법 없이 벼 포기나 풀 섶에 숨은 개구들을 귀신처럼 한 망태기씩 잡아와 먹였다. 거기에다 그 영악한 것은 어디서 들었는지 닭이 사나워지려면 매운 고추를 먹여야 한다면서 풋고추를 먹이다 못해 억지로 고추장을 퍼 먹이기도 했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발톱을 날카롭게 갈아주기도 했다. 덕분에 기출씨는 장날마다 닭 한두 마리 값을 따고 막걸리 잔이나 얻어 마시는 제법 알아주는 닭 싸움꾼이 된 것이었다.

그날도 기출씨는 어렵잖게 두 판이나 이겨 닭 두 마리 값을 땄다. 기출이네의 튼튼하고 사나운 데다 발톱까지 사나운 수탉을 보고 다른 싸움꾼들이 슬슬 피하는데 권장학이 앞으로 나서며

“어이, 버든에 키다리! 인자 내캉 한 번 붙어보자!”

망태기에서 자신의 닭을 꺼내었다. 보통 닭보다도 엄청나게 큰 닭이었다. 벼슬도 붉고 살집도 좋고 성질마저 사나운지 연신 날개를 푸득거리고 옆으로 발을 구르며 꾸꾸꾸 기세를 올렸다.

상대의 닭이 너무 커서 할까말까 망설이는데 덩치가 훨씬 적은 기출이네 닭도 기죽지 않고 금방이라도 권장학이네의 닭을 덮칠 듯 발을 구르고 목덜미의 깃을 세우고 있었다. 둘러섰던 구경꾼들도 우우 고함을 지르면서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저들끼리 서로 기출씨와 전장학이의 닭이 낫다면서 편을 가르고 싸움만 시작되면 금방 돈을 걸 태세였다. 어떤 사람은 저 닭은 덩치가 커지만 당신 닭은 눈빛이 살아있어 반드시 기출씨네 닭이 이긴다고 부추기기도 했다. 긴장하여 목이 바짝바짝 타기 시작한 기출씨가 국밥집에서 막걸리를 한 바가지 퍼마시고 나와서는 마침내 한번 붙어보기로 했다. 이미 두 마리 값이나 땄으니 져도 큰 손해는 없었던 것이었다.

권장학이가 닭 한두 마리 값으로는 너무 싱겁다고 이번에는 다섯 마리 값을 걸자고 제안하자 분위기는 금방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주변의 분위기로 보아 기출씨가 물러서기도 힘든 모양새였다. 기출이도 마침내 닭 다섯 마리 값을 꺼내 심판을 보는 영감에게 건넸다.

싸움은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예상을 뒤엎고 조그만 기출씨의 닭이 월등히 빠른 속도로 권장학이네 닭의 얼을 빼놓고 벼슬을 물고 늘어져 단번에 승부가 났다. 장바닥 가득 우우, 기쁨의 환호와 실망의 탄식이 넘쳤다. 어떤 사람들은 기출씨의 어깨를 두들기며 기뻐하기도 하고 당신이 제일이다, 당신같은 닭 싸움꾼은 처음 본다면서 부추겼다. 기출이가 소쿠리비행기를 고만 태우라고 해도 그게 아니다 정말 잘 한다면서 또 다른 사내들이 합세했다.

거푸 막걸리를 두어 잔 더 마신 기출씨가

“인자 우리 닭과 붙을 닭이 없소?”

자신 있게 사방을 둘러보아도 기척이 없었다. 신명이 최고조에 올라

“자, 누구나 붙을라면 붙어보소! 다섯 마리 아니라 열 마리 값으로!”

아까 딴 돈과 호주머니의 돈을 몽땅 보태 흔들어 보이며 큰소리를 탕탕 치는데

“좋지! 어디 붙어봅시다!”

아까부터 권장학이 뒤에 붙어 섰던 낯선 사내 셋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덩치가 크고 험상궂었다.

“아니, 당신들은...”

기출이가 멈칫거리며 물러서는데

“언양장에 유명한 닭 싸움꾼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가 부산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왔소. 자 붙어봅시다!”

한 사내가 기출이의 어깨를 감싸고 하나가 돈을 빼앗아 세어보더니 자신들의 돈을 같은 액수로 세어 심판 보는 영감에게 맡기고는

“자, 우리 닭 가져오시오!”

소리치자 키와 몸통이 크지만 비루먹은 것처럼 털이 별로 없고 홀쭉하고 날렵하며 벼슬이 납짝하게 올라붙어 공격하기 힘든 이상하게 생긴 닭을 권장학이가 들고 나왔다. 알고 보니 권장학이가 불러들인 한패인 모양이었다. 

“아니, 저 저 닭구새끼는...”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 못 한 샤모라는 이름의 일본 닭인 것을 짐작한 기출씨가 슬슬 물러섰지만

“어느 닭은 붙이고 어떤 닭은 못 붙인다는 법이 없지 않소? 자 어서 붙어봅시다!” 

사내 하나가 심판을 을러대어

“자, 시작합니다.”

심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단 일격에 기출씨의 닭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건 시합이 아니라 갓난아이와 장정의 싸움이었다. 어디를 찔렸는지 피를 철철 흘리며 날개를 퍼덕거리던 기출이내 닭이 이내 축 늘어졌다. 죽어버린 것이었다. 

“고맙소. 다시 그 따위 닭 가지고는 닭싸움을 하지 마소!”

빙긋 웃으며 사내들이 돌아서자 전장학이와 심판영감도 따라가 버렸다. 그렇게 기출이를 부추기던 사내들도 핫바지 방귀 새 듯 슬금슬금 사라지고 마침내 닭 전에는 기출씨와 죽은 수탉만이 남았다.

ⓒ서상균

수중에 돈이 떨어져 외상으로 막걸리를 석 잔이나 거푸 마신 기출씨가 죽은 장닭을 들고 남천내로 나와 갱빈바닥에 주저앉았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허망했다. 당장 부산 깡패들을 불러들인 권장학이를 물고 내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자신마저 죽은 장닭꼴이 될 것이 뻔했다. 죽은 닭이나 돈도 아깝지만 어머니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리려고 했던 미역과 광어를 사지 못하고 아이들 줄 강냉이박상이 날아간 것이 너무나 원통했다. 거기에다 똑 부러진 순찬이가 닭싸움은 어땠느냐, 몇 마리 값이나 땄느냐고 물어올 일이 기가 막혔다.

억장이 무너진 기출씨가 자갈밭에 주저앉아 강바닥을 까딱거리며 돌아가는 물떼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조그맣고 약한 새도 저렇게 명랑하게 재잘거리며 동무인지 부부인지 아내면 형제남매인지도 모르는 짝들과 뛰어노는데 마흔이 훌쩍 넘도록 그렇게 열심히 살아보려 했건만 나는 왜 여전히 이렇게 늘 가난하고 부대끼며 의지할 데 하나 없이 귀신이 곡을 하고 갈 봉변이나 당하고 인생살이 구비구비 온갖 난관에  봉착하는 것일까? 당찬 순찬이는 늘 가늘고 기다란 다리에 얹힌 엉덩이를 까딱거린다고 ‘물새 궁디 까분다.’고 흉을 보고 아직 어리지만 기억력이 좋고 생각이 깊은 일찬이가 낄룩낄룩 운다고 <낄룩새>로 부르는 저 작은 새 한 마리만도 못 한지 탄식하며 기출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야야, 갑찬이아배, 어이 기출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니

“여 있을 줄 알았다. 부산 깡패들한테 봉변을 당했다면서. 전장학이 그놈도 죽일 놈이지만 니도 인자 그만 그 닭싸움 같은 거는 하지마라.”

빙긋 웃으며 작은님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무슨 일을 못 당하겠노? 나는 너거 자영 조 서방하고 산다고 하룻밤에 논 닷 마지기나 집채를 날려 보낸 것이 한 분, 두 분이 아니었지. 그만 당장 숨이 넘어가 못 살 것 같아도 다 잊어지고 살아지더라. 사람 사는 기 다 그렇단다. 인생살이가 천 층 만 층 구만 층이라고 별별 희한하게 다 살아가고 고생을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또 다 그렇게 좋은 날 기쁜 날도 생기는 법이고.”

“마, 누님보기 부끄럽심더.”

“아이다. 괜찮다. 저 죽은 닭은 내 도고. 니는 엉글징이 나서 쳐다보기도 싫겠지만 내가 고아먹고 닭 값을 주꾸마.”

주섬주섬 돈을 꺼내주는데 액수가 꽤 많았다. 

“무슨 돈을 이래 많이 주능교?”
“할무이 편찮다카이 뭐 힘을 도울 열합이나 소고기나 광어라도 좀 가사서 미역 넣고 끓여드려라. 그라고 하루 일당을 더 쳤다. 니 내일 내 일 하루 해 도.”
“무슨 일인데요? 일당을 제쳐주고라도 누님 일이면 하기는 해드려야지요.”
“뭐 그래 힘든 거는 아이다. 짐 쪼깨 실으러가는 건데 빨리 끝나면 한나절도 안 걸릴 수도 있다.”
“알겠심더.”
“그런데 어디서 구루마나 니야카 하나 빌려서 끌고 오너라.”
“야.”
 “그라문 나는 간다. 니는 바로 가든지 장을 봐서 가든지 알아서 해라.”
“야.”

돈을 세어보며 가출이가 비시시 웃었다. 좋고도 더러운 게 돈이라더니 아침에 들고 나온 돈 보다 더 많은 액수가 다시 그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자고나자 숨소리가 더 약해진 서촌댁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기출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집을 나섰다. 작은님이와 약속 때문이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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