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9)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3장 해방된 언양장터 ②조 서방

이득수 승인 2022.02.26 20:30 | 최종 수정 2022.03.01 16:26 의견 0

3. 해방된 언양장터 ②조 서방 

기출씨가 모처럼 처가손님이 왔다고 아직 알을 낳는 통통한 씨암탉을 잡아 닭도리탕을 끓이게 명촌댁에게 넘겨주고 간과 염통과 모래주머니와 똥집을 앉은 자리에서 쓱쓱 잘라 안주삼아 막걸리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도 한 사발을 마시고 응진이에게도 한 잔을 주었다.

 

이제 제법 잘 걷는 일찬이까지 세 아이가 빙 둘러서서 입맛을 다시는지라 연한 간 한 점을 집어 내미니 둘은 외면을 하는데 당찬 순찬이는 눈도 깜박 않고 잘도 먹었다. 마지막엔 안주가 모자라 닭 창자를 꼬챙이로 뒤집어 소금에 빨아서 생으로 먹으니 고소하기가 참기름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푸짐한 밥상에 둘러앉은 세 아이와 명촌댁이 오랜만의 비린 국물에 환장을 하고 먹어대기 시작하자 사돈총각 보기가 멋쩍은 서촌댁은 모로 앉아 일찬이를 먹이는 척 고기를 발라 자신도 슬쩍슬쩍 잘도 먹었다. 문득 죽은 도분이 생각이 떠올라 기출이의 숟가락질이 느려지는데 아까 막걸리를 마셔서인지 응진도 깨작거리면서 숟가락질이 시원찮았다. 상을 물리고 숭늉을 마시면서 명촌댁이 주게 떡을 담아오자 아이들은 또 신이 나서 아구아구 먹어대는데 큰집의 동찬이, 상찬이, 종찬이가 걸리는지 서촌댁이 조심스레 떡 몇 개를 손수건에 싸자 명촌댁이 따로 함지에 한 가락을 담아서 건네주었다.

서촌댁, 그러니까 안사돈어른이 돌아가기 바쁘게 응진이는 올해 진장논에서 나락이 얼마나 났느냐고 물었다. 욕심 많은 처남의 꿍심을 눈치 챈 기출이가 뭐라고 말할지 머뭇거리는데 난데없이 순찬이가

“외삼촌, 올게는 풍년이라 캤다. 진장꼴짝논에서 석 섬도 더 나서 올개는 양석걱정도 없다캤다.”

촉새처럼 튀어나왔다.

“이 노무 가시나가 어른들 이바구하는데!‘

기출씨가 눈을 부라리는데

“자영, 그라먼 보통 농사짓는 땅값 도지를 곡숙 난 거 반을 주는데 자영은 아아들도 많고 하이 마 삼분지 일 나락 한 섬, 그러니까 쌀 한 가마이 값만 쳐주소.”

미리 짐작은 어느 정도 했지만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봐라, 처남. 그 천수답에 농사가 잘 됐으면 남창에 처남네 논도 엄청 곡수가 났겠네. 그 상답 열두 마지기면 열댓 섬은 족히 났겠네. 또 밭도 많고 하이 세 식구 묵고도 남겠네. 봐라, 처남 자네 보듯이 나는 이렇게 아아들도 오롱조롱하고 연로한 어무이도 계신다 아이가? 마 형편 필 때까지 좀 봐도라!”

“아임더, 자영요. 그런 소리 마소.”

입술을 꽉 깨물며 다가앉은 응진이가

“아부지 장사 치른다고 빚도 졌지요. 또 훌찌고 써리고 말키 새로 산다고 돈이 들어가서 남는 양식도 없심더.”

“무신 소리고 그라면 처갓집에서는 밥을 밥그륵에 안 퍼고 사구에 퍼 담아서 숟가락이 아닌 국자로 퍼묵는단 말이가? 세 식구가 그만큼 다 퍼묵으면 배터지겠다.”

“자영요, 한 분 생각해보소. 세상에 도둑놈이 따로 있능교, 너무 것 탐내는 사람이나 너무 땅 부치고 세 안 주는 사람이 도둑놈이지...”

“뭐라꼬! 처남이 시방 내 보고 도둑놈이라 캤나?”

벌컥 소리를 지르는 기출이가 손을 바르르 떠는데

“누부도 그렇고 자영도 그렇지. 장남도 아니면서 사돈할매도 이집에서 살고 큰집에 식구들도 손 하나 얄랑 하는 사람 없이 모조리 자영만 쳐다 보고 산다면서요. 뭐 따문에 누부랑 자영이 쇠 빠지게 일해서 큰집을 미기 살리능교? 와 내 땅에 세 안 받고 사돈식구 미기 살리야 되능교?”

“뭐라꼬! 보자보자 카이. 처남 이노무 자슥!”

손에 집히는 대로 주게떡과 동치미가 담긴 상을 밀어서 뒤집어버리고 기출이가 마당으로 나와 헛간채 너머로 넘어가는 초승달을 바라보면서

“처남 니 맘대로 해라. 논을 떠 미고 가든지, 니 누부를 데꼬 가든지. 에이 처남이라고는 넘보다 못 한 것이, 어디시 저런 독사 같은 넘이...”

소리치다 멋쩍어 그만두는데

“야야, 니가 와 이라노, 니가 와 이라노?”

명촌댁이 동생의 손을 잡고 울먹이자 일찬이도 빽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래 맞다. 논은 무거버서 몬 가지고 간다. 외삼촌, 우리 집에서 가거라. 어서 논 띠 미고 너거 집에 가거라.”

촉 바른 순찬이가 또 끼어들었다. 기가 찬 기출이가 허허 웃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결국 쌀 서말로 깎아서 도지를 주기로 했다. 이튿날 장터에 쌀 한 가마를 내어 땅세 말고도 장모님 드리라고 장닭 한 마리를 안겨서 처남을 돌려보낸 기출씨는 장이 파하고도 한참이나 국밥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걱정에 빠졌다. 저 욕심 많은 응진이가 내년부터 농사가 되든 말든 계속 땅세를 달라고, 올려달라고 떼를 쓸 것이 너무나도 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그렇지만 무심 날에는 농사를 짓고 장날에는 닭장수를 하는 기출씨에게 해방이라고 특별히 뭣이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단지 변한 것은 식구가 또 하나 늘어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둔 다섯 식구에 큰집의 어머니 서촌댁과 형수 상남댁, 다리가 아픈 장조카 동찬이와 유복녀 귀찬이와 상찬이, 종찬이의 여섯 식구가 점점 더 입이 세어져 양식은 엄청 더 들어가는데 작년, 재작년이 모두 흉년이라 먹고 사는 일이 훨씬 더 난감해진 일이었다.

이전이라고 흉년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 어느 해보다 곡식이 귀하고 곡가가 비싼 것은 일제말기 대동아전쟁에 공출(供出)로 곡식은 물론 놋그릇과 놋숟가락, 소가죽과 소뼈, 심지어는 노송에 상처를 내고 받아낸 송진까지 공출을 받아간 왜놈들이 워낙 알뜰히 나락을 추어간 때문이었다. 거기다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 내지로 갔던 수많은 귀한동포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간혹 징용이나 학도병, 혹은 정신대로 갔던 사람들도 돌아와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서 그런 것도 같았다. 더구나 언양은 현해탄을 건너 귀한동포가 들어오는 부산과 가까워 더욱더 양식이 귀하고 쌀값이 비싼지 몰랐다,

워낙 들이 좁은 마을이라 해마다 시래기나 무, 하다 못해 보리나 밀, 호밀에 콩이나 고구마를 넣은 죽을 먹지 않고 삼시 세 때를 밥, 그것도 쌀밥으로 먹는 집은 없었지만 기출씨네와 큰집은 명절의 메밥이 아니고는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보기가 힘들 정도로 하루하루 온갖 것들을 다 넣고 죽을 쑤어 끼니를 넘겨야 했다. 그 판에 또 명촌댁이 딸 금찬이를 낳아 식구도 늘었지만 상남댁, 명촌댁 두 동서가 어찌 된 셈인지 다 젖이 적어 따로 묽은 죽을 끓여 누런 설탕을 사다 넣거나 백 찜이라는 흰떡을 쪄서말려 가루를 내어 죽을 끓여 떠먹여야 했는데 나중에는 그 암죽을 끓일 쌀마저 떨어져 기출씨의 외가인 대동댁에서 쌀 닷 되를 빌려오기도 했으니 이미 칠십이 넘은 서촌댁의 밥그릇 꼭대기에 살짝 얹어주는 웁쌀마저 쓸 형편이 안 되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막는다더니 그래도 형인 선출씨가 죽고 진장골짝논 서마지기의 도지를 받으러 남창에 응진이처남이 올 때까지가 봄날이었다. 그해 이후로는 해마다 가뭄이 심하거나 비가 너무 와 논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방천공사를 한다고 골병만 들었을 뿐 제대로 알곡을 구경하기도 힘들어 씨 나락도 건지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농사꾼이 어디 땅을 놀릴 수가 있으랴? 설마 올해는 풍년이 들겠지 하는 심정으로 기출씨는 해마다 갈배기논에 모를 부어서 진장골짝까지 지게로 모치미를 지고 가더라도 악착같이 심었지만 괜히 둘째딸 순찬이만 실망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벌써 열네 살이 되어 계집 꼴이 나는 제 언니 갑찬이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느릿느릿 세상에 급한 일도 답답한 일도 없이 아침마다 머리를 땋아 댕기를 매어주는 할머니 서촌댁을 따라다니며 큰집, 작은집의 어린동생들을 들여다 볼뿐 하다못해 800평이 넘는 진장만디 밭 두 도가리에 엎드려 호미로 땅을 쪼아 씨를 뿌리고 풀을 매고 채소를 거두어들이는 어머니 명촌댁을 따라다니는 법이 없어 날마다 욕을 얻어먹지만 도무지 애가 다는 법이 없었다. 그 복잡한 옹기 독 속에서도 혼자 뻗대고 누워서 크는 콩나물이 다 있다고, 억지로 편해도 편하면 제일이라고 명촌댁이 은근히 제 딸 갑찬이에 조카 동찬이, 맏동서 상남댁까지 도매금으로 욕을 해도 서촌댁은 애써 못 들은 척하는 눈치였다.

어디 억지로 편한 사람이 그 뿐이던가, 죽은 시숙 선출씨며 집을 나간 정찬이에 아직 어리지만 역시 게으르고 삐딱한 게 심상찮은 종찬이며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남편인 아이들의 할아버지 서촌가손 복성씨를 비롯해 서촌댁 자신과 얽힌 그의 태반이 아무 답답한 일도 없이 대는 대로 얹혀사는 그런 사람들이니까 말이었다. 기출씨도 이제 하도 이골이 나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까짓 딸자식 하나, 되는 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시집이라도 보내버리면 다 제 주어진 팔자대로 아들딸 낳고 살기 마련일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짧으면 하루가 길다고 자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아는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여기저기 불쑥불쑥 잘도 나서고 끼어들기 잘 하던 둘째딸 순찬이는 동생들을 챙기거나 무얼 나눠먹거나 하다 못해 아비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데 만사가 부지런하고 알뜰하며 경우가 발랐다. 그것도 어미의 부엌일이나 밭일보다는 꼭 제 아비를 따라다니며 논일을 도우니 기출씨로서는 좀 멋쩍은 감은 있어도 아이가 똑똑하고 붙임성이 좋아 말동무가 되고 목마른 아비의 막걸리 새참도 잘 챙겨 나름 유일하게 자식 키우는 재미를 보는 셈이었다. 그 순찬이가 제 외삼촌이 도지를 받아간 이듬해, 제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진장골짝논의 맨 꼭대기에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닌 펑퍼짐한 묵밭을 기어이 논으로 띠지자고 고집을 부렸다. 허허 웃으며

“그래, 크기 바쁜 것도 없으니 올봄에 니캉내캉 논을 띠져서 모를 심어 나락이 나면 곡숙도 니 몫으로 하고 논도가리도 니가 시집갈 때 니 모가치로 주꾸마.”

그렇게 기출씨가 약속하고 둘이 봄내 씨름을 해서 서른 평이 넘는 논배미 두개가 생기고 그 아래쪽의 논과 논 사이로 제법 넓은 수로가 있었는데 순찬이의 고집으로 그것까지 고치고 넓혀서 모를 심으니 졸지에 아홉 도가리의 진장골짝논이 무려 열두 도가리에 일흔 평 가까이나 늘었다. 비록 첫해를 빼고는 아직까지 제대로 곡식을 먹은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또 하나의 장한 놈은 큰집의 셋째조카 상찬인데 날 때부터 소리 소문 없이 고분고분 착하던 그 아이는 제 아비가 죽던 아홉 살부터 어느 새 철이 들어 늙은 할머니와 변통성이 없는 어머니와 다리 아픈 형이 있는 힘든 집안형편을 알아차리고 날마다 삼촌 기출씨를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도왔다. 또 두 살 아래 사촌동생 순찬이와도 각별하며 아우 종찬이와 유복녀 귀찬이를 챙기는데도 열심이었다. 제 삼촌이 하는 것을 따라 삽으로 땅을 파고 낫으로 풀을 베고 나무를 하고 도끼나 괭이로 죽은 나무뿌리 까둥구리를 캐는 것을 배우며 온 동네에 착하고 부지런하다고 입에 오르내리더니 이내 그 게으른 선출씨에게 어째서 저런 부지런한 아들이 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소문이 났다.

그 상찬이는 열세 살이 되던 지난해에 들내의 대농가에 꼴머슴으로 들어가 새경을 한 섬 반이나 받아왔다. 주인이 만족한 표정이었으니 올해는 아마도 두 섬은 받아올 테니 집안 식구가 먹고 지내기에도 편안하겠지만 그중 한 섬 정도는 따로 장리를 놓아 나중에 제가 살아갈 밑천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기출씨가 생각하고 있었다.

ⓒ서상균

땅강아지나 두더지처럼 날마다 땅이나 파는 농사꾼들이 해방이 되어봤자 시래기죽에다 콩기름을 짠 찌끼 대두박(大豆粕)이나 먹으며 여전히 입에 풀칠하기도 비해 언양바닥에 유독 신명이 난 사람이 있었으니 작은님이 신랑 조 서방이었다.

그 사이 큰딸 분필이와 둘째딸 분옥이를 시집보내면서 점잖은 장인노릇을 하느라고 한동안 노름도 끊고 다시 먹을 갈고 붓글씨도 쓰고 책을 읽으며 선비흉내를 내면서 언양향교를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주색잡기로 패가망신한 노름쟁이를 반겨줄 리가 없어 얼마 못 가서 스스로 물러섰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쌍 나팔 전축과 라디오를 사 종일 온 집안과 골목까지 창가소리로 가득 채워 사람팔자 별 거 아니라고 그저 돈 많고 명 짧은 장인어른만 있으면 된다고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다.

하여 언양바닥에서 맨 먼저 해방의 소식, 즉 천황의 항복선언을 들은 그는 저자거리와 동네를 돌아다니며 해방이 되었다고 소리치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17일 장날부터 궁근정과 삽재의 집안사람과 알음알음이 있는 사람, 심지어는 소호와 동골의 노름판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모조리 국밥집으로 데려가 국밥과 막걸리를 대접하고 이제 삼천만동포가 고대하던 광복을 맞은 만큼 우리 다 같이 손잡고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고 부강한 새 나라를 만들어나가야 된다고 방금이라도 수많은 민중을 이끌고 가까운 주재소는 물론 면사무소나 경찰서에다 군청을 휩쓸고 서울에라도 진군할 듯 역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소문난 노름쟁이의 난데없는 변신과 애국자연 하는 모습에 무슨 감동을 받기보다는 그냥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무심한 듯 이야기를 듣다 국밥이나 먹고 막걸리나 마시는 것 자체를 즐겼다. 남들은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귀신이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든 말든 그거야 아무 일 하지 않고 처갓집 집세와 땅세를 받아서 손끝하나 알랑하지 않고 사는 팔자 좋은 사람의 이야기일 뿐 자신들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다 헤어질 때 잘 먹었다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신학문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나름 뼈대 있는 종갓집종손으로 어릴 적 서당에 다니며 사서삼경에 통달을 못 하였을망정 동몽선습에 소학과 대학, 통감을 읽어 웬만한 고사성어(故事成語)나 당시(唐詩)정도는 줄줄이 읊을 수 있는 데다 라디오로 들은 세상물정을 남보다 빨리 전파하니 좁은 언양바닥에서는 당당한 선비에다 선구자요, 지도자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전하는 소식과 자신이 베푸는 음식에 사람들이 정말 감복하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니 자신이야말로 당당한 덩치와 멀쩡한 인물에 너른 집안의 종가종손이라는 여러 조건이 진정 이 고장을 대표할 만할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부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어 연합군과 미군의 서울입성, 소련군의 평양입성과 38선의 남북분단과 유엔신탁통치워원회에의 친탁과 반탁에 대하여, 몽양 여운형선생과 서북청년회, 하와이의 이승만 대통령과 중경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의 귀국소식을 저자에 퍼다 날랐고 언젠가 통일정부가 일본에 빌붙어 작위를 받고 고관을 지내고 축재를 한 친일매국노들에게 엄벌을 안길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양심적이고 지조 높고 참신한 초야의 선비들이 새 조국을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공언했다. 말인즉 그럴 듯했지만 알고 보면 노름쟁이인 그 자신이 바로 그 참신한 초야의 선비인양 호도하는 이야기였다.

글자 하나 숨소리 한 번 안 틀리게 날마다 반복하는 이야기인지라 하루는 나름 자신도 꽤 출중한 선비 축에 든다고 생각하는 같은 상북면 출신으로 전부터 어느 정도 조 서방을 아는 양등에 사는 한 사내가 아니 그런 큰 인물인 당신이 어째서 이적지 그렇게 아무 일 하는 것 없이 그 많은 부모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하다 못해 지금에는 처갓집 재산을 야금야금 까먹는 것이냐고 놀렸다.

그러자 좌중에 둘러앉은 열 명도 넘는 사람, 그러니까 장날은 물론 무심 날까지 늘 조 서방을 따라다니며 술과 밥을 축내고 한 번씩 ‘옳습니다, 지당하십니다!’ 와 함께 박수를 보내는 조무래기들을 의식한 그가 둘러댄 말이 그야말로 청산유수, 뚝배기보다 장맛이었다.

“아니, 이 양반아! 당신 같은 뱁새가 황새의 마음을 어찌 알랴, 형편도 안 되면서 그저 막연히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고 만다는 속담도 모르느냐, 무릇 이 세상의 모든 영웅들은 저 깊은 호수나 강바닥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어 승천을 하듯 모두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 80년 긴 세월 동안 미끼 없는 빈 낚시로 세월을 낚다 마침내 주의 문왕을 만나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태공망 여상이나 촉왕 유비의 삼고초려가 있기까지 초야에 드러누운 와룡선생 제갈공명이며 봉추선생을 모르느냐, 내 비록 한 때 조국을 빼앗긴 망국의 아픔을 울분으로 지새우는 우국지사로서 때를 기다리느라 한 때 시중 잡배와 어울려 노름판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 망국민의 아픔과 밑바닥의 서민의 마음과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늠하려는 깊은 뜻임을 왜 모르느냐"면서 반박을 해댄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그렇게 열변을 토하면서 구렁이알 같은 작은님이의 돈을 뿌리고 다녀도 그에게는 어떤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으니 그 첫째 원인은 그가 이미 소문난 도박전과자로서 아무리 공자맹자 같은 소리를 떠들어대도 신용이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여남은 명 그를 주종하는 무리 역시 올바른 집안이나 내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무위도식의 왈패나 노름쟁이, 게으른 농부나 머슴 따위로 어떤 정치적 식견이나 야망보다는 그저 조서방의 국밥과 탁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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