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3)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장 열두 식구

이득수 승인 2022.02.21 14:09 | 최종 수정 2022.02.23 10:12 의견 0
ⓒ서상균

1. 열두 식구 명촌댁 ①

“아부지, 인자 진짜 이기 우리 논 맞나?”

“그래. 맞다.”

일곱 살짜리 딸 순찬이가 아버지의 대답에 잔뜩 신이 났다.

“아이구 좋아라. 그라문 우리가 부자 된 기가? 인자 우리는 무시밥, 씨락밥 안 묵어도 되나?”

“그래. 그렇겠지.”

노란 햇살이 진장골짝과 남부마을공동묘지가 있는 산비탈에 포근하게 내려쬐이고 있었지만 아직도 바람은 차가웠다. 기출씨는 진장만디 편편한 밭이 끝나고 밤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골짜기가 시작되는 지점의 질퍽한 풀밭을 아까부터 이리 저리 파헤치고 있었다. 올해 첨 부치게 된 진장골짝 서마지기를 적실 물줄기를 찾아 샘을 팔 심산이었다.

“치이, 내사 마 씨락밥, 무시밥도 맛만 좋더라. 따실 때 참기름하고 깨소금 넣은 지렁장에 비비 묵으면 맛만 좋더라.”

뜬금없는 언니 갑찬이의 말에

“아이구, 이 천치 같은 새이야! 그까짓 무시밥, 시락밥이 아닌 흰쌀밥을 비비 묵으면 더 맛있다. 마 입에 살살 녹는다.”

순찬이는 저보다 세 살이나 많은 언니 갑찬이가 늘 못 마땅했다. 아무 욕심도 없고 무얼 배우려고도 않고 아깝거나 답답한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순찬이는 새로 생긴 논이 좋아서 이리 저리 논두렁을 돌아다니며 신이 났는데 갑찬이는 솔가지 하나를 꺾어들고는 그냥 길섶에 하염없이 서있는 것이었다.

“갑찬아, 순찬아, 이리 와 바라!”

논둑에 앉은 아비 기출이가 두 딸을 부르면서 자잘한 나무줄기를 주워 모아 불을 지폈다.

“너거 배고푸제? 내가 금방 까재 꿉어주꾸마. 우선 이거나 무 봐라.”

개암처럼 동글납작하게 생긴 갈색 줄무늬의 올밤시(마름의 덩이뿌리)를 건네주었다. 질퍽한 논두렁아래를 파다 나온 마름모꼴의 잎을 가진 물풀, 마름뿌리를 캐낸 것이었다. 두 아이가 열심히 갈색의 껍질을 이빨로 까고 하얀 속살을 먹기 시작하는데 금방 가재가 빨갛게 익어 나뭇가지로 이리 저리 뒤집던 기출씨가 그 중 실한 놈 두 마리를 골라 꽁지를 떼어내고 한 마리씩을 주었다.

“아부지, 전부 몇 마리고?”

“몰라. 여남 마리 될 끼다.”

아무 생각 없이 가재를 먹는 언니 갑찬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던 순찬이가 남은 가재 중에서 여섯 마리를 제쳐놓고 나머지를 손수건에 싸기 시작했다.

“순찬아, 말라꼬 그라노?”

기출이가 묻자

“집에 가주가서 할매하고 엄마, 도분이하고 일찬이 줄 끼다.”

일곱 살짜리가 열 살짜리보다 생각이 깊었다. 그 사이 기출이는 딸만 내리 넷을 낳았는데 기출이가 스물아홉, 기출이처 명촌댁이가 열일곱에 낳은 큰 딸은 이름도 짓기 전인 3칠이 되기 전에 죽었다. 산모가 어려서인지 날 때부터 부실해 젖을 잘 빨지 못 하더니 할머니 서촌댁이 온갖 정성을 들여도 제대로 울음소리 한 번 못 지르고 골골대다가 그냥 죽어버렸다.

이어 연년생으로 들어선 것이 또 딸이었는데 요번에는 젖은 잘 빠는데 역시 잘 울지도 않고 그저 조용하게 먹고 자고, 자고 먹는 순둥이였는데 무난히 돌도 넘기고 홍진도 잘 치러낸 것이 큰딸 갑찬이였다.

그러고서 한동안 태기가 없더니 3년 만에 배가 불러 둘째딸 순찬이를 낳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이 아이는 울음소리도 크고 손발도 늘 꼼지락거리고 뭐라고 옹알이도 일찍 시작하고 걸음이나 말도 빠르게 배우고 잠시라도 가만있지를 못 하고 설쳐대더니 세상만사가 다 궁금하고 온갖 일에 다 끼어드는 똑순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 배가 불렀는데 설마 이번에야 아들이겠지, 비록 내색은 않아도 은근하게 바라기가 한 마음인 서촌댁과 기출이내외의 기대를 저버리고 또 딸이었다. 아비 기출이는 분통이 터져 이 세상의 분(憤)이라는 분은 모조리 터진다는 도분(都憤)이로 이름을 지었다. 내가 언양현 농사꾼 등골을 모조리 뺀 읍내 조호방도 아닌데 도대체 무얼 잘못 했다고 삼신할미가 가뜩이나 늦장가를 든 자신에게 줄줄이 딸만 넷을 점지(點指)해주는지 원망하다 그는 흠칫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아이로 의심받던 사내아이를 사산하고 죽은 끝님이와 목포 선창가에 버리고 떠나온 신안 시루섬 염막집의 딸 염분이가 생각났던 것이었다. 자신이 지은 죄가 그만하니 넷 아니라 일곱, 아니 열두 명의 딸을 낳아 키우고 시집보내면서 울고불고 그 죄밑을 닦아도 모자랄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냥 순하기만 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큰딸 갑찬이와 똑 부러진 둘째 순찬이와 달리 셋째 도분이는 어디서 그런 아이가 나타났는지 살성이 눈처럼 희고 깨끗한 데다 동그란 눈에 쌍꺼풀이 지고 방글방글 웃으면 애간장을 녹일 만큼 예쁘고도 귀여웠다.

큰 아들 선출씨에게서 다섯, 작은 아들 기출씨에게서 넷, 무려 아홉 명의 손주를 안아본 서촌댁도 이번에야말로 정말 기분이 좋은지 딸이라서 섭섭하다는 내색도 없이 일흔이 다된 노구(老軀), 그것도 십리나 되어 보이는 긴 허리에 들쳐 업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리 꼬무래기 예쁜 눈 좀 봐라. 세상에나! 고래장이 될 나이를 살면서 나는 요렇게 새첩은 얼라는 첨 본다.”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귀여운 놈은 또 애교가 많아서 아비기출이에게도 ‘아빠, 아빠!’를 연발하며 사랑을 독차지했다. 말은 않았지만 서촌댁이나 기출이 자신도 어린 시절 온 동네사람들이 기출이를 새첩다고 어르며 이 녀석의 눈은 바라보기만 해도 애민 사람의 애간장을 녹여 나중에 여자들 눈물깨나 빼겠다던 일을 떠올렸다. 바로 그 눈빛을 닮아있었던 것이었다.

그 다섯 살짜리 도분이는 서촌댁과 함께 이제 두 살이 되는 사내아이 일찬이를 보고 있을 것이었다. 기출이가 나이 서른 여덟이나 되어 얻은 아들 일찬이 역시 아시누나 도분이를 닮았는지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또록또록해서 서촌댁과 기출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동네 사람들아, 우리 손자 좀 보소. 세상에 우리 기출이가 아들을 다 낳았다 아잉교?”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다 이미 장남 대득이에게서 아들만 다섯을, 차남 상득이에게 또 하나를 얻은 오라비 곰쇠에게 그렇게도 좋은가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외롭고 서럽고 안타까운 세월을 보낸 기출씨가 제 집을 짓고 장가를 들어 1남 3녀를 키우며 산다는 것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식구가 늘어나면서 우선은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장가를 들고 분가를 한 지가 십년이 넘었으면서도 여전히 큰댁 선출이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니 거의 먹여살려야 하는 그 기막힌 머슴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기출씨 자신은 아이가 넷이나 되기는 해도 아직 어려서 양식이 모자랄 정도도 아니고 자신의 농사 외에도 남의 집 논밭을 갈거나 김을 매고 타작을 하여 받아오는 품삯이나 곡식도 적지 않았다. 또 그렇게 생각이 깊거나 맵시나 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나이 어린 아내 명촌댁이 아이도 쑥쑥 잘 낳을 뿐더러 하늘에 해만 뜨면 집에서 쉬는 법도 없이 뒤란의 채전을 가꾸는 것은 물론 진장만디의 800평이 넘는 밭 두 뙈기의 콩, 고추, 참깨, 들깨, 감자, 고구마에 보리와 밀농사를 무던하게 잘 지어 밥이며 반찬이며 장에 가서 살 일도 거의 없이 자급자족을 하는 것이었다.

큰집 선출씨네가 먹고사는 것이 넉넉잖기도 하지만 이젠 동찬이, 정찬이, 복찬이 등 아이들이 너무 커서 처녀총각 꼴이 나자 마땅히 거처할 곳도 어중간한 서촌댁은 어린아이들을 돌본다고 작은 집에 드나들다 자고 가기를 거듭하다 이젠 아예 기출씨집에서 사는 폭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려 우선 돌볼 일도 있었지만 식구들이 부지런해 집에 더운 김이 돌고 삼시세끼 걱정 없어 마음이 놓이니 장도 달고 밥도 달고 잠자리도 편했다. 기출씨나 명촌댁도 단 한 번 타박하는 일 없이 매일 대하는 것이 인정이 있고 공손했다.

ⓒ서상균

그런데 문제는 큰집 선출씨네였다. 총각시절의 기출씨가 새뜰에서 머슴을 살아서 받은 나락두지를 야금야금 꺼내먹어도 하는 수 없이 탕감해주고 장가를 들기 전에는 어머니 서촌댁의 눈물어린 하소연을 외면하지 못 해 앞으로 세세손손 종손들이 붙여먹는 문중 답 너마지기를 마련해주었건만 어찌 된 셈인지 선출씨네의 살림은 단 한 해, 단 하루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이 정월대보름만 지나면 양식이 달랑거리고 아직 보리 풋바심도 안 되는 보릿고개가 되면 묵느니 굶느니 야단이 나서 늙은 서촌댁의 애간장을 끊어 기어기 기출씨네의 쌀가마니가 축이 나고 마는 것이었다.

태생이 약하고 게으른 선출씨가 집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땔나무가 없어도 그저 구들만 지고 누운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벌써 시집온 지 20년이 넘는 선출씨댁 상남댁은 사람됨이 겉으로 보면 멀쩡하고 달리 흠을 잡을 구석도 없이 그저 수더분하고 말이 없이 아이도 잘 낳고 시어머니 서촌댁과 더불어 그럭저럭 잘 키워내기는 해도 세상에 바쁜 것도 아쉬운 것도 없는 천하태평이었다.

그래도 명색 5남매의 어미이자 지아비와 시모가 있는 안주인으로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은 그런 성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천하태평이더라도 식구들이 솥을 달아매고 곱다시 굶고 들어앉은 판에야 어쩔 수가 있으랴, 양식이 달랑거리거나 한두 끼 끼니를 거르면 말수가 없는 상남댁은 허겁지겁 작은 집 기출이네로 와서 시어머니 서촌댁이나 손아래동서 명촌댁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아무소리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눈치가 훤한 서촌댁은 저것들이 마침내 또 밥을 굶는구나, 온 식구가 저렇게 굶을 판이면 가장인 선출씨가 무슨 일을 하던지 언양장터에 장사를 하든지 아니면 자식들 안 굶기려고 선출씨댁이라도 좀 움직이련만 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아이들 만드는 데만 손발이 척척 맞는 그 게으른 내외는 도무지 꼼짝도 않고 어떻게 되겠지, 되겠지, 밥걱정이 없는 작은 집만 쳐다보는 눈치였다.

어미아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남 동찬이가 벌써 갓 스물에 차남 정찬이도 열여덟이나 되어 다른 사람이며 스스로 돈을 벌거나 농사를 지어 제 앞가림을 하고 장가라도 들 나이건만 나이만큼 밥이나 밥그릇의 고봉이나 올라갔지 도무지 발전성이 없었다.

우선 장남 동찬이는 어릴 적 한겨울에 구시골의 대밭에 아직 돋아나지도 않은 죽순을 캐먹는다고 들어가서는 뾰족한 대나무 끌띠기(그루터기)에 발바닥을 찔린 것이 제 때 치료가 되지 않고 점점 썩어 들어가 나중에는 복숭아뼈와 발목을 잘 못 움직이고 마침내 오른 쪽 무릎이 뒤틀려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병신이 되어 종일 마른버짐이 가득한 얼굴에 곧 죽을 표정을 하고는 마루와 마당을 왔다리갔다리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한술 더 뜨는 것이 열여덟의 차남 정찬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이 아이는 자라면 자랄수록 제 아비 선출씨를 닮아 키가 작고 이마가 반질반질하고 손이 부드러운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무지 일할 생각을 않고 게을러빠진 것마저 영판 제 아비를 빼닮은 것이었다. 제 아비 선출씨가 안방에 드러누워 가끔 흠흠, 헛기침을 하면 종일 뒷방에 진을 친 정찬이는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나와 뒷집 석암선생이나 그 옆의 최씨네 기와집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슬며시 방으로 들어가 다시 구들장을 지고 눕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닮기도 저렇게 닮고 게으르기도 저렇게 게으를까? 예전 서촌댁의 아버지 강포수가 너는 성격이 유하고 손이 부드러운 남자를 만나 살라는 당부를 한 이후로 자신은 그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던 갑오년의 한겨울에 온 세상이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 적막한 봉당골의 움막집에서 복성이를 만난 뒤 선출이를 낳고 선출이가 다시 동찬이, 정찬이를 낳고 그렇게 성질이 유하고 손이 부드러운, 아니 사실은 한없이 게으르고 제 앞가림을 못 하는 3대가 이어져가는 것이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옆에서 지켜보는 기출씨었다. 아무리 형제일신이라 하여 한 몸처럼 서로 아끼며 먹고 굶기를 같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하여도 그 어린 시절에 매 맞고 받은 돈을 들고 나가 탕진한 것도 내색을 않았고 천지강산을 떠돌며 벌어온 돈을 보태 형을 장가들이고 머슴살이로 벌어온 곡심을 여남은 섬이나 축을 내도 어머니 서촌댁이 먹은 양으로 생각하고 참았다. 그렇게 말만 않을 뿐이지 자신이 장가들 때는 장래를 걱정해서 장손용의 제사답까지 사주었지만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는커녕 봄만 되면 양식이 떨어져 작은 집을 기웃거리는 것이 기가 막히기는 어머니 서촌댁과 다를 리가 없었다. 형님과 형수가 조카들과 함께 굶는데 밥을 먹는 동생이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이야 어쩌겠냐만 도무지 아무도 일을 않고 해마다 양식을 가져가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으며 자신이 도대체 무슨 죄가 많아 이런 곤경에 처하는지 늘 원망스러운 것이었다.

거기가 불난데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봄이 되어도 선출이네는 아무도 논밭을 갈고 곡식을 심을 염을 않았다. 먼빛으로 묵어가는 논을 바라보는 서촌댁의 눈길이 안쓰러워 할 수 없이 보다 못 한 기출씨가 논을 갈아 아내 명촌댁과 모를 심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어 곡식만 갖다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곡수가 제대로 나오기가 어려웠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비록 농사꾼이더라도 부지런히 한해 농사를 지으면 얼만가 곡식이 남고 그걸 몇 해 모아서 다시 논밭을 늘려가는 재미가 있어야하는 법이 아닌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기출씨 자신은 충분히 그럴 형편이 되는 데도 해마다 큰집의 양식을 당해주느라고 일 년 내내 고생한 곡식이 쥐가 뚫은 볏섬처럼 옆구리로 줄줄 새고 보니 기출이도 세상사는 낙이 없었다. 그렇게 벌써 기출이 나이 마흔이 되고 큰딸 갑찬이가 열 살이 된 것이었다.

 

방에 들어오지도 못 하고 왔다갔다 눈만 껌벅거리는 손위동서를 보기가 안타까운지 명촌댁이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다며 누룽지 한 덩이를 들고 나와 상남댁의 손에 쥐어주었다. 꿀꺽 침을 삼키면서도 상남댁은 누룽지를 조그만 손수건에 싸고 있었다. 이제 여덟 살이 된 막내 종찬이를 줄 모양이었는데 그 와중에서도 또 배가 남산만큼 불러있었다.

“야야, 우짜겠노? 우짜겠노?”

아이 둘을 데리고 기출씨가 들어오자 서촌댁이 차마 바로 쳐다보지 못 하고 울먹이는 소리를 내며 상남댁을 쳐다보았다. 구운 가재를 들고 온 순찬이가 도분이를 불러 가재를 꺼내보이자 아직 걷지 못 하는 일찬이도 기어와 엉겨붙었다.

가재도 외면하고 “아빠, 아빠!”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기는 도분이를 내려놓으면서

“어무이, 내가 언제 솥 달아맨 큰 집에 양식 주는 기 아깝다 카덩교? 한 분이라도, 단 한 분이라도 제 철에 논 갈고 모 심고 나락 비면 내가 이런 소리 하겠능교? 다섯 섬도 더 묵을 논도 깨알지긴다꼬 석 섬도 못 묵는 집에 와 내가 해마다 곡식 섬을 바친단 말잉교?”

반복되는 연례행사에 기출씨가 단단히 화가 났다.

“내가 니 말을 와 모리겠노? 그래도 지가 놓은 지 새끼 속을 모르는 기 사람 사는 이치다. 나는 내 속으로 나온 니 새이가 그렇게 깨알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니 아부지를 닮기는 했다마는. 그리고 선출이아들 정찬이놈은 왜 또 그런지 말이야...”

말끝을 흐리던 서촌댁이 한참만에

“야야, 우짜겠노? 요새 니 새이는 해소병도 심하다 카던데. 우짜겠노? 아픈 사람이 굶어서 우짜겠노?”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있었다.

“알았심더.”

작은 방에 들어가 서 말쯤이 들어있는 쌀자루를 매고 나온 기출씨가

“당신도 보리쌀하고 좁쌀이라도 좀 챙기지.”

아내 명촌댁을 시키고 한참 만에 두 동서가 올망졸망한 자루들을 이고 들고 나서자

“가자!”

삽짝 문을 나섰다. 앞새메를 돌아 큰집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측간에 간다고 마당을 건너오던 정찬이가

“잔 아부징교?”

인사를 하자 반들반들한 이마를 바라보다 그만 심통이 터졌다. 쿵, 소리나게 마루에 쌀자루를 내려놓으면서

“혬요, 이기 진짜 마지막임더. 묵든지 굶든지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하이소!”

팽, 코를 풀어 마당에 팽개치고는 재빨리 삽짝 문을 나가버렸다.

 

장가를 들고 식구가 늘면서 넉넉잖은 농사로 해마다 늘어나는 아이들을 건사한다고 날마다 붙어사는 어머니 서촌댁을 슬그머니 작은집에 밀어 넣고도 봄만 되면 양식이 떨어져 어떻게든 쌀과 곡식을 빌려가고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는 함흥차사나 강원도포수처럼 단 한 번도 돌려주는 법이 없는 형 선출씨네 식구까지 먹여 살리느라 도무지 허리를 펼 수가 없어 다시 저잣거리에 나왔을 때였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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