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5)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11장 이별감댁 패가 전말 ①기출이 증조부 이 별감

이득수 승인 2022.02.10 14:31 | 최종 수정 2022.02.15 11:55 의견 0

14. 이별감댁 패가 전말 ①기출이 증조부 이 별감

이튿날 이었다. 기출이가 꿀 한 단지와 생 대구 한 마리를 마루에 놓고 

“선생님, 계시능교? 지 기출입니더.”

인기척을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닫이문을 열며 

“우리 기출이, 아니 명촌이가 왔구나. 그래 신접살림 재미는 좀 어떤가?”

온화한 표정으로 빙긋 웃으면서

“저 비싼 물건들은 다 뭐꼬? 새살림에 쪼들릴 낀데 자네 모친이나 봉양하지.”
“아입니더. 약소함더.”

그렇게 수인사를 하고 기출이가 자리에 앉자 석암선생은 화롯불을 당겨 장죽에 불을 붙이더니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없이 뻐끔뻐끔 연기만 내뿜으며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갈피를 잡고 있는 모양으로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고 기다린 것 같았다. 늘 자리보전을 하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이부자리를 걷고 반듯이 정좌했는데 바지저고리와 조끼를 단정히 차려입고 상투도 아침에 새로 틀어 올린 차림새였다.

“그렇지. 반동선생, 그러니까 니 증조부 되는 이도 영판 자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갸름하며 왼손잡이였었지. 악질현감의 폭압으로 누명을 쓰고 태형(笞刑)을 맞아 장독으로 세상을 버릴 때가 마흔 살이 조금 넘었는데 서른이 다 된 지금의 자네와 거의 비슷하게 낯빛이 곱고 눈이 부리부리했지. 

자네는 내가 왜 만 날 온갖 간섭과 잔소리를 하며 글도 배우지마라, 뭘 아는 척 하거나 내띠서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지 궁금했겠지. 사실은 반동선생님이 내게 문리를 틔어준 스승님이었기 때문이야.

내가 좁고 가난한 버든바닥에서 옳은 스승도 없이 독학 비슷하게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과 소학을 배우면서 어찌어찌 인근마을과 언양향교에 평지리, 그러니까 그 때는 버든마실이  평리가 아닌 평지리로 불렸는데 그 평지리에 제법 총기 있는 소년이 나왔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지. 그래서 우리 선친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삼동 둔터마을의 자택에서 학동 서넛을 가르치는 반동선생님을 찾아내고 열세 살의 나를 의탁시켰는데 그 때 스승님의 연세가 아마 마흔하나 아니면 둘이었지.

젊은 나이에 드물게 학문이 깊고 성격이 온화한 반동선생은 인근 유림의 촉망을 받아 그 나이에도 하루하루 땅을 파며 살아가는 무지렁이 민초들의 살림살이와 걱정거리를 살펴 위정자인 현감에게 알리고 현감의 처사가 온당한지 아닌지를 따져 그 시정을 요구하는 당시의 향청(鄕廳)에서 수장인 좌수(座首)어른 바로 밑의 별감(別監)이 되어있었지. 언양고을이 생기고 향청이 설립된 이후 사십 이전에 별감이 된 경우는 아마 자네 증조부가 처음이었을 것이야. 아무튼 학문이 깊고 도량이 넓으며 심지가 굳은 참된 선비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였고 상관인 좌수의 유고가 있거나 은퇴하면 거의 자동으로 좌수의 자리에 오르는 대단한 지위였지.”

 

방금 눈앞에 스승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는지 한참동안 말을 끊고 천장에 담배연기를 뿜어 올리던 석암선생은

“참, 자네도 편하게 앉게. 이야기가 꽤 길어질 테니까.”

굳이 양반다리를 풀게 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선 자네의 집안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해야겠지. 당사자인 자네에게 타성바지인 내가 집안내력을 운운한다는 것이 우스운 것 같지만 지금 자네 형편으로 그런 걸 알거나 밝히려고 할 처지가 아닌지라 나라도 이야기를 해주기는 해야지. 내가 알기로 자네의 이씨 가문은 옛 신라시절부터 서라벌에 터를 잡고 살던 뿌리 깊은 집안으로 고려 때는 영의정격인 문하시중이 나오고 조선조에도 한성판윤이 나왔던 명문이었지. 

경주, 봉계, 구량, 반곡같이 주로 언양에서 경주사이에 세거하던 이씨네 집안은 집안이 점차 번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그중 한 갈래인 반동선생의 할아버지 되는 분이 둔터로 옮겨와 산지도 한 3,4대, 거의 백년가까이 되었다고 하네. 아무튼 삼동골짝의 토박이인 우리 신씨, 또 담양우씨, 광주이씨 등과 어울려 살면서 대대로 학문이 깊은 좋은 집안으로 불렸고 그 중에서도 반동선생이 군계일학의 선비로서 마침내 학동들을 가르칠 경지에 이르게 되었지.

 

이제 자네 증조부 반동선생의 아호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겠군. 자네 할아버지는 학동들을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거나 무서운 분이 아니고 늘 온화한 얼굴로 만사를 차근차근 예를 들어 설명하고 고사는 반드시 그 출전(出典)을 밝혀 설명을 해주니 나처럼 독학 비슷하게 공부를 하던 사람은 반동선생님을 만나면서 그믐밤에 혼자 들길을 걷다 마침내 환한 백일하의 탄탄대로를 걷는 기분이었지. 내가 그 나이까지 7, 8년 글을 읽으며 만난 대여섯 분의 선생님과는 판이하게 달랐지. 한 글자, 한 글자의 본래의 형상과 글자체를 얼마나 소상하게 붓으로 그려 보이는지, 또 소학에 나오는 제 몸과 마음을 깨끗이 가꾸는 법, 부모를 모시는 법을, 빗질을 하고 상투를 틀고 물을 떠다 바치는 자세 하나하나까지 직접 동작으로 시범을 보이는지라 하루하루의 배움이 당일로 뇌리에 박히게 되었지.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지. 유두(流頭)가 가까운 한여름철로 방금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빠진 학동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가셨지. 그리고는 학동들에게 소나무와 참나무, 잣나무, 오동나무 등의 각종 나뭇가지와 민들레와 풀씨꽃 등의 풀잎들을 따오게 하고는 그 이름들을 물었는데 아이들은 겨우 소나무, 참나무, 민들레 정도만 이름을 대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 이름을 글자로 써보라고 하니까 아이하나가 솔 송(松)자를 써보이고는 그만이었지.

이어 반동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에 이름 없는 물건이 없으며 학문을 한다는 것도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세상만사 눈에 보이는 모든 형체의 이름과 그 본질을 아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면서 참나무는 상수리 역(櫟)자를, 잣나무는 잣 백(栢)자를 써 보이고 이어 민들레는 포공영(包公英)으로 풀씨꽃은 자운영(紫雲英)으로 또 음습한 습지에 사는 돼지풀은 료(蓼)자로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물봉선은 수봉선(水鳳仙)이라고 써보였지. 

또 풀밭에 사는 여러 벌레들을 잡아오게 하고 연까시라고 불리는 사마귀는 당랑(螳螂), 또 하늘은 나는 잠자리는 청령(蜻蛉), 나비는 호접(胡蝶)으로, 메뚜기는 누리 황(蝗)자를 써 보이고 방금 포르르 날아가는 참새를 보고는 작(雀)자를, 멀리 건너편 논배미위로 날아가는 커다란 황새를 보고는 학(鶴), 또 작고 하얀 해오라기를 보고는 로(鷺)자를 써보였지. 그러시면서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풀이나 나무나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는 없다. 그것은 단지 당사자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우리의 선대조상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은 그 물질과 형상들이 곱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먹으면 죽는지, 아닌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또 단지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즉 공맹(孔孟)의 유학(儒學)뿐 아니라 춘추시대의 제자백가인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老子)의 도덕경과 무위자연사상, 또 묵자의 겸애와 수성책(守成策)에 공손룡, 혜시의 명가(名家), 손자, 오자의 병가(兵家), 소진장의(蘇秦張儀)의 종횡가(縱橫家), 신불해, 순자, 상앙, 한비자, 이사로 이어지는 법가(法家)에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

거기다 고사(故事)에도 얼마나 밝았는지 철석같은 우정을 상징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일개 기생과의 약속을 지키려 성난 물결이 밀려오는 다리 밑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실없는 믿음을 뜻하는 미생지신(尾生之信), 전장 터에서 물을 건너거나 밥을 굶은 취약한 상태의 적을 치면 의롭지 않다고 늘 망설이다 마침내 적에게 패한 어이없는 관용을 뜻하는 송양지인(宋襄之仁)까지 손에 잡힐 듯 소상히 설명해주고 화씨지벽(華氏之璧)이 나오면 단지 그 대단한 구슬과 화씨의 신념과 고집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서 파생된 옥에 생긴 작은 흠결인 하자(瑕疵)를 덧붙여 설명하고 걸주(桀紂)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망친 두 폭군을 설명할 땐 말희와 달기라는 두 요부 외에도 엉터리 봉화를 여러 번 올리게 하여 변방의 수비체계가 무너져 마침내 주나라를 망하게 한 주(周)나라 유왕의 총비 포사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설명을 해주셨다네.

또 미천한 신분임에도 심오한 내공을 지닌 두 명의 명재상 즉 상(商)의 탕왕(湯王)을 도운 요리사, 즉 포정(庖丁)출신의 이윤(伊尹)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도운 미끼 없는 낚시의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즉 강태공(姜太公)을 합친 윤상(尹尙)이란 고사를 설명할 때였지. 갑자기 스승의 눈빛이 더 한층 빛이 나면서 아주 들뜬 목소리로 주문왕에게 발탁되기 전에 이수(伊水)의 반계(磻溪)에서 빈 낚시를 드리우고 때를 기다리던 강태공의 전팔십 후팔십(前八十 後八十)의 생애를, 그러니까 자신의 깊은 뜻을 몰라주고 아내마저 집을 나간 외로운 처지의 여상이 나이 팔십이 되도록 때를 기다리다 마침내 주문왕을 만나 중원에서 가장 튼튼하며 교화가 잘 된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일을 소상히 가르쳐 주었다네.”

 

이어 이야기는 그 낚시터인 반계의 반(磻)자가 성리학을 하는 유생과 초야에 묻힌 은일(隱逸)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뜻 깊은 글자인지를 설명하다 

“천하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그 반계의 난정(蘭亭)이란 정자에서 당대의 시인묵객과 시회를 열고 그 경위를 글로 지은 난정기(蘭亨記)가 또 걸출한 명문으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마치 자신이 난정의 시회에라도 참석한 듯 그윽한 눈빛을 지어보였지. 그건 아마도 좁은 언양현의 삼동골짝 둔터에서 별감을 지내며 학동을 가르치지만 웅혼한 포부를 가진 꿈을 자신도 모르게 내비친 것인지도 모르지.”

순간 어린 나이에도 뭔가 퍼뜩 생각이 떠오른 내가

“훈장님. 그럼 스승님의 아호 반동의 반자가 바로 그 반계의 반자입니까?”

묻는 순간 만면에 웃음을 띤 스승께서는 

“하하하!” 

아주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이놈 봐라. 시근이 보통이 아이네. 어림이 짐작이고 서울이 북쪽이란 말이지. 그래 바로 그 반계의 반(磻)자에다 나도 그 태공망여상처럼 언젠가 넓은 세상에 나가 두루 쓰일 날을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젊은이, 그러니까 아이 동(童)자를 붙여 반동(磻童)이라 쓰는 거지.”

하시면서 껄껄 웃으셨지.

ⓒ서상균

마치 자신이 반동선생이라도 된 듯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석암선생이

“참, 내 정신 봐라. 모처럼 스승님회고에 너무 빠져 자네 생각을 못 하고 괜한 문자만 남발했구먼. 자네 너무 어렵지?”

물어왔다.

“아, 예, 예에”

당황한 기출이가 머뭇거리자

“제대로 뜻을 전하자면 하는 수가 없지. 하긴 자네는 매우 영리하니 어쩌면 대충 짐작을 할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그렇지. 나중에 그 반동이라는 훌륭한 아호가 오히려 스승님을 어렵게 만든 일이 발생하고 말았지. 자, 그 이야기는 좀 쉬었다 하세.”

마침 석암선생의 자부 곽남댁이 홍씨와 곶감, 검은 물래 콩으로 만든 강정을 들고 와 석암선생은 홍시를, 기출이는 강정과 곶감을 먹고 다시 마주 앉았다.

“그렇게 반동선생님 밑에서 근 1년을 수학했을까? 내 자신이 생각해도 학문에 상당한 진척이 있는 것 같았고 비로소 천지만물이 펼쳐진 이 세상의 물정과 동서고금 황후장상과 검은 머리 백성이 어울려 사는 인간사의 이치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았어. 같은 또래들의 다른 아이들이 동몽선습이니 소학을 뗀다고 쩔쩔 매는 동안 나는 벌써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넘어 그 유명한 이백과 두보가 나오는 유현하고 처절한 당시(唐詩)를 배울 경지에 이르렀지. 

어느 한가한 오후에 스승께서 운(韻)을 떼면 내가 율(律)을 맞추며 짧은 오언시(五言詩)를 지었는데 스승께서 깜짝 놀라면서  

“허허 그 허허벌판 평지리에서 이런 문장이 나다니. 어서 세월이 좋아져 다시 향시라도 보게 되면 좋으련만. 인재가 나오면 무엇 하나 세상이 어지러운 걸 쯧쯧...”
 하며 장탄식을 하는 것이었지. 그러면서

“때가 아닌 걸 어쩌랴? 영웅마다 다 미인을 만나고 장수마다 다 적토마를 얻은 것은 아니었지. 이 너른 천지에 사내로 태어나 웅지를 품지 않은 자 몇몇이며 시흥에 젖지 않은 자 몇몇이랴?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떨친 왕후장상이나 이백두보 같은 절창을 남긴 시인은 과연 몇몇이나 되던가? 이 좁은 언양현의 삼동바닥, 평지리바닥에 태어난 너나 나나 그냥 웅크린 복룡(伏龍)이 되어 때를 기다릴 수밖에. 비록 저 반계의 태공망처럼 전팔십 후팔십의 때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기다려나 볼 수밖에, 설령 끝내 여의주를 얻지 못한 이시미(蛟龍)처럼 아무것도 이루지를 못 한 깡철이가 되어 어두운 밤하늘을 불태우며 사라지더라도 허허허...” 그러면서 내 손을 꼭 잡고 눈을 들여다보면서

“혁식아, 세상은 다 그런 거란다. 세상이치를 알만 한 사람이 나오면 세상살이가 서글프다는 것만 깨우치게 할 정도로 말이다. 이 좁은 골짝에서 글께나 읽고 깨친다는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하고 하루하루를 허송하고 헛되이 늙어 벌써 할아버지가 되듯이 너도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면 어느 듯 나처럼 될 텐데 나는 내가 겪은 그 기나긴 세월의 앙금과 고민을 니가 또 꼭 같이 겪을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서는구나.   우리 인생이 서글프고 세상이 고르지만은 않다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 일어서는 누구도 궁극적으로 그걸 해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단 하루라도 먹지 않거나 자지 않고는 살수 없는 오욕칠정의 덩어리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 끝이 죽음에 다다르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허무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 허허, 그런데 내가 모처럼 내 학동의 좋은 시(詩), 절창을 보고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이미 증손자를 본 할아버지가 되고나서 내가 늙은 걸까, 아니면 죽음이 가까워서 그러는 것일까? 허허허.
 

그렇게 말씀하시고 맛있게 청주 잔을 비우는데 내가 얼핏 보기에 눈가에 물기가 비치더란 말일세.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나는 스승님을 볼 수가 없었지. 향청에 나간 스승님이 학동을 돌봐야하는 날에도 돌아오시지 않아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는데 향청에 출근한 이별감을, 그러니까 내 스승이자 자네 증조부를 현감이 현청으로 불렀는데 동헌으로 들어선 순간 바로 무슨 죈가를 씌워 형옥(刑獄)에 집어넣고 말았다는 이야기였지.”

어린 나이의 내가 무엇을 알랴마는 설마 우리 선생님이 무슨 불의를 저지르거나 죄를 지을 분이 아니니 분명 곧 잘잘못을 가려 모든 오해를 풀고 돌아오실 줄 알았지만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현청에서는 아무런 기별도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사또 밑의 육방관속이나 향청의 수장인 좌수정도가 그 내막이나 전도를 알 수 있었겠지만 당시의 현감이 부임도 하기 전에 미리 자기가 떠난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울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가렴주구가 심한 악질인데다 당시만 해도 수령방백벼슬아치의 말 한마디면 무지한 백성의 생사여탈이 바로 결딴나는 시절이었지.

지금 생각해도 한 가지 의문이 가는 건 당시 향청의 우두머리였던 우리 집안의 먼 친척격인 일흔에 가까운 신좌수가 누구보다도 우리 반동선생의 올곧은 성미와 반듯한 품행을 아는 만큼 이별감이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두둔이나 발명을 해 구명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이리저리해서 이런 곤경에 처했고 어찌어찌 사단을 풀어보라고 집안사람들에게 알리기라도 했더라면 좋으련만 도무지 아무런 말이 없었어.

나도 그때의 좌수어른의 나이가 된 지금 곰곰 생각해보면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그 포악한 현감에게 자신마저 곤욕을 치를까봐 겁을 낸 소심한 선비기질이 문제였기도 하겠지만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자신은 물론 한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기가 일쑤였던 당시에 자신의 일신은 물론 집안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겠지.
 

아직 반동선생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는 없어도 나와 학동들은 평소 수업이 있던 날에는 꼬박꼬박 둔터의 서당으로 향했지만 석 달, 넉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별도 기미도 없이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지.

언양장날에 괜히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간혹 주막에서 술 취한 사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충 이런 정도였어.

모난 돌이 정을 맞고 우뚝한 나무가 먼저 목수의 도끼에 찍혀나간다고 세상에 사람이 너무 뛰어나게 똑똑하다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한사람이 말하자 그럼 그게 약관의 나이에 벌써 학문이 높고 효성이 깊어 삼동의 증자(曾子)라는 소문이 나 사십이 못 되어 향청의 별감이 된 반동 이별감의 이야기를 말하는 거냐며 받았지.

이어 그들은 그 젊은 이별감이 괜히 그 도둑고양이처럼 사납고 노회한 현감에게 너무 심하게 환곡(還穀)에 덤터기를 씌우고 은결(隱結)을 심하게 적발하여 혹독하게 벌을 주거나 하는 시정(施政)을 바로 하라는 건의를 하다 미움을 받고 도로 향청의 살림을 도맡아 사는 별감이 백성의 양곡을 축냈다는 빌미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게 바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했지.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은 뇌물을 주고 벼슬을 한 현감이 하루빨리 자신이 바친 돈의 본전을 뽑으려고 수탈과 학정을 일삼기도 했지만 말이 현감이지 사실은 천자문도 제대로 못 읽는 까막눈이라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짓는 젊은 별감이 처음부터 송충이처럼 싫었다는 것이었지.

그래서 처음 이별감을 잡아들여 없는 죄를 덮어씌워 동헌에서 추달을 하면서 엉터리로 날조된 죄를 조목조목 반박하자 현감은 수염을 부르르 떨며

“여러 말 할 것도 없다. 저놈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치고 주리를 틀어라.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름만 보아도 알지. 반동(磻童)이 뭐야? 반동이 반동(反動), 그러니 역적(逆賊)이 아니고 뭐란 말이야! 그냥 매우 쳐! 치란 말이야!”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었지.

 

그러자 이번에는 쉰 넘은 주모의 걸걸한 목소리로 경국지색 여자의 치맛자락에 스쳐 촛불이 꺼지듯 성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듯 이번 사단에도 어찌 여자가 빠졌겠냐며 말을 받았지.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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