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8)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11장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④피죽도가리

이득수 승인 2022.02.15 15:34 | 최종 수정 2022.02.18 11:30 의견 0

11.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④피죽도가리
 

이제 생각해봐도 참으로 박학다식 세상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지. 기왕 말이 나왔으니 내 한두 가지 더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더 함세. 내가 가운데 끼어 내 스승인 자네 조상의 말씀을 다시 자네에게 전해주는 것도 하나의 도리 또는 보람일 테니까 말이야.

옛날 중국의 주나라가 쇠락하던 시절 중원에 천하의 호걸들이 저마다 힘을 뽐내며 쟁패를 하던 시절에 그 강함을 나타내는 말로 <만승의 전차, 천종의 곡식>이라는 말이 있었다네. 만승(萬乘)이란 말 네 마리가 끄는 전투용 마차 즉 전차가 만 대나 있는 패권자, 즉 군왕을 말했고 천종(千鍾)의 곡식이란 곳 만승의 병사를 먹여 살릴 군량, 그러니까 일천 종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좁쌀이 있다는 이야기라네.

그렇다면 일종이 얼마만 큼의 양인지 알아야겠지. 우리가 보통 곡식을 나타낼 때 그 기준은 두량(斗量)이라 하여 곡식 한 말, 즉 두(斗)를 기준으로 하고 그 아래로 각각 그 십 분지 일을 되 즉 승(升), 홉(合), 작(勺)등으로 표현하지. 그리고 말의 열배를 석(石) 또 그 스무 배를 곡(斛) 혹은 휘라고 부르고 그 여덟 배를 종(鍾)이라 하였다고 하네. 그러니까 일곡을 20두로 치면 일종은 160두 즉 16석이 되는 데 그렇다면 천종은 대략 일만 육천석이나 되니 실로 엄청난 양이지.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무지렁이 농사꾼에게 그렇게도 한 뼘의 땅과 한 줌의 곡식이 목숨 줄인데도 옛날의 천자나 제후들은 자신들의 공신들에게 엄청난 넓이의 땅 즉 하루 종일 걸어도 다 밟지 못 하고 눈에 보이는 시야의 끝까지 이르는 땅이나 산 너머 또 산 너머의 일개 고을을 봉토로 주지 않았던가?

거기다 해동의 소국인 고려시절에도 공신이나 사찰에 엄청난 봉토와 둔전을 주었을 뿐 아니라 조세와 토지제도가 많이 개혁된 조선에서도 벼슬아치하나하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양의 토지와 녹봉 즉 곡식을 주었는데 그게 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와 초부와 목부를 쥐어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말씀하셨지.

우선 과전제가 실시되던 국초에는 정일품은 1년에 무려 150결 그러니까 약 138정, 언양식으로 2,025마지기나 되니 마구뜰보다도 훨씬 넓은 땅이지. 게다가 정2품은 95결, 최하등인 종구품도 10결 그러니까 9정보, 즉 137마지기나 되니 이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겨우 손바닥만 한 논 서마지기 닷 마지기에 생때같은 목숨 일곱, 여덟이 목을 매는 판에 말이야.

거기다 세종 이후 시행된 현물 녹봉을 경국대전에서 살펴보면 정일품은 봄에만 중미, 조미, 전미 각 4석, 12석, 1석 도합 17석, 황두 즉 콩 12석에 명주2필 정포, 즉 목면 4필에 종이돈 10장을 주었고 여름에는 또 중미 3석, 조미 12석에 비단 1필, 정포 4필애 밀 5석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도 지급하여 연간으로는 중미만 14석, 조미는 48석에 기타 등을 수도 없이 주었으니 어찌 나라의 곳간이나 농부의 쌀독이 텅텅 비지 않을 수가 있었으랴.

심지어 최하위인 종구품 즉, 능이나 태묘를 지키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조차도 어지간한 중농보다 나은 녹봉을 받았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그 벼슬아치들의 배부른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아까 <사흘에 피죽 한 사발도 못 묵었나?>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번엔 <피죽사발이>, <피죽도가리>란 이야기를 한 번 해보기로 함세.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릴 적에 아이들끼리 살구받기나 돌치기, 땅따묵기를 하다가 뭣이 너무 잘 안 되거나 많이 지면 ‘에이, 피죽사발이다!’ 하고 내빼기가 일쑤였지. 재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내가 지거나 잃은 것이 별 가치도 없는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지. 이미 쌀이 주식이 되어 보리나 밀, 콩이나 조, 기장의 오곡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 하는 판에 그까짓 피로 끓인 피죽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말이지.

그러나 흉년이 들거나 한겨울에 진작 양식이 떨어져 보리이삭에 물이 잡혀 풋바심을 할 수 있기는커녕 쑥이나 송기 같은 초근목피도 찾아 나서기 힘든 절량농가의 굶주린 목구멍 앞에 피죽이면 어떻고 그 보다 못한 강아지풀 즉 제패(稊稗)라 하는 강아지풀과 돌피의 열매이면 어떠랴? 그저 목구멍에 넘길 수 있고 작으나마 곡기가 있어 목숨 줄이 연장만 된다면 말이야.

그래서 아까 말한 사흘에 피죽 한 사발이란 말도 나오고 또 삼순구식(三旬九食)이라 하여 30일 즉 한 달에 아홉 끼도 못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따지고 보면 사흘에 피죽 한 사발이나 한 달에 아홉 끼나 그게 그거인 거지. 그냥 노상 굶는다는 말인 거지. 이렇게 두고 보면 봉이 김선달의 서른 밥, 쉰 밥이나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도 여기에 비하면 신선놀음인 것이지 최소한 죽을 만큼 굶는 건 아니었으니까.

또 이렇게 한 끼를 먹기보다는 우선 곡기라도 좀 느낀다는 입에 풀칠, 간에 기별이라는 말이 다 있지 않는가? 굳이 먹기보다는 먹는 시늉조차 이나 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오죽하면 <아침 잡샀능교?>가 다 인사말이 될까? 오죽 굶고 오죽 배고프면 그걸 인사라고 하겠냐마는 넉넉히 밥을 먹은 경우라면 몰라도 아침도 굶은 사람에게 그런 인사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답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화나고 기분 나빠 종일 중얼거리는 것이 바로 <저녁 굶은 시어미>와 <비 맞은 중>이라는 판에 말이야.

그래서 <방귀깨나 뀐다. 똥깨나 뀐다.>가 큰 유세, 큰 자랑거리가 된 시절도 있었지. 하도 굶어 멀건 설사조차 못 하는 판에 저만 잘 먹어 단단한 똥을 누거나 그 마저 소화가 잘 안 되어 방귀를 뽕뽕거린다면 그 모진 흉년의 보릿고개에 그 얼마나 대단한 호사란 말인가?

그런데 이와 비슷한 <아끼다가 똥 된다.>라는 말은 더 묘한 이야기지. 하도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머슴살이하는 총각이 초배기에다 보리개떡 하나를 넣고 같은 머슴들이랑 산에 나무를 하러갔는데 한낮이 지나도록 그 귀한 것을 그냥 먹기도 그렇고 또 친구들도 갈라먹기도 아까워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해질녘에 먹으려고 뚜껑을 열고 보니 누가 벌써 먹어버리고 그 속에 똥을 싸놓은 것이야. 말이 그렇지 얼마나 기가 막히고 아까운 일이랴? 아니 안타깝고 서럽고 애달픈 일이지 그래.

이제 마지막으로 <피죽 도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지. 굶다굶다 마지막 남은 논 한 도가리를 굶어죽기보다는 낫겠다는 심정으로 겨우 피한 줌과 바꾼 것이 바로 <피죽 도가리>지. 그런데 그 아까운 피로 모처럼 아홉 식구가 배를 채우려 넉넉하게 물을 잡고 한 솥이나 죽을 끓여 막상 먹으려니까 너무 뜨거운 것이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죽을 식히려고 우물가에 내어놓고 소두뱅이와 솥전에 물을 추기고 뒷간에 잠깐 갔다 온 사이에 난리법석이 났는데 그게 바로 <죽 쑤어서 개 존 일>이라는 이야기지. 주인이 그렇게 굶은 판에 갠들 얼마나 배를 곯았겠어. 주인이 측간에 가자말자 그 뜨거운 피죽을 사정없이 핥아먹고 배가 부른 건지 입술과 혀를 데인 건지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더란 말이지.

세상에 이건 뭐 억울하고 분하기보다는 그냥 어이가 없는 일이지. 말 못 하는 알라도 못 갈구는 판에 짐승이야 오죽하랴?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내가 곰곰 생각하니 그 주인여편네도 참으로 바보야. 아니 그렇게 굶을 판에 개 줄 양식이 어디 있어 개를 키우나, 차라리 개가 비쩍 마르기전에 잡아먹어 온 가족이 몸보신이나 할 일이지. 그렇지만 몇 년을 같이 살던 그 식구 같은 개를 어떻게 잡을 수가 있나? 더욱이 아이들에겐 둘도 없는 친구일 텐데, 어찌 친구를 삶아먹을 수가 있나? 아무튼 목구멍은 무서운 구멍이고 춘궁기는 괴롭고 서러운 세월이야. 하하하.

 

그러나 그 어떤 가렴주구나 작폐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한평생 농사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 년 내내 피땀을 흘린 곡식을 엉뚱한 명목으로 빼앗아가는 일보다 더 억울한 것은 없겠지. 문제는 그렇게 농민을 착취하는 당사지가 깊은 산골에 은거하는 초적(草賊)의 무리도 아니고 한밤중에 담을 넘는 도둑도 아닌 백성들을 보살펴야하는 목민관(牧民官)인 수령방백과 그 서리(胥吏)인 아전무리의 토색질과 향교와 향청에 웅거하며 토색질을 일삼는 향반의 무리라는 것이었지. 자, 그러면 지금부터 그들이 어떻게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 참상을 시정하려고 현감에게 항의하다 변을 당한 고을의 별감이자 자네의 증조부인 반동선생이 적시(摘示)한 폐단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세.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은결(隱結)>에 대해서 이야기하여야겠군. 은결이란 글자 그대로 숨은 논밭, 그러니까 토지에 관한 조세를 부담하지 않은 전답을 말하지. 이 은결의 발단은 임진왜란 중에 대다수의 농민, 특히 농사를 지을 장정들이 전쟁에 나가 죽거나 다치고 피난길에 올라 유리걸식을 하게 되면서 난리가 끝나도 나라 안의 대부분의 토지, 그 중에서도 토지가 비옥하여 대부분의 조곡을 감당하던 충청, 전라, 경상도, 즉 삼남의 땅이 황폐해진 데서 유래하지.

다시 말해 임란 종식 후 전국의 농지를 양전(量田), 즉 토지조사를 하는데 제대로 농사를 짓고 세곡을 바칠 땅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이지. 그 남은 절반도 상당한 부분이 세자와 대군, 공주, 왕자와 옹주, 후궁에게 특사하여 대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 궁방전(宮房田)에다 훈련도감을 필두로 의정부, 의금부, 종친부, 호조, 기타의 각 아문에 자체경비충당을 위하여 황폐한 농토를 새로이 개간하고 인근의 농부가 이를 경작하고 국가대신 소속영문에 조세를 바치게 한 것을 둔전(屯田)이라하는데 이 둔전이 팔도강산의 각 병영과 지방관아, 심지어 향교와 사찰에 이르기까지 그 개간과 경작, 자체경비조달이 허용되니 대부분의 황무지와 야산이 둔전으로 변해버렸지. 그 뿐 아니라 전국의 공한지와 버려진 저수지와 둑, 어장, 땔나무를 생산하는 산과 화전, 역적으로 몰려 몰수된 재산까지 모조리 둔전으로 편입되어버렸지.

거기다 원래 장부에 있던 농지가 황무지로 묵어버린 것을 진황전(陳荒田)이라 하는데 이미 파산하여 유리걸식하는 무리들이 이 버려진 땅을 조금씩 개간하여 정착하면 어느 새 고을의 아전, 그러니까 호방이 나타나 은결로 적발하여 농민을 핍박하여 소출의 대부분을 빼앗는데 그것을 국고도 지방관서의 운영비도 아닌 사또와 아전이 적당히 배분하여 착복하는 것이었다네. 비단 그 뿐이 아니라 각 관아의 둔전, 하다못해 역이나 원, 봉수대에 부과된 둔전에도 본래의 둔전보다 더 넓은 진황전이 편입되어 세곡이 서리들의 몫으로 넘어가고 향교소속의 둔전이나 양반세도가의 넓은 전답에도 그런 진황전이 엄청나게 끼어들어 나라살림은 날이 갈수록 가난해지고 토색질의 무리들은 점점 배꼬리에 기름이 끼게 된 것이지.

 

자, 이제까지는 주로 토지에 대한 문제였지만 다음으로 그렇게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눈곱만큼 남은 전세(田稅), 적 세곡에 관한 작폐에 대하여 알아보아야겠지.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의 계급구분이 있어 그 으뜸인 선비가 벼슬을 하고 농민이 세곡을 바쳐 나라살림을 꾸려가는 농자(農者)가 천하의 근간이 되는 농자천하지대본의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국가 조세의 근간도 세곡을 얼마만큼 적정하게 받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겠지. 그래서 세곡의 종류와 세율, 관리의 녹봉과 토지분급방법이 여러 번 고쳐지고 바뀌기를 반복했지. 그래서 대동미니 비총(比摠)법이니 직전제니 정전제니 여러 제도가 시행되기도 했지만 그 근간은 총 생산량의 1할미만을 조세로 받는 것이 원칙이었지. 그걸 전세미라고 한다네.

이 전세미에다 나중 삼수미라는 새로운 세가 추가되었는데 이건 신설된 훈련도감의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를 먹여 살릴 신세로 종전의 전세 이외에 1결에 쌀 2말2되를 징수한 것이었지.

이 대동미에 삼수미로 그쳤다면 백성들의 어깨가 얼마나 홀가분했으랴만 전세의 수납에서 시작하여 한양의 궁궐에 상납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부가세가 붙어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클 지경이 되었다네.

자네가 배를 타 봐서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육지 한가운데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지만 삼면이 바다인데다 그 높은 산들에서 저마다 깊고 긴 강이 흘러 그 강과 바다를 통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이 발전했지. 그래서 경상도의 낙동강하구에는 구포가, 섬진강에는 하동포구가, 전라도의 영산강에는 영산포가, 금강에는 강경이 거대한 창고를 지어 세곡을 모아 보관하는 거점이 되어 한양의 삼개(마포), 솔모루(송파), 노들(노량진)로 실어 보냈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하역료, 운송료, 수수료, 잡비, 자연소모의 보충을 충당하기 위한 각종 부가세가 부과되었지. 그런데 이 부가세가 나중에는 세곡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흉년에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게 된 백성에게 보릿고개에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가 끝난 가을에 받아들이는 환곡에 이르러 더 엄청난 새끼를 쳐서 바야흐로 무지렁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의 거의 모두가 포악한 수령과 간사한 아전들의 잔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네. 바로 이런 부정과 부패를 적시하고 시정시키려다 우리 반동선생께서 그 곤욕을 치른 것이라네. 이젠 그 환곡의 비리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기로 하세.

그러니까 조정이 지방관아를 통해 흉년의 세궁민을 구휼하고 이듬해 다시 씨를 뿌릴 종자를 보급하고 곡가, 즉 쌀값을 조절하고 군량미를 비축하기 위한 다목적의 무이자 사회사업이 바로 당초의 환곡(還穀)의 존재이유였다네.

그런데 이 백성을 위한 사업이 차츰 변질되어 수수료와 잡부금이 붙고 높은 이자에다 서리들의 농간과 협잡으로 수령과 아전들의 배만 불려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지.

이 환곡은 처음 전체 국가부담의 양곡으로 오로지 휼민(恤民)을 목적으로 한 무이자사업이었지만 나중에 국가재정이 곤궁해진 병자호란이후에 자연소모들을 보충하기 위한 약간의 이자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 차츰 도를 더하여 마침내 관영고리사업이 되고 만 셈이었지.

처음에는 벼 한 섬에 이자가 1할 즉 1두였으나 품질을 검사하기 위하여 꺼내어 보는 간색(看色)에 2승, 땅에 떨어지는 낙정에 5승, 창고를 지키는 영졸들이 먹는 영미에 2승으로 약 2할이나 되었지. 생각해보라! 벼 한 섬을 보관하는 데 바람에 마르고 쥐나 새가 먹는 것이 어찌 그 1할이나 되는 한 말이 되고 좁은 대롱으로 몇 번을 찔러 그 빛깔을 보는데 두 되가 들 것이며 되질을 하는데 무려 닷 되가 날아갈 것인가?

거기에다 관리들이 사용하는 말이나 되가 일정치 않아 받아들일 때는 많이 들어가는 것을 내줄 때는 적게 들어가는 것을 쓰니 그 또한 눈 감고 아옹이 아닌가.

나중에는 민간에서 자구책으로 부농이나 향반이 곡식을 염출하여 마을단위로 운영하는 사창(社倉)이 생겨났는데 이 사창마저도 관에서 관영으로 흡수, 여러 곳의 창고가 난립하여 글을 몰라 기록마저 할 수 없는 까막눈들은 언제 어느 창고에서 얼마를 빌렸는지도 모르고 그저 아전, 즉 호방의 사령이 부르는 데로 원곡이 되고 이자와 잡부금이 첨가된 환곡고지서를 받아 혹독한 독촉으로 수탈당하게 된 것이었다고 하네.

내가 반동선생님으로부터 듣기로도 이 환곡에 관한 부정은 수령에게 여섯 가지, 아전에게 열두 가지의 농간과 협잡이 있고 그중에 반작, 입본, 가집이라는 야료는 수령과 아전이 공모해서 반반씩 나누어 착복했다고 하네. 지금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반작(反作)이라는 것은 추수의 회수 시와 춘궁의 반곡 시에 수령이 아전과 공모하여 문서를 위조하여 수납된 것도 미수로 하고 반량하지 아니한 것도 반량으로 하여 그 이득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네.

또 입본이라는 것은 농사의 흉풍과 곡가의 시세를 살펴 양곡을 수시로 내다팔고 사들이기를 반복해 남은 이익을 반분하는 것이며 가집(加執)은 감사가 수령에게 일천 석을 명령하면 수령이 2천 석을 거둬들여 그 절반을 아전과 반분하는 것이라네.

이밖에도 수령은 허류(虛留)라 하여 전관이나 서리배가 창고의 양곡을 횡령, 착복하고도 장부와 문서상으로는 실재로 있는 것처럼 허위로 작성하고 아무것도 없는 창고의 헛된 기록만 보관하는 것이지만 서리나 전관, 현관이 모두 증수회하고 있으나 모르는 제 은폐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하네. 그 밖에도 수령은 가분(加分), 증고(增估)라는 횡령방법이 있었다니 이들을 어찌 감히 목민관이라 부를 것이랴? 차라리 도척이라 부름이 마땅하지 않을까?

또 아전은 아전들끼리만 저지르는 분석(分石), 암류(暗留), 집신(執新), 반백(半白), 탄정(呑停), 세전(稅轉), 요합(徭合), 사혼(私混), 채륵(債勒) 등 아홉 가지의 비리가 더 있었다네.

그 중 분석이란 아전이 창고지기와 결탁하고 보관중인 양곡에 쭉정이를 집어넣어 수량만 채우고 완전한 것을 훔쳐 먹는 것이고 또 탄정이란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면세를 명할 것을 미리 감지한 늙은 아전이 면세령이 내려오기 전에 미리 농민들에게 심하게 독촉하여 세곡을 거두어들인 뒤 면세령이 떨어지면 슬쩍 착복하는 것이라네.

또 암류란 곡가의 시세를 보아 귀할 때는 상관인 수령과 공모하여 곡식을 걷어 들여 민간에 풀지 아니하고 이를 시정에 고가로 판매하여 이득을 나눠먹고 곡가가 천할 때는 민과 공모하여 일부러 받지 않고 그 주고받은 문서만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고 집신은 묵은 곡식을 농민에게 지금하고 새 곡식은 벼슬아치들이 자기들의 소용에 충당하는 것이고 반백이란 아전들이 공연히 매 석마다 절반의 양곡을 도둑질해 먹고 그 절취 분을 농민이 납부하게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네. 예를 들면 굶주림이 절정에 달한 보릿고개에 아전과 민간의 토호가 민간에 풀 양곡 100석을 벼슬아치가 인수하여 훔쳐 먹고 가을에 민간에서 그 절반인 50석만을 납입케 하고 쭉정이를 섞어 100석으로 분작하는 것이라네.

또 100석 중에 겨가 섞여있다는 이유로 실량이 50석 미만이므로 추수 때에는 토호로 하여금 50석만 책임지고 갚도록 교섭하여 그 절반인 50석을 무조건 가로챈다는 것이네.

이렇게 문서를 속이고 내용물을 속이고 미질을 속이고 장부를 조작하는 갖가지 방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었으니 그 참상이 오죽하였으랴? 이 세상의 어느 난장판이 저승의 아수라장이나 그 어떤 지옥이 이보다 더 혼란스러울 것이랴?”

이렇게 긴 이야기를 끌어오던 석암선생이 말끝을 맺기가 바쁘게 쿨렁쿨렁 기침을 시작하더니 좀체 멎을 기색도 없이 진저리를 치듯 온몸을 떠는지라 기출이 황급히 윗몸을 보듬고 등을 쓰다듬기 시작하는데...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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