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6)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11장 이 별감댁 패가 전말

이득수 승인 2022.02.12 11:52 | 최종 수정 2022.02.16 11:57 의견 0
ⓒ서상균

11.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②옥사한 반동선생(이 별감)

그러자 이번에는 쉰 넘은 주모의 걸걸한 목소리로 경국지색 여자의 치맛자락에 스쳐 촛불이 꺼지듯 성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듯 이번 사단에도 어찌 여자가 빠졌겠냐며 말을 받았지.

지금 언양현에는 비록 고을은 작아도 예로부터 한양에서 경주를 거쳐 부산포로 봉수와 파발이 통하는 길목이라 파발과 파발마를 관장하며 공무로 드나드는 벼슬아치를 수발드는 덕천역을 비롯하여 방터, 어음, 궁근정, 반곡등 사방에 나그네들이 묵는 원이 있어 그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관기가 어느 고을 보다 많은 7, 8명에 이르는데 그중에서 인물도 좋은 데다 어깨너머로 글을 배워 시화(詩畵)에 능하면서도 성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기로 소문난 수월(水月)이, 그러니까 물에서 건져 올린 달덩이 같다는 관기 수월이가 현직 천 현감은 늙어 영감냄새가 난다고 죽으면 죽을지언정 수청을 들지 않고 버텼다고 하네. 그러다 우연히 어느 봄맞이시회(迎春詩會)에서 인물이 훤한 젊은 이 별감을 보고 마음이 끌리다 별감이 지은 오언절구의 짧고 투명한 절구(絶句)에 또 한 번 놀라 어느새 연정을 품은 것이 현감 눈에 뜨여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러자 또 한 사내는 학문이 높고 효성이 깊은 별감이 그 따위 천기(賤妓)에게 마음을 주었을 리가 없다고 하자 또 한 사내는 여자의 흰 얼굴과 붉은 입술에 이길 장사가 없다고 오죽하면 옛 말에 여자의 희고 가지런한 치열이 남자의 허리를 베는 작두라는 말이 다 있겠느냐고 받기도 했지.  

 

아무튼 내가 느끼기로는 참으로 포악한 현감에게 너무나 고약하게 걸려들었다는 느낌이었지. 그렇지만 어린 내가 의분으로 주먹을 움켜쥘 뿐 아무 대책이 없듯이 주변의 사람도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다는 그 관재수(官災數)를 도무지 어쩔 방법이 없었지. 그렇게 둔터의 가별감(벼슬 이름)네 집과 서당 주위에 먹구름이 드리운 지 벌써 반년이나 지나 새봄이 오기 시작할 때쯤 가별감의 큰 아들 그러니까 네 조부 되는 이가 반곡에 있는 재종숙인가와 함께 삼동의 논밭을 죄다 팔아넘긴 엽전꾸러미를 들고 읍에 있는 형방의 집을 야밤에 찾아갔다고 하네.

이 별감의 아내 은진 송씨와 칠순 노모가 날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이자 아들이며 가장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어느 날, 그날은 아침부터 집 앞 늙은 포구나무에서 깍깍 까치가 울고 고샅길 담장 아래로 낮게 제비들이 날아다녀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네. 아침상을 물리자 말자 현청에서 기찰포교가 기별을 넣었는데 내일 아침 가별감을 풀어준다고 가족들이 와서 사람을 받아가라는 이야기였지.

뛸 듯이 기뻐하며 가별감의 아들 삼형제가 이십 리가 넘는 길을 달려 읍에서 하루를 기다려 아비의 신병을 인수했을 때 그들은 놀라자빠지고 말았네. 너무나 혹독한 고문과 태형에다 근 1년을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않고 차디찬 맨바닥에 옥살이를 시켜 아버지는 이미 걷지도, 말을 하지도 못 하고 눈이 갤갤 풀려있었던 것이야.

삼형제가 교대로 업고 덕천고개를 넘어가다 아비의 몸이 점점 무겁게 처지는 것을 느낀 장남이 지금 수남마실인 덕천역마을의 어느 민가에 아비를 눕히고 물을 떠먹이려는 순간 딸깍 반동선생님은 숨이 멎고 말았다네.

그러니까 나는 스승님과 짧은 오언시 몇 구절로 오후를 함께 한 후로 다시는 살아있는 스승님을 뵙지 못 했지. 참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찬 일이지.”

 

시종 지그시 눈을 감고 이야기를 하던 석암선생은 말을 마치며 눈을 들어 한참이나 방문 위를 응시하더니

“나중에 내가 좀 더 자라고 같은 집안 좌수어른이 돌아가실 때 좀 더 소상한 내막을 들었지만 이미 사후약방문,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자, 그 내막이나 뒷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나는 이제 숨이 가빠 좀 쉬어야겠네. 다시 이야기를 매조지하려면 숨을 좀 돌려야하니 자네도 하루쯤 집안일을 살피고 모래쯤 다시 오시게.”

마침 그때 점심상이 들어왔다.

 

“그래, 그 때는 그랬지.”

이틀 뒤 기출이가 다시 찾았을 때 석암선생은 무엇엔가 쫒기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서둘렀다. 

“별감어른께서 그렇게 억울하게 집에도 오지 못 하고 객사를 하자 향교의 서생들을 비롯한 유림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지. 망인이 평소에 부정한 일을 하거나 남과 다툼을 일으킬 사람이 아닌 오로지 책만 읽은 선비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온갖 구실로 애민 죄를 덮어씌우고 혹독한 태형으로 명줄을 놓게 만드는 것인지, 더욱이 망인은 언양고을을 대표할 젊고 유망한 선비로소 40대의 젊은 나이에 향청의 별감을 맡아 향후 유림을 대표할 좌수가 되어 백성을 돌보고 향풍(鄕風)을 진작시킬 큰 재목인데 한 졸렬한 향관의 질투와 횡포로 그 희망이 꺾였으니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하나둘 향청으로 모여들었지. 

그 전해인가 진주에서 경상우병사 백락신의 횡포를 견디지 못 한 농민들이 스스로 모여들어 대오를 갖춘 초군(樵軍)이 되어 진주관아를 급습하여 부패한 벼슬아치들과 아전들을 살해하고 관아를 점거한 민란이 발생해 안핵사(按覈使) 박규수가 파견되어 겨우겨우 수습한 뒤로 전국각지에서 들불처럼 민란이 번지던 시기였음에도 당시의 현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가혹한 수탈을 저지르고 그 민폐를 적시하고 시정을 요구한 젊은 별감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제거한 것이었지. 

언양이란 좁은 바닥에서 감히 거창한 민란을 일으켜 고을을 소란스럽게 하고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기보다는 현감의 수탈과 실정과 무고한 백성들이 받는 고통과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랄한 형벌과 억울한 죽음을 소상히 기록하여 조정에 상주하자는 이야기가 떠돌면서 향청은 물론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덕천마을의 빈소의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지.

그런데 삼일장으로 치르기로 한 전날 현감의 부름을 받은 좌수어른이 현청에 들렸다나오면서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지. 경거망동하는 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향청 또는 반동 가이택별감의 빈소에 좌왕우왕하며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들여 그 죄를 물어 엄격히 다스릴 것이라는 사또의 명이 하달된 것이었지. 당시의 사또가 얼마나 포악했던지 또 좌수어른을 얼마나 윽박질렀는지 사시나무 뜰 듯이 덜덜 떨던 좌수가 그 말을 전하고 황급히 집으로 내빼자 유림을 자처하던 선비들도 하나둘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험어험, 헛기침을 하면서 꼬리를 뺐지. 마침내 사또의 영(令)대로 일가친척이 아닌 모든 선비들이 돌아가고 상청에는 상주들만 남아 복장이 터지는 울분을 삭이며 그 이튿날 향교의 바로 뒷산인 봉꼴산 기슭에 장례를 치렀지.
 

자네 화불단행이란 말을 아시는가? 그 억울한 죽음은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슬픔의 실마리가 된 것이지. 반동선생의 장남 그러니까 자네 조부가 되는 이는 그 때 나이가 나보다 8, 9세 많은 이십대 중반이었는데 위로 마흔이 좀 넘은 모친과 아래도 두 아우와 여동생 둘에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었고 아내가 시집올 때 데려온 몸종까지 무려 아홉 명의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옥에 갇힌 부친을 방면시키려 대부분의 논밭을 팔아 넣은 데다 이제 서당마저 할 수가 없어 생계가 막연한 것이었지.

궁리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집과 자투리 땅 약간을 팔아 처가가 있는 양산 대석인가로 솔가를 해 갔지. 그 와중에 두 아우 중 하나는 선대의 고향인 언양 반곡인가 구량이가 좌우간 경주 방향의 먼 친척집으로 의탁했고 또 하나는 둔터에서 하잠을 지나 인동골 골짝을 넘어 가지산에서 흐르는 남천내와 간월산의 작괘천, 신불산의 축시 도랑이 만나 아홉 개의 늪을 만들면서 비로소  태화강의 도도한 물결을 만들어내는 구늪이라는 마을로 가서 그 척박한 갱빈땅을 일구었다고 하지. 

이미 몰락해버린 선비의 후손인 자네 할아버지는 이제 돈도 쌀도 되지 않은 골치 아픈 짐이지만 차마 버릴 수도 없는 족보와 병풍과 커다란 벼루와 목기와 유기로 가득한 제기(祭器)를 짊어진 남부여대(男負女戴)의 식솔들을 이끌고 사촌과 쇠꼴, 조일과 암리를 지나 통도사 앞 새뜰을 지나 용연을 거쳐 근 60리나 떨어진 대석이라는 처가 곳으로 떠났지. 아직 이팔 즉 열여섯 미만의 두 딸들은 대석으로 가자말자 그냥 밥걱정이나 면할 만한 농군들에게 주어버리고 아내의 몸종이던 서른에 가까운 여인네도 어디론가 자유로이 떠나게 하였다더군.

ⓒ서상균

그렇게 스승을 잃고 또 그 악랄한 현감이 떠나고 다른 사또가 와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인 수탈과 횡포가 반복되기를 십여 년, 나도 나이가 들어 장가를 들고 아이를 낳아 그저 밥술이나 뜨는 시골선비로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지내기를 또 십여 년에 어느 날 갑자기 자네 조부가 솔가를 하여 봉당골만디 덕천역역졸들의 둔전에 나타나 반동선생의 애달픈 기억들을 지워나가던 내 가슴을 일순에 흔들어놓고 말았지. 

언양 장날 한 두 번 자네 조부를 만나 탁주를 대접한 일이 있긴 했는데 자네 조부께선 천천히 잔을 비우면서 ‘석암이자네를 이렇게 만나니 참 반갑구먼. 우리 어른이 살아계실 때 우리 고을에 모처럼 제대로 된 선비의 싹이 움텄다고 자네를 두고 그렇게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선하구먼.’ 한마디를 하고는 더는 말이 없었지. 형색이나 낯빛을 보아 그동안 어렵게 호구지책을 하며 여기저기 떠돌다 봉당골에 정착하기까지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차마 입에 담기가 싫었겠지. 들리는 말로는 봉당골의 그 움막도 자네 조모가 몸종으로 데려와 방면해준 여인이 덕천역역승의 소실로 들어가서 늙은 역승의 총애를 받아 힘깨나 쓰면서 옛날의 마님을 생각해 배려한 것이라고 하더군.

그 봉당골에서 자네의 조부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학동이던 시절 코흘리개이던 자네의 부친 복성이가 키가 팔대장승같은 전라도처녀인 서촌댁과 네 누이 귀남이를 데리고 바로 우리 마을, 그것도 담이 붙어 앞뒷집이 되는 자리에 이사를 오고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지. 조금씩 잊어가려던 기억이 다시 조금씩 살아나면서 점점 나를 더 압박해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버든마을에 온 후 네 큰형인 선출이를 비롯 죽은 재출이, 또출이와 네가 태어나고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무슨 인연인지 자네와 내가 동시에 읍내 모 호방네 집에 드나들고 조석으로 만나면서 나는 또 한 번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지. 보면 볼수록, 가면 갈수록 자네의 눈빛과 걸음걸이와 목소리가 반동선생을 닮은 것이어서 낮잠을 자다 깨어 무의식적으로 너를 보다 실제로 스승님을 뵙는 착각에 빠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자네의 머리, 한번 보고 들으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총기와 놀라운 상상력이 마치 반동선생님의 환생을 보는 것 같았지. 포악하고 노회한 현감에게 백성들을 그만 괴롭히고 선정을 베풀라고 권하다 곤장을 맞고 장독(杖毒)으로 돌아가신 스승을 너무나 닮아서 말이야. 그래서 여전히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망해버린 나라에 왜놈과 그 앞잡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자네마저 할아버지처럼 글을 배우고 남의 앞에 서서 너무 꼿꼿이 줏대를 세우다 억울한 횡액을 당할까 싶어 조마조마한 것이었지. 그 존경스런 스승의 억울한 옥살이와 죽음을 보면서 아무 것도 돕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눈물만 찔끔대던 이 소심한 책상물림이 자네를 위하여 아니 스승님에 보은하는 길이 그저 자네가 평범하고 무난한 촌부로서 자손을 많이 낳고 곱게 늙어가기를 바란 것뿐이었지.

자, 이제 왜 내가 자네를 끼고돌면 글을 배우지 못 하게 한 이유를 알겠는가? 좀 쉬었다가 자네 증조부와 현감이 어떻게 얽히고설켰는지 알아보기로 하세.” 

 

석암선생이 잠깐 숨을 돌리게 밖으로 나온 기출이는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다 대빗자루를 짚어들고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뒤란에 패다말고 쌓아둔 장작을 패기 시작하는데 “명촌이 이 사람아, 그만 두게. 자네 집에 또 큰집 서촌댁까지 자네 일만 해도 태산일 텐데. 인자 우리 집도 아이들은 다 자라 객지로 나가고 남자라곤 아부님 하난데 저렇게 늙고 기골이 없으니 꼭 빈집만 같아서 자네 같은 손님이 다 일손을 보텔 판이구먼.”

방에 꿀물을 타다주고 나온 며느리 곽남댁이

“이리 오시게. 자네도 여서 한 잔 마시게.”

하고 마루로 불렀다. 마루에 앉아 꿀물을 마시고 다시 남은 장작을 패는데 “어험, 어험!” 방에서 석암선생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말로 알고 기출이가 들어가 앉자

“자네 증조부와 나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해 그렇게 끝났듯이 자네와 나의 이 긴 인연도 이제 거의 끝이 날 때가 되었구먼. 그렇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숨길이 끊어지기 전에 그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해야겠군. 앞으로 내가 하는 이야기가 좀 어렵거나 지루해도 자네는 머리가 비상하니 대충 짐작은 할 것으로 아니 찬찬히 들어보시게. 그리고 나중에 자네도 나처럼 늙어 한 평생을 뒤돌아볼 때쯤 누군가 자네처럼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에게 또 찬찬히 전해주게.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우리의 검은 머리 백성들이 끝끝내 그 일부가 살아남아 대대로 이 땅을 지켜가듯이 우리가 그 잦은 흉년과 난리와 관아의 착취에도 살아남은 이 이야기들도 다음 세대에 연결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전해야하는 것이야.”

슬며시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고르는데 벌써 눈에 눈곱이 끼고 가끔 잔기침이 나오며 자주 이야기가 끊겼다. 그야말로 전후사정을 기출이가 대충 짐작하여야만 앞뒤가 연결될 판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반동선생이 횡액을 당하던 시절의 늙은 좌수어른이 나중에 돌아가시면서 후회조로 남긴 이야기와 당시의 표독한 현감이 떠난 뒤 비로소 항간에 떠돌던 소문과 내가 조금씩 나이가 들고 세상이치를 깨달으며 느낀 것들을 모두 조합해 이리저리 꿰매어보니 비로소 사건의 전말이 두루뭉술하나마 그 윤곽이 잡힌 것이지. 좌우간 반동선생이 도대체 당시현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둘 사이에 무슨 앙금이 있어 불문곡직 생사람을 잡아들여 장독으로 죽음에 몰아넣고 한 가문을 멸문지화에 이르게 했는지를 밝히려면 우선 당시의 시절이 얼마나 어지럽고 관장(官長)과 이속(吏屬)을 합한 서리(胥吏)들의 횡포가 심했는지 또 그 와중에 세상은 얼마나 빠르게 변해갔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지. 

그러자면 당시의 세상을 가장 심하게 어지럽힌 관아의 수령과 아전들이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행한 여러 가지의 부정, 즉 함부로 공명첩을 남발하여 상민을 양반으로 만들고 돈을 받는 일, 또 토지에 대한 조세의 악랄한 징수와 협잡, 그 위에 상민의 장정에게만 부과하는 과도한 군포의 징수, 마지막엔 헐벗은 농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기고 굶어죽지 않도록 나라에서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되갚는 환곡제도가 도로 백성의 고혈을 짜는 고리채놀음이 되어버린 이야기에 대대로 그 고장의 향반으로 내려오면서 공공연히 향교나 향청에서 자기들끼리 세력을 형성하고 악랄한 관장과 한통속에 되어 도리어 향리의 백성을 수탈하는 토색질에 빠진 완고한 선비, 병든 유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여야 자네가 그 배경을 알 것이 아닌가? 

자네 혹시 대갓집의 행랑이나 문간방, 또는 아래채에 곁들어 살거나 세를 든 사람을 셋방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접방살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왜 더러는 남의 집 섭포살이라고 하는 지 아는가? 그 섭포살이란 말이 사실은 협호(夾戶)살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우선 이 협호가 무슨 말인지 알아야 지금부터 육십 년도 더 지난 조선말의 민심을 알 수 있겠지. 한자로 좁다, 작다라는 이 협호라는 말은 다시 옆구리에 낀다는 협호(挾戶)로 쓰이기로 하는데 그러니까 남의 집 옆구리의 작은 방에 끼어서 사는 가난뱅이, 다시 말해 남의 집에 얹혀 겨우 밥이나 얻어먹으며 전 식솔이 주인집의 농사일과 집안의 대소사와 부엌일까지 마치 하인처럼 복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노비나 하인도 아닌 멀쩡한 양민들이 왜 이렇게 남의 집 협호가 되었던 것일까? 그건 어떻게 해도 도무지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차라리 남의집살이를 하는 종놈의 신세가 되어서 우선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였지. 맞아죽으나 굶어죽으나 마찬가지라면서 사흘 굶어서 남의 담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온 식구가 다 굶어죽을 판에 남의 집 협호가 된들 그 뿐이란 것이지. 

이렇게 양민이 남의 집 종살이를 하는 협호가 되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선 당시의 제도가 우선 사대부 또는 유림이라는 소위 양반에게는 일체의 세금을 걷지 않고 또 병졸이 되어 번(番)을 서거나 그 번을 쓰는 사람의 농사나 생계를 도울 보(保)를 맡는 군역(軍役)까지 면제해주고 또 양반집에 딸린 하인이나 계집종은 노비호라하여 역시 모든 부담을 면제해주니 조정의 그 많은 관리들을 먹여 살릴 녹봉이 될 쌀, 보리, 밀, 콩 등 온갖 곡식을 세금으로 내고 또 병졸이 되어 번을 서거나 보로서 돈이나 곡식을 대거나 일을 하거나 심지어 역이나 봉수대의 천역(賤役)에 이르기까지 그저 일반 상민호가 모조리 부담하여야 하는 형편이었지.

그런데 이 양반과 상민과 노비라는 세 개의 신분은 지금부터 500년도 더 지난 이씨조선 개국초기에는 인구의 약 5부가 양반, 또 2할 가까이가 노비로서 나머지 팔할 가까이가 상민층이다 보니 그 팔할이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소금과 숯을 굽고 육의전과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여 그 많은 관리의 녹봉을 주고 나라살림을 도맡을 수가 있었지.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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