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6)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8장 노름쟁이 조(趙) 서방 ②노름꾼 본색

이득수 승인 2022.02.03 17:42 | 최종 수정 2022.02.06 08:46 의견 0
ⓒ서상균

8. 노름쟁이 조(趙) 서방 ②노름꾼 본색

사실 호방댁도 막상 만나면 혀를 끌끌 차면서 정작 그 무거운 쌀자루를 이고 아이까지 업은 채 타박타박 신작로를 걸어 송대성당 아래 부리시 봇디미를 넘어가는 둘째 딸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가슴이 찢어질 것 만 같은 것이었다.

 

네 딸에 막내아들의 오남매들 낳아 평온하게 젊은 시절을 살아온 그네로선 어떻게 한번 몰아치자 걷잡을 수도 없던 풍파로 남편 모 호방을 잃고 순임이, 끝님이를 잃고 외아들 치만이를 억지로 장가들였지만 딸 하나만 남기고 며느리가 도망치자 그만 얼이 빠져버렸다.

치만이의 정신상태가 더 나빠져 반병신이 된 과정에서 그래도 소리 소문 없어 잘 사는 것은 명촌의 양반댁 큰며느리로 간 큰 딸 큰님이 하나였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살림을 축내고 심장을 상하게 하는 것은 작은님이였지만 보는 내 심정이 이리 괴로운데 당하는 자신, 네 아이 먹여살려야 하는 작은님이는 오죽 하랴싶어 미워하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못 하는 것이 바로 어미의 마음이었다.

하루는 모녀가 같이 자면서 그날도 역시 먹고살기 힘들다고 통사정을 하는 딸에게 호방댁이

“이 시근머리 없는 년아, 그렇게 살기 힘들면 얼라나 작작 놓지, 묵고 살 것도 없는 형편에 이태에 한 놈씩 웬 아이는 그렇게 꼬박꼬박 놓고 지랄이야?”

묻자

“아이고 어매, 어매는 어데 그기 맘대로 됩디까? 어매는 내보다 하나 더 많이 다섯이나 놓아놓고?”

비죽이 웃으며 쳐다보자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천 날 만 날 노름방에 돌아다니는 우리 조 서방이 아이는 우째 그래 곧잘 만드능고?”

“그래 말이요. 꼭 잊어뿔라카면 한 번씩 슬슬 찾아와 눈빛이 발갛게 분홍빛이 되어 ‘분필이 어매 내 니 고생 많은 거 다 안다. 내 이번에 큰 거 한방만 터뜨리면 니도 인자 고생 안 하고 살 끼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데 우짤 재주가 있겠능교? 천하에 서방 이기고 살 여편네도 없지만 엄마요, 우리 조 서방이 그럴 때 보면 코도 뭉뚝하고 허우대는 또 얼마나 멀쩡한지. 아이구, 내가 못 살아. 그렇게 하룻밤 자구 훌쩍 떠나버리면 또 아가 들어서고 또 들어서고 그래도 이번에 우리 망내이 덕칠이를 놓고서는 종갓집 종손이 생겼다고, 그 주제에 이제 죽어 조상님 볼 면목은 생겼다고 눈물을 보이는 꼴이 참, 기가 차서...”

그렇게 긴 넋두리를 쏟아내어도 그 노름쟁이 남편이 절대로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작은님이가 어쩌다 기출이와 호젓이 마주치면

“기출아, 아니 동생아, 니도 인자 이래 사이 우리 동생택 아이가? 차라리 옛날 우리 끝님이하고 잘 되었으면 이런 풍파도 적었을 낀데. 세상에, 우리 끝님이는 얼마나 삼실하고 기출이 니는 얼마나 또 잘 났는데 말이다. 세상에 삼신할매가 질투를 했나, 눈이 거꾸로 뒤집혔나?“

넘치도록 살갑게 굴며 눈웃음을 쳤다. 물론 걷어온 월세나 도조로 받은 나락과 쌀은 어머니가 다 요량하지만 일단 처음 걷어오는 사람은 기출이니까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어매가 어데 보통사람이가? 깊고 얕고 힘들고 세상물정 훤하게 다 아는 사람인데 후제 니 고생한 것 모를 택이 있나? 아마 니도 나이 들면 장가도 들이고 한 밑천 띠 줄 끼다. 그 때는 우리 다 같은 한 형제처럼 인정 있게 살자이.”

이렇게 곰살맞게 굴기도 했다. 우연히 장바닥에서 마주친 기출이가 조용히 떡집으로 데려가면 작은님이는 두어 조각 먹는 척만 하면서 제 새끼들 준다고 손수건을 꺼내 사기도 했다.

하루는 그런 작은님이가 눈두덩이 시퍼렇게 되어서 대문간에서

“어무이, 어무이!”

목이 꺽꺽 매여 들어왔다. 기출이가 보아도 참혹한 모양이었다. 입술이 터지고 관자놀이에 상처가 난 데다 피가 눈가로 몰려 시꺼멓게 멍이 들어있었다.

노파에게 더운 물을 끓이게 해 얼굴을 꼼꼼하게 씻기고 달걀로 눈두덩을 문지르게 하면서 그만 억장이 무너지는지 그렇게 늘 차분하던 호방댁도 작은님이를 끌어안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딸을 너무 많이 낳아 이렇게 험한 꼴을 보는구나. 그 때 니 아부지 가실 때 나도 가야 되는 건데. 그러면 저 천둥벌거숭이 치만이는 또 어떡하고 인지 와서 죽어뿔라캐도 에미도 없는 저 핏덩어리 은실이를 또 우짠단 말이고? 아이고 아이고오...”

그렇게 한참 울고 난 호방댁이 작은님이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듣는데

 

어느 날 이제 막 반달이 넘어가는 문복산 드링바우에서 으슬으슬 찬바람이 불어오는 깊은 저녁에 아이 넷을 재우고 잠을 청하는 초가의 문을 누가 톡톡 두드리는 것이었다. 아이아버지의 발자국소리가 귀에 익은 작은님이가 얼른 일어나 여닫이문을 여니 과연 남편이었다.

“어서 오이소. 분필이아부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안기려는데

“그래, 고생했제?”

하면서도 남편이 전과 다르게 작은님이의 어깨를 슬쩍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등 뒤에 다른 인기척이 있었다.

“...!”

무심코 쳐다보던 작은님이가 깜짝 놀랐다. 감나무 그늘을 배경으로 키가 자그마한 여인네가 하나 서 있었는데 집을 나왔는지 조그만 옷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

“와 이라노? 사람 첨 보나? 니는 얼른 큰 마실 가겟집에 가서 조피도 좀 사고 막걸리도 받고 쌀도 구해서 밥이나 해라. 배가 고파 죽겠다.”

하면서 손에 든 자루에서 지전 한 움큼을 꺼내주었다. 어둠속에서 보아도 제법 많은 돈이었다. 지전이 서너 되는 들어갈 참기름 짜는 삼베주머니에 가득하다면 읍내의 집 한 채나 물 좋은 상답도 여남은 마지기 살 엄청난 돈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감나무 그늘에 선 여자는 노름빚에 잡혀 넘어온 노름쟁이의 여편네인지도 몰랐다.

“그래, 장땡이 잡았다. 와? 내는 만날 잃기만 하고 이런 날이 한 번 안 올 줄 알았나?”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남편이 작은님이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날씨 춥은데 거기도 인자 방에 들어오소.”

커다랗게 소리치고 있었다.

모처럼 만져보는 큰돈에 작은님이는 발걸음도 가볍게 아랫동네 가겟집으로 달려갔다.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워서 쌀을 한 말을 사고 탁주 두 되와 두부 두 모에 아이들 줄 엿도 여남은 개 사고 쌀자루에 두부와 엿을 얹고 술 주전자는 손에 들고 부지런히 맨 꼭대기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평소에 아무도 거처하지 않고 곡식이나 씨앗을 넣어두는 빈방에 불이 훤한 것이었다. 그것도 석유를 때는 호롱불도 아닌 촛불그림자가 문종이에 너울거리고 있어 짐을 내려놓고 다가가는데

“...!”

세상에나 요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살그머니 문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곡식자루도 세간도 아무 것도 없는 싸늘한 빈 방에서 사내의 윗도리를 벗어 깔고 두 연놈이 연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가쁘게 맷돌질을 하는 것이었다. 제 서방인 조 서방이야 원래 크고 잘 생긴 코 값을 하느라고 야무지고도 조곤조곤 떡메질도 기가 막힌 것을 늘 겪는 바지만 그 조그맣고 낮선 여인도 보통내기가 아닌지 부끄럼을 타는 듯 몸을 사리며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잘도 박자를 맞추며 요분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큰 솥에 물을 콸콸 붓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펄펄 끓는 물로 두 연놈을 덮어씌워 아예 삶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그 성질도 불같은 조 서방에게 머리채가 잡히고 눈텡이가 밤텡이가 되는 것은 물론 당장 집에서 쫓아낼 것이니 위의 세 딸은 고사하고 젖먹이 막내아이가 굶어죽는 것이었다.

ⓒ서상균

자신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불을 지펴 밥솥에 김이 나고 두부를 지지는 냄비에서도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데 어느 새 일을 마치고 안방의 아이들 틈으로 돌아온 조 서방이

“벌써 왔능가베. 배고픈데 거 술이나 먼저 도고.”

무안한지 목을 외로 꼬고 말했다.

술상에 이어 밥상이 들어오자 밥 냄새를 맡은 아이들도 웅성웅성 일어나

“아부지 오셨능교?”

인사를 하고 품에 안기려다 뒤에 앉은 낯선 여인을 보고 멈칫멈칫 물러났다.

“야들이 사람 첨 보나? 보소 거기도 어서 다가앉아 묵으소. 배고플 낀데.”

애비는 낮선 여자를 챙기고 있었다. 방금 방사를 벌인 연놈도 자다 깬 아이 셋도 배가 고팠는지 아귀아귀 쌀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작은님이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낮선 여인이 미안한지 배시시 웃으며

“미안합니더. 성님도 앉으소.”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내가 뭐 지 언니라고? 언제 봤다고 언니동생이야? 참 오지랖도 넓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작은님이도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분은 찝찝해도 오랜만에 먹는 쌀밥이 보드랍고 두부도 달았다. 그렇게 먹어야만 막내를 먹일 젖도 나고 집안도 조용할 판이었다.

세 아이가 숟가락을 놓고 포만한 배를 불룩거리며 다시 잠이 들자 대충 자리를 치우고 술상만 남긴 작은님이는 꼬물거리는 막내를 안고 젖꼭지를 물리자 눈도 뜨지 않은 아이는 잠이 깬 건지 아닌지 비몽사몽간에 잘도 빨아 젖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꿀꺽 했다. 얼마나 오랜만의 포식이며 젖 넘어가는 소리인가, 꿈도 생시도 아닌 이 얄궂은 밤을 어떻게 넘길까 고민 중인데

“봐라. 저게는 밀양산내에 사는 노름꾼의 안사람이다. 내가 싹쓸이를 하는 바람에 노름빚에 잡혔다. 노름꾼마누라라면 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겠지. 허허허. 허허허.”

막걸리 두 되를 거의 다 마셔 기분이 한껏 좋아진 조 서방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다시 한참이나 주전자가 비기를 기다려 작은님이가 방 가득히 이불을 깔았다. 방금 연놈이 일을 치른 작은 방은 냉방이라 사람이 잘 수도 없을 터였다. 그래도 명색 있던 집 살림이라 이불쪼가리는 넉넉했다. 모처럼 잘 먹어 배가 부른 데다 밥하고 국 끓이느라 불을 많이 때어 방도 뜨끈뜨끈했다. 게다가 이불을 내린 시렁 끝에 남편이 메고 온 돈 자루를 대롱대롱 메달아 놓으니 그야말로 천석꾼, 만석꾼이 된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윗목으로 밀어내고 그래도 대주라고 맨 아랫목에 남편의 베개를 놓고

“보소, 거게는 거게 자소.”

남편 옆에 자신의 베개, 그 다음에는 젖먹이를 눕히고 그 옆 자리를 가리키자 배시시 웃으며 여자가 누우려는데

“봐라. 생전처음 보는 사람하고 멋쩍어서 우째 같이 자겠노? 그라면 안 돼지.”

남편이 이리저리 베개를 바꿔 놓더니 맨 아랫목에 여자를, 다음에는 자신이 눕고 그 옆에 작은님이를 눕게 했다. 작은님이가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데 옆에서는 어디를 더듬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나 눈을 질끈 감다 못해 앙,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정도로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모처럼 넉넉하게 젖을 먹은 아이가 한밤중에 오줌을 한강처럼 싸는 바람에 방바닥이 축축해 잠이 깬 작은님이는 또 한 번 주춤하고 말았다. 곤히 자는 사이 아랫목의 연놈은 벌써 잠이 깬 모양으로 부스럭부스럭 손이 오고가고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작은님이는 밥을 하는 척 부엌으로 나왔다. 쌀을 씻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한참이나 솥뚜껑을 잡고 우는데 아닐까, 다르랴 자신이 방에 없는 틈을 타 연놈은 또 무슨 수작을 부르는지 안방에는 들뜬 숨소리들이 가득했다.

어쨌거나 해가 축담에 비칠 때쯤 난데없는 일곱 식구가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었다. 여자가 미안한지 물그릇이라도 자기 손으로 챙기려면 얄밉게도 남편이 어깨를 당기며 말리는 꼴이 영판 첩사이를 챙기는 꼴이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측간에 간다고 모처럼 마당을 한 바퀴 돌아온 조 서방은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보고 마지막으로 갓난아이의 부자지를 당겨보고는 다시 이불을 깔고 누웠다. 미안한지 여자가 설거지를 돕는다고 나온 걸 그만두라고 해도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마음도 심란한 김에 그릇을 씻고 물을 좀 끓여놓으라고 하고는 집을 나섰다.

수중에 남은 돈을 헤아려보고 아랫마을로 내려온 작은님이는 길갓집마당에서 뛰어노는 덩치가 크고 벼슬이 붉은 수탉 한 마리를 사기로 했다. 방금까지 칠팔 마리의 암탉 들을 이끌고 시도 때도 없이 이놈저놈의 등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뒷다리를 쭉 뻗어 위세를 과시하고 가끔 길게 울음을 뽑던 팔자 좋은 수탉은 졸지에 목숨이 경각에 달하고 말았다. 평생 자기 속만 썩이다 못 해 낮선 노름장이 여편네를 다 데리고 들어와 흥건한 방사를 치르는 염치없는 남편을 조지듯이 이제 날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저 멀쩡하게 잘 생긴 수탉의 모가지를 댕강 자를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의 심중이 꼭 그렇게 남편에게 복수 아닌 복수로 심통을 부리는 것만도 아니었다. 어차피 날마다 끼닛거리 걱정에 오금을 못 펴는 판에 자신과 갓난애는 언양 친정에서 이밥에 생선이랑 육 고기의 비린 국물을 먹어보지만 1년 내내 고기국물 한 번 못 먹여보는 세 딸들에게 나중에는 설령 굶을 때 굶더라도 통통한 닭고기와 기름이 동동 뜨는 국물을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처럼의 닭고기볶음에 막걸리 한 되를 마신 조 서방은 해가 설핏해지자 이십 리 떨어진 소호에 큰 판이 벌어진다면서 길을 나섰다. 여자도 주춤주춤 따라나섰다. 그 날 밤 여자의 남편이 돈을 따면 다시 남편과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렇기 못 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앞일이었다.

주춤거리는 여자에게 눈짓으로 괜찮다, 잘 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젖먹이를 한 번 들썩거린 작은님이가

“보소! 아아들 아부지요!”

용기를 내어 남편을 불렀다.

“언제 집에 올랑교? 그동안 아이들 안 굶기게 그 자루에 든 돈 쪼매만 주고가면 안 되겠능교?”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라꼬?”

성이 나서 암탉들을 한 바퀴 빙 돌아 다리를 뻗대는 수탉의 벼슬처럼 얼굴이 벌개지면서

“이년이 내 마누라 조강지처가 맞나? 이 정신없는 여펜네야, 노름쟁이서방이 방금 큰판에 나가는데 뭐 끗발 새도록 돈을 좀 주라꼬? 그라고도 니가 내 여펜네 맞나?”

무안만 주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골목길로 들어간 연놈의 모습이 사라지자 작은님이는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언제 한번이라도 다정하거나 수월하게 돈을 내어놓던 남편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수중에 한 보름 아이들이랑 먹고 살 돈도 남아있었으니까.

 

그렇게 한 보름이 지났을까. 지난번에 모처럼 서방에게 받은 돈으로 산 쌀도 달랑달랑하여 시래기랑 무를 넣고 죽을 끓여 방에 들이니 세 계집애들이 먹느니 안 먹느니, 배가 고픈데 아비는 왜 안 오는지 쫑알대다 지쳐 울음을 터뜨리는 판이라 내일은 언양친정에 가서 쌀말이나 얻어올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때 한 번도 손 본 일이 없어 댓가지가 반이나 떨어져나간 앙상한 사립문에 시꺼먼 그림자가 휙 지나가더니

“아부지 왔다. 아부지!”

첫째, 둘째가 쪼르르 달려 나갔다. 며칠이나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판이라 어린 소견에도 지난번처럼 쌀밥에 두부랑 닭고기에 엿까지 포식할 기대에 부풀었던 모양인데

“야들이 와 이라노?”

아이를 밀어내는 애비의 어깨가 축 쳐져있었다. 노름장이 행색이야 늘 눈에 핏발이 서고 바짓가랑이가 쭈글쭈글하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보통 지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진이 완전히 빠진 것처럼 흐늘흐늘 힘이 없어보였다.

“인자 오능교?”

인사를 하던 작은님이가 깜짝 놀라

“보소, 그 돈 자루는 우쨌능교?”

묻는데

“다 꼴았다. 와? 빌어먹을, 명색 기집이라는 기 큰판 붙으러 가는 서방한테 끝발 나가는 소리만 작작 해쌓더니. 그래 와 속이 시원하나?”

험악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아이구, 이 일을 우짜꼬? 내 노름쟁이서방한테 시집 온지 십 년 만에 논밭전지에 대대로 살던 집을 날리다 못 해 친정집 살림까지 거들내고 선산지기 오두막에 살면서 저 생때같은 네 자식들 배를 쫄쫄 골리면서 그래도 믿었지. 머리 좋고 솜씨 좋은 우리 서방이 마침내 크게 한판 해서 다시 집 사고 논 사고 다시 알콩달콩 사는 날이 올 끼라고. 그래 지난 번 그년은 우쨌능교? 내 참 더러버서, 서방이 데리고 온 듣도 보도 못한 년을 밥을 해서 먹이면서 한 방에 재워주다 짐승 같은 짓을 해도 실건에 대롱대는 돈 자루만 쳐다보고 이번 고비 잘 넘기면 허리 펴고 잘 살 거라 생각하고 눈 딱 감고 참았는데 한방에 다 날리다니.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래 애원할 때 돈 몇 푼만 내놨어도 이 기나긴 보릿고개 애들이나 안 굶기지...”

어느 새 청승이 가락이 잡혀 원망인지 신세타령을 한참이나 내 놓는데

“고마 시끄럽다. 밥 도.”

“와, 그년한테 밥 도라 카지. 그 많은 돈 다 내삐고 내 보고 밥 도라 하요? 며칠째 밥 못 묵어 아이들은 찡찡대고 어미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도 굶는 판에 무슨 수로 밥을 주꼬?”

“허어, 참 시끄럽다카이. 혹시 집에 돈 남은 거 없나? 밑천이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다시...”

“말 같은 말을 하소. 자식새끼 굶기는 판에 노름밑천 대줄 돈이 어데 있겠능교?”

“...”
부부가 말이 없고 아이 셋이 뚫어져라 제 애비를 살피는데

“그래, 그년은 우쨌능교?”

“우짜기는? 본서방 따라갔지.”

“자알 논다. 거기 인간이요, 인두껍을 쓴 사람이 할 짓이요?”

“시끄럽다! 니는 그래도 노름빚에 다른 놈 수중에 넘어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라.”

“...”

아무리 노름에 미쳤다지만 생각할수록 기가 찬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게 제 자식을 넷이나 오롱조롱 달고 있는 조강지처에게 할 말이나 되는가. 잔뜩 화가 치민 작은님이가

“그래 노름빚에 넘어온 너무 기집하고 그짓 하이 재밌등교? 조강지처 눈물 내고 네 자식이 자는 방서 그 정신이 있던기요? 그년의 조갑지에 금테를 둘렀등교? 꿀이 줄줄 나오등교?”

“이년이 미쳤나?”

“화가 치민 조서방이 뺨이라도 칠 듯이 쳐다보는데

“칠라면 치소! 옛말에 노름쟁이 돈 다 꼴면 마누라 친다더니 칠라카면 쳐 보이소!”

“뭐라!”

작은님이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철썩 뺨에서 불이 났다. 아이 셋이 와아 울음을 터뜨리며 어미에게 매달리는 것이 더욱 불을 질렀다. 매달리는 아이를 연신 밀어내면서 다시 조 서방의 커다란 주먹이 작은님이의 관자놀이를 강타하더니

“씨발, 니카는 인자 끝이다. 죽든지 살든지 니 신세 니 알아서 해라. 세상에 마누가가 저렇게 재수 없으니 우째 끗발이 나겠노?”

휘적휘적 울 밖으로 걸어 나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 일을 우짜꼬? 도대체 우째 해야되겠노?”

방바닥이 꺼지라 한숨을 쉬던 호방댁이

“우선 얼라들하고 밥이나 무라.”

부엌데기할머니가 쪽문으로 들여보내는 밥상을 당겨 밥과 김치들을 올려놓으며

“알라는 이리 주고 니도 어서 먹어라. 에미가 무야 알라 묵을 젖이 나오지.”

막내를 받아 들여다보더니

“세상에 엄첩기도 해라. 묵니 굶니 그 분탕 속에 우째 이래 곱기 컸노?”

우루루 까꿍, 어르기 시작하는데 밥상에 달라붙은 아이 셋이 아귀아귀 밥을 퍼먹는 형상이 여덟 살, 여섯 살 둘은 물론이고 네 살짜리 조차 어른 한 몫은 먹는 폭이었다. 그렇게 네 모녀가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아이들은 물러나 실실 졸기 시작하고 어미는 막내를 받아 젖을 먹이는데 호방댁은 혼자 골똘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 아비가 노름꾼이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외가가 언양읍에선 밥술께나 뜨는 집인데 생때 같은 외손녀들을 굶겨죽인다는 것도 말이 아닌 것이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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