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4·2언양장날 독립만세 ④마침내 고향에 전답을
다시 배를 타기로 작정하고 통영의 사량도, 남해의 미조항을 거쳐 어느덧 고흥의 녹동항과 나로도항을 거쳐 마침내 새우처럼 마디마디 굽어진 섬 손죽도에 정착하여 내리 삼년을 보낸 것이었다.
거문도 큰 산에 실안개가 걸리면
손죽도 부삽엔 복가리 속이 걸리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삼각산 몰랑에 비오나 마나
어린 낭군 품안에 잠자나 마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허어 이 사람아, 인자 그만 나오소. 오늘도 일, 내일도 일인데 해 떨이지면 금방 나오는 거지.”
벌써 일을 마치고 논둑에 나와 발을 씻는 새뜰양반과 부뜰이아버지의 그림자가 노간주나무처럼 길쭉하게 논배미위로 어른거렸다. 백 발도 더 넘는 긴 고랑의 한가운데서도 기출이는 여전히 지심을 맨다고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 그놈의 손죽도아리랑은 입에 달고서. 아마도 저 긴 골을 기어이 마저 매고 나올 모양이었다.
“어차피 내일도 할 일이라면 굳이 그럴 것도 없는 일인데. 하여간 사람은 참 진국이야, 진국”
새뜰양반은 또 다시 논배미속의 기출이를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신식연애는 솔방울연애
바람만 불어도 뚝 떨어진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오랍씨 장가는 후년에 가고
검엉소 팔아서 날 여워 주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호박은 늙어도 단맛이 있는데
사람은 늙어도 단맛이 없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사람 사는 세상치고 어느 하늘 밑이라고 별다를 건가. 손죽도 역시 낮선 곳에서 흘러온 회창회창 키가 크고 눈빛이 깊숙하고 숯이 많은 새까만 머리채에 낭창낭창 걸음걸이가 사뿐한 객지총각을 그냥 둘 것인가.
그저 일이나 시키려는 선주와 선장과는 달리 같이 그물을 당기는 어부들은 <어차피 뱃놈의 거시기는 한 놈의 거시기>이라고 사나흘 또는 보름이나 한 달이 걸리는 어로를 마치고 포구에 들면 술집으로, 작부집으로 그를 끌었고 그 작부들이나 주막집의 아낙이나 섬 처녀들도 은근히 사람 좋아 보이는 이 낯선 총각을 힐끔거리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출이가 한참이나 달라져 그 단단하기가 몽돌 같았다. 벌써 몇 년이었던가. 객지로 떠돈 지가 벌써 십년이 넘었건만 크게 번 돈도 없었고 그마저 고향이라고 돌아가면 이리저리 본채도 없이 날아가고 없었으니 참으로 허무하고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러다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맘속에 품었던 외삼촌 곰쇠처럼 초가삼간 집을 짓고 여남은 마지기 논밭을 갈며 한 대여섯 자식을 키우면서 일찍 남편을 여의고 오남매를 키우느라 허리가 구부정해진 어머니도 봉양할 꿈을 이루기가 힘들 것만 같았다.
고깃배가 포구에 닻을 내리면 그는 정해진 식사와 막걸리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숙소에서 잠만 자고 작부집이나 노름방에는 얼씬도 않았다. 파도나 강풍으로 배가 낯선 곳에서 며칠 출항을 못하면 여기저기 언덕이나 야산을 떠돌다 갓이나 시금치, 마늘밭을 매주기도 하고 못자리의 피를 뽑아주기도 했다.
특히 눈이 밝은 그는 아직 어린 묘판의 아주 가는 피를 뽑는데 능해 반농반어(半農半漁 )얼마 안 되는 좁은 논을 건성으로 부치는 섬 농부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아직 손가락 만한 길이의 모 틈에서 가는 바람에 나부끼는 연두 빛의 조그만 피를 뽑아내는 사람을 섬 안에서는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섬의 온갖 사람들을 만나며 고향 언양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음식과 낮선 사투리를 배우고 상여가 나가는 행렬이나 굿판에 끼기도 하면서 상여가를 비롯한 육자배기도 배우고 전라도식 욕지거리도 배웠다.
그렇게 소흑산도, 대흑산도의 조기파시를 비롯한 변산반도, 태안반도를 지나 연평도까지 드나들며 몇 해를 보낸 어느 날 목포항에서 며칠을 묵새기는데 하루는 어느 술집에서 평범한 여염집의 한 사내와 일본도를 찬 순사가 서로 어울리며 술을 마시면서 서로가 너무나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후 길가는 순사나 그런 순사를 보는 행인들을 살펴보니 너무나 서로 편안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조심조심 물어보니 지금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는 문화시책이 대세라 조선인에 대한 핍박이 많이 누그러지고 반도로 나오는 내지인도 많지만 일본 내지로 들어가 공부를 하거나 터를 잡고 사는 조선 사람도 많다는 것이었다.
한술 더 떠 기미년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피신한 사람들을 지금도 혈안이 되어 잡으러 다니는지 물어보니 근래는 그런 일을 목도하거나 그런 말을 들어본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새삼 세 번째로 고향을 떠나온 후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부산에서 하단으로, 하단에서 김해대저로, 대저에서 통영 사량도, 사량도에서 다시 고흥 녹동과 나로도항, 다시 손죽도, 그리고 목포와 흑산도와 연평도. 그 긴 방황처럼 또 물길처럼 세월도 벌써 다섯 해가 훌쩍 넘어 여섯 해로 접어들고 있었다. 손죽도로 돌아와 그간에 모은 돈을 챙긴 그는 짐을 꾸리고 목포항을 향했다. 보다 큰 배를 얻어 타고 부산, 아니 고향 언양땅을 밟기 위해서였다.
영개 덩개 방게 방간에 등게
무려 여섯 해. 나이 열일곱 첫봄에 고향을 떠나 스물세 살의 장정이 되어 돌아온 싸늘한 장터골목에는 먼지와 지푸라기를 말아 올려 남천내로 몰고 올라가는 소쿠리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초겨울 노란 햇살도 중간, 중간 흙으로 이갠 돌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집집이 동지팥죽을 쑤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자 아이들은 저마다 바깥 장, 안 장터를 내달리며 술래를 잡고 깡통을 차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지개 짜자 똥짜자 미지개 짜자 똥짜자
예나 지금이나 겨울철엔 한줄기의 햇살이 머무는 남향의 바람기 없는 담벼락이 최고의 명당인지라 마른버짐, 소버짐으로 머리털이 벗겨지거나 얼굴이 푸석푸석한 여남은 사내아이들이 연신 코를 훌쩍이다 이미 반질반질한 소매 끝에 코를 닦으며 열심히 좌로, 우로 옆의 아이를 밀며 자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서슬에 옆으로 튕겨난 아이가 양쪽으로 미느라고 생긴 중앙의 빈자리에 재빨리 끼이면 다시 좌우로 밀기를 계속했다.
알굼삼삼 꼼보야, 콩밭에 눕어라!
골목 끝에서 아이 하나를 업고 또 한 명의 동생을 거느린 곰보계집애에게 사내아이 하나가 머리끄덩이를 슬쩍 잡아당기고는 부리나케 골목길로 도망쳤다. 그 사내아이가 도망친 장터골목을 조심스레 걸어 솜집 앞에 도착한 기출이가
“아재요, 아재-”
조심스레 문을 열자
“아이고, 이기 누고? 기출이 아이가? 어서 온나. 내 기다린 지가 함매 얼마라꼬.”
반색을 하며 품을 벌렸다. 이제 언양바닥에도 기출이를 찾거나 잡으러 다니는 순사는 아무도 없어진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이었다.
... ...
언니는 좋겠네 언니는 좋겠네
우리 형부 코가 커서 언니는 좋겠네
오빠는 좋겠네 오빠는 좋겠네
우리 올케 입이 커서 오빠는 좋겠네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집의 첫날밤에 기출이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생뚱맞은 소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새 선출이형님이 장가를 들어 벌써 세 살짜리 딸 하나와 이제 백일이 갓 지난 사내아이 남매를 두고 있었다.
아직 어린 그 조카들 때문에 시끄러운 것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문제는 처음 보는 형수 때문이었다. 형수는 동문 밖 마흘동네에 사는 처녀로 기출이와 동갑으로 더러 면식이 있는 처녀였다.
그러니까 기미년 언양장터 만세사건으로 기출이가 어디론가 멀리 몸을 피한 후 다섯 남매를 낳아 딸 하나는 무단히 흠이 있는 처녀로 지목되어 지지리도 가난한 집구석에 시집을 가고는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렵고 제일 씩씩하던 가운데 두 아들도 비명횡사한 데다 그나마 가장 싹싹하고 부지런하여 어미의 낙이자 밥줄이 되던 막내기출이 마저 어디로 떠났는지 언제 돌아올 지 기약마저 없는 처지가 되자 서촌댁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은 굳이 기출이가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재출이, 또출이가 급하면 급한 데로 우선 어미가 먹고 살 양식도 들고 오고 또 게을러빠진 선출이 대신 대추나무진 서마지기 논도 이리저리 경작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잘 해야 한 해 두어 섬 날까말까 한 그 논마저 만날 방구들만 지고 누운 선출이가 손도 얄랑 안 하고 그냥 묵힐 것이 빤한 판이라 어떻게든 농사를 지을 일꾼삼아 실한 며느리를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출이가 벌써 나이 스물다섯이나 되었고 마침 큰돈은 아니지만 기출이가 주고 간 돈도 약간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서촌댁의 기대와는 달리 좀체 딸을 주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집안이 좋고 배우기를 했나, 논밭전지가 넓은가, 키가 크고 인물이 좋은가,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배운 기술이라도 있는가, 아무 것도 갖춘 것이 없어 시집이라고 가고나면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을 것이 불을 보듯 빤하니 거기다 또 약골에 게으르기가 한이 없어 사시사철 구들장만 지고 누운 게으름뱅이 어중개비에게 누가 선뜻 딸을 내어줄 것인가? 거기다가 키가 팔대장승만 한 홀어미의 시집살이까지...
그렇게 며느릿감 찾기를 삼년, 마침내 찾아낸 인연은 남천내 강 하나를 마주 한 마흘동네의 심씨네 규수였는데 무심히 보면 중키에 수더분한 외모의 보통처녀였다. 그러나 나이 스물두 살이나 되는 그 처녀는 평소 얼굴을 들거나 눈을 크게 뜨거나 잘 웃지도 않고 어쩐지 풀이 죽고 맥이 빠진 그런 모양새였다. 처녀 때도 그랬겠지만 무엇 하나 자신이 알아서 하려고 않았고 그냥 시키는 일만 겨우겨우 시늉을 내었고 어떻게 하자거나 잘잘못을 따지거나 묻거나 성내는 일조차 잘 없었다. 그냥 그림자처럼 조용조용 사는 언양말로 민사 달기가 없다고도 하고 질정이 없다고도 하는 그런 처녀였다.
기출이가 본가에 돌아온 첫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와 인사를 마지고 아랫목에 구들장을 지고 누웠을 형을 찾는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형이 먼저 예의 그 반들거리는 눈빛으로
“기출이 왔나?”
마루를 내려오고 있었다.
“예, 형님.”
하고 다가서던 기출이가 멈칫했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린 아낙하나가 조그만 계집애의 손을 잡고 나오는 것이었다.
“인사해라. 니 성수다.”
서촌댁의 말에 절을 꾸뻑하고 처음 보는 조카를 안아보려고 팔을 벌리자 멈칫멈칫 다가오던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제 어미 뒤로 숨어버렸다.
저녁상을 물리고 여섯이나 되는 가족이 몇 한데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갓난애와 누나가 차례로 잠이 들자 선출이형 내외도 자기네가 거처하는 뒷방으로 건너갔다. 명색 서향의 삼간겹집이지만 가운데 좁은 마루를 중심으로 오른 쪽은 부엌이고 뒤쪽은 서촌댁이 거처하는 안방이고 왼쪽의 길쭉한 방을 가로질러 얇은 벽을 치고 앞쪽은 앞방, 뒤쪽은 뒷방으로 부르고 있었다.
서촌댁은 오랜만에 막내아들과 같이 자고 싶은 눈치였지만 기출이는 형이 물러나자 자기도 서둘러 앞방에 요를 깔았다. 이부자리를 꺼내주던 서촌댁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기출이는 눈치 채지 못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본가에서 편안하게 드러누워 한껏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기출이가 멈칫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뒷방에서 금방 자지러지는 아낙의 교성이 벽을 넘어 들려오는 것이었다. 순간 기출이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매를 맞고 번 돈에 머슴을 살고 고깃배를 타고 숯을 굽고 심지어 감포에서 생선을 떼다 언양장바닥에서 번 돈을 어머니에게 주고 갔고 그 돈으로 형이 장가를 들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니 만 번 다행한 일이었다. 이제 곧 저 숨넘어가는 소리도 잠잠해질 터이니 그러면 앞방, 뒷방과 안방의 어머니까지 여섯 식구가 고이 잠이 들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자지러지던 숨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기를 반복했고 뭐라고 조심조심 낮게 속삭이는 형의 목소리와는 달리 형수는 낮에 본 수더분한 모습과는 판이하게 아야, 지야, 뭐라 뭐라 앓으며 있는 대로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신음소리와 이불 들척이는 소리가 뚝 그쳤다. 뭔가 눈치를 채고 일부러 멈춘 것 같았다. 기출이도 숨을 멈추자 한참 뒤에 다시 건넌방에는 다시 아야, 지야 소리와 함께 질척질척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이제 기출이가 잠이 든 줄 알았는지 아예 외고, 펴고 분탕질이 한창이었다.
견디지 못한 기출이가 살금살금 안방으로 건너갔다. 서촌댁도 아직 잠이 들지 않은 모양으로 소리 없이 이불한쪽 귀퉁이를 열어주고 베개를 밀어주었다. 그런데 안방에 누웠어도 소리만 좀 작았지 들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방이 넓어 희뿌옇게 달빛이 새어든 천장의 얼룩덜룩한 어둠으로 뒷방의 두 남녀가 달리고 굴리고 되받아치는 온갖 요분질이 얼룩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듣기가 더 민망한 일이라 다시 앞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둘러쓰고 누웠는데 한참동안이나 더 계속되던 소리가 멎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튿날 눈이 벌개져서 밥상을 받는 기출이를 보며 서촌댁은 혀를 끌끌 찼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하지 못했다. 반찬도 없는 밥을 대충 비벼서 넘기고 후룩후룩 숭늉을 마시던 기출이는 새삼 형과 형수를 쳐다보기가 여러 번이었다. 그 조그만 덩치 어디에 그만한 힘이 있었던지 선출이형은 여닫이문 밖이 희부옇게 새기도 전 또 다시 형수를 괴롭히기 시작한 모양으로 다시 그 고약한 괴성이 벽을 넘어와 기출이는 신새벽부터 측간에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형수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제 방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아침상을 물리고 일찌감치 집을 나서는 기출이를 보고 서촌댁이 어디 가느냐고 묻자 기출이는 얼마 안 되기는 하지만 그간 벌어온 돈으로 밭떼기나 좀 사려고 소캐집에 간다면서 사립문을 나섰다. 그러다 이내 홱 되돌아서 들어오더니 어머니를 향해
“세상에, 하루이틀도 아이고, 어무이는 잠을 우째 자능교? 나는 당장 오늘 밤부터 따로 거처할 방을 구해야겠심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날 기출이는 가끔씩 읍내의 가옥이나 주변마을의 전답과 임야, 묏자리를 거간하기도 하는 솜집아저씨를 통하여 진장만디에 400평이 좀 넘는 밭 두 마지기를 샀다. 이게 실로 얼마 만에 가져보는 자신의 땅인가. 비록 대추나무진 서마지기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선대인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데다 정작은 아버지가 아닌 외삼촌이 외할아버지 지리산 왕포수가 호랑이와 반달가슴곰을 잡아 호피와 웅담을 팔아서 산 논이었고 그마저 여덟 식구의 양식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새로 장만한 400평이 넘는 밭이면 우선 김장을 할 무, 배추와 고추마늘을 심을 수 있고 된장, 간장을 담고 콩나물을 놓고 동지팥죽과 떡고물로 쓸 흰콩과 파란 콩에 팥을 심을 수도 있고 감자나 고구마를 심으면 늘 달랑거리는 양식마련에도 큰 보탬이 되어 늦은 봄의 보릿고개를 넘기기에도 한결 나을 것이었다.
굳이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새로 사는 황토밭이 어디쯤이며 토질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아는 기출이었지만 굳이 매사 확실히 하는 것이 좋다며 밭주인과 거간인 솜집아재와 셋이서 진장밭을 둘러보던 그의 눈이 번쩍했다.
갑자기 기출이의 가슴을 뛰게 한 것, 아니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한 것은 마침 그 밭이 맨 꼭대기에 있는 바람에 주위에 무덤이 듬성듬성 자리 잡은 야산이 제법 넓게 펼쳐져 시간만 난다면 몇 십 평 정도는 개간을 하여 땅을 넓힐 수도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 흥정도 비교적 수월한 것이 그 땅을 파는 같은 마을의 박첨지가 비교적 넓은 땅을 가진 중농인 데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갓난애를 비롯한 3형제를 키우는 며느리가 폐병이 들어 돈이 급했지만 워낙 빈촌인 관계로 평소 논밭을 사고파는 거래도, 논밭을 사들일 돈을 가진 사람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 살 사람이 나선지라 별 까탈을 부리지 않고 거래가 성립된 것이었다.
이제 읍에 들어가서 장터거리의 주막집에서 땅을 판 박첨지의 섭섭한 마음도 위로하고 중간에서 애를 쓴 솜집아재에게 복비도 드릴 겸 진장에서 봉당골과 덕천고개를 거쳐 남천내다리를 향하던 중이었다. 덕천고개를 내려오던 중간지점에서 문득 솜집아재가 걸음을 멈추었다.
“기출이자네, 저기 오른 쪽의 들은치기 논을 좀 보아. 한 백오십 평은 되겠제? 또 저 아래쪽 산그늘에 있는 논도가리도 좀 보게. 저 두 곳이 원래 길쭉하게 생긴 닷 마지기였는데 신작로가 나면서 편입된 부분을 빼고 나니 저렇게 엉뚱한 꼴로 서로 떨어지게 된 것이지. 또 원래 물이 귀한 봉답인 데다가 훌쩡서리질 하기도 어려워 농사를 짓다말다를 하고 있지. 그래서 땅을 내어 논 지 몇 년이 되어도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지. 만약 자네에게 약간의 돈이 남았다면 그것도 마저 사버리게. 비록 당장 큰 소출은 못 보지만 자네가 나이가 좀 들고난 뒤라든지 아니면 자네 자손 대에라도 저 신작로 옆에 건물이나 저자가 들어서면 큰돈이 될 수도 있는 땅이라네. 비록 그냥 묻어두더라도 언젠가는 큰돈이 된단 말이지.”
그렇게 권하는 바람에 주막집에 주인을 불러 바로 논문서를 주고받았다. 엉겁결에 무려 세 필지, 700평이 넘는 전답을 마련한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서촌댁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당일로 세 필지의 땅을 둘러보고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비록 자식이 매를 맞고 타향을 전전하며 벌어온 돈으로 산 땅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언양땅에 발을 붙인, 아니 뿌리를 내리게 된 심정이었다. 그러나 선출이는 아우가 땅을 샀다는 말에도 눈만 한 번 반짝하더니 더 이상 말도 없고 가보지도 않았다. 지금 부치는 대추나무진 세 마지기만 해도 여자의 몸으로 벅찬 서촌댁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야 한 해 한두 번 나가보고 건성으로 몇 번 낫질, 삽질을 하다 죽을상을 하고 돌아오는 처지에 새로 700평이 넘는 땅을 샀다는 것이 그리 반가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냘 저녁이었다. 기출이가 오늘 저녁은 어디서 자야할지 차라리 동갑짜리 동네 친구나 외갓집 곰쇠네로 가서 잘까 망설이는데
“야야, 봐라.”
서촌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니 돈 남은 거 없나? 있으문 나락 한 섬 값을 니 새이에게 장려로 놓아라. 내 오랜만에 집에 온 니한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실은 이집에 양식이 달랑달랑해서 며칠 지나면 솥을 달아매고 곱다시 굶어야 될 판이다. 다 늙은 내나 니 성이나 성수는 그렇다 치고 저 어린 알라들이 무슨 죄가 있노? 가뜩이나 젖도 모자라고 또 근기도 없는 물젖인데 쌀이 있어야 암죽이라도 끓이 믹일 것이 아잉가?”
민망해서 차마 눈을 못 맞추는데 정작 당사자인 선출이는 눈짓으로 제 아내를 불러 슬그머니 뒷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장려쌀이라니? 그럼 부모자식간에, 아니 형제간에 나락을 빌리 주고 이자 쳐서 받는단 말잉교?”
“안 그라문 우짜겠노? 이 마실에서 날마다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지내는 니 새이보고 장려쌀 줄 사람이 누구 있겠노? 천 날 만 날 니 외갓집신세 지는 것도 할 짓이 아이다. 나는 우리 오라버니는 그렇다 치고 올케새이 볼 낫이 없어 죽을 지경이다, 맨날.”
“그라문 이적지는 우째 살았능교? 뭐 묵고 살았단 말잉교?”
“첨에는 괜찮았지. 할 말은 아이지만 니 중간에 새이 재출이, 또출이가 그렇게 갑자기 비명횡사하고 니까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선출이와 나 단 두 식구가 남자 그것도 죽을 모퉁이 옆에 살 모퉁이라고 늘 달랑거리던 양석이 남아돌더란 말이지. 대추나무진 서마지기에서 나는 나락 석 섬을 반은 보리로 바꾸어 먹으면 양석이 걱정 없어 겨울이나 봄을 나기도 걱정 없고 니 아부지제사나 명절에는 술도 담고 떡도 할 정도였지. 그래서 조금씩 남긴 나락과 니가 가면서 준 돈 몇 푼으로 니 새이 장개를 보냈다 아이가. 니 형수도 그 집에 가면 밥은 안 굶는다고 왔지. 그런데 사람 입 하나가 범보다 무섭다 카더니 니 형수가 오자 그만 양식이 달랑달랑 하더니 애가 둘이나 생기자 택도 없이 모자라는 기라. 그래서 작년에는 기와집에서 장려 쌀을 한 가마 빌려먹고 올 가을에 이자 부쳐 일곱 말 닷 되를 주고 나니 이건 뭐 새빠지게 농사지어 말짱 헛것이 아잉가 말이다.”
“그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큰새이가 장려 쌀을 묵으면 갚을 수는 있능교? 서 마지기 농사지어봤자 양석도 모자라는 판에 저렇게 사시사철 구들만 지고 누워 뭐로 갚는단 말잉교?”
“그라문 우짜겠노? 니 새이, 성수 조카들 굶어죽는 꼴 보는 것 보다는 못 받을 돈, 아니 쪼깨 받기 힘든 장려쌀이지만 그래도 한번 기다려보는 기 안 낫겠나? 또 니 새이식구가 굶는데 이 애민들 목구멍에 넘어갈 끼 있겠나? 그마 니 에미 믹이 살린다고 생각해라.”
“...”
하는 수 없이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 쌀 한 가마니 값을 내어주었다. 내년엔 새로 산 밭과 논에서 약간의 나락이나 보리가 나온다면 어쩌면 밥걱정은 없을지 몰랐다. 새로 땅을 사면서 나락이 나오면 장려를 놓아 그걸 모아 다시 땅을 넓히려던 그의 꿈이 허사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 어머니랑 형의 식구가 먹고살기가 힘든 판에 제 몫이라고 따로 떼어 다른 집에 장려 쌀을 놓을 수가 있을 것인가?
이미 너무 저물어 다른 집에 자러가기도 그렇고 해서 혀를 끌끌 차며 앞방에 이불을 펴는 데 아닐까 다를까 뒷방에서는 유독 게을러빠진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부지런히 아이를 만드는 소리가 철벅거리면서 방금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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