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0)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7장 4·2 언양장날 독립만세 ①근수도령

이득수 승인 2022.01.28 18:18 | 최종 수정 2022.02.02 11:51 의견 0

7. 4·2 언양장날 독립만세 ①근수도령
 
 저승차사 뒤를 따라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문밖으로 썩 나서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곡소리가 진동하네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삼혼칠백 흩어지고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육신만을 남겼더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겉 매끼도 일곱 매끼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속 매끼도 일곱 매끼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이칠십사 열네 매끼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소렴대렴 마치더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입관성복 마친 후에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설흔서이 상도꾼에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요롱소리 발을 맞춰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회심곡을 부르면서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북망산천 떠나가네.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회심곡을 부르면서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북망산천 떠나가네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슬프고도 슬프도다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인생의 한 평생이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이다지도 허무하리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평소에 늘 초롱초롱 총기가 있고 웬만해선 대낮에 꾸뻑거리거나 낮잠이라고는 자본 일도 없었는데 오늘은 왜 이리 몸이 깔아지고 꾸벅꾸벅 졸리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기출이는 여전히 눈을 반쯤 감고 꿈속을 해매고 있었다. 

그러면서 네다섯 살 때쯤 큰누나 귀남이의 등에 업혀서 본 알록달록 붉고 푸른 꽃상여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어느 여름날 처마 끝에 엄청 굵은 빗줄기가 온종일을 내리던 컴컴한 오후의 기억과 그러다 문득 날이 개이면 뒤란의 텃밭에 무섭도록 붉고 우둘투둘해 마치 닭 벼슬 같이 생긴 찰남생이(天南星)꽃과 늙은 감나무가지 사이에 널따랗게 친 거미줄이 섬뜩하게 그의 의식을 포박하는 것이었다. 그 바라보기만 해도 무섭고 불길하던 시꺼먼 왕거미의 잔상처럼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유독 눈부시게 반짝이며 그의 등줄기를 스멀스멀 타고 내리는 것이 들을 때마다 사람의 혼을 빼 끝없이 허망해지는 상여노래와 요롱소리와 상주들의 흐느낌 속에 마치 풀밭에서 금방 튀어나온 붉디붉은 꽃뱀처럼 꿈틀거리며 떠올라 그의 의식을 칭칭 동여매는 것이 바로 꽃상여의 기억이었다.
 
세상에 어지럽도록 눈이 부신 것이 어디 꽃상여뿐이랴? 새봄의 논두렁을 반은 붉고 반은 하얀 꽃잎과 초록 이파리로 얽히고설키고 갈라지면서 한낮의 아지랑이보다 더 어지럽게  다가오던 화려한 풀씨꽃 자운영(紫雲英)도 그렇고 아침이슬이 맺힌 새파란 잎사귀 사이로 선연하게도 붉은 복숭아, 또 사내들의 등줄기를 집요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은 현란한 자주 빛의 복숭아꽃, 오죽 요염하면 복숭아꽃처럼 붉거나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볼로 세상 사내들의 얼을 빼놓고 신세를 망치는 계집들을 도화살(桃花煞)이라고 하였으랴.

또 있었다. 해질녘의 우물가에 한들거리는 앵두꽃 사이로 도둑고양이가 장독간을 타 넘든 시꺼먼 어둠속의 무섬기와 빨갛게 선홍색으로 피어나 차츰 분홍에서 연분홍에서 다시 목매죽은 여자의 입술처럼 허옇게 흐려지는 붉고 퇴색한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땅바닥을 하얗게 빛이 바랜 살구꽃과 도랑둑을 따라 하얗게 나부끼다 도랑물 가득 떠내려가던 찔레꽃...

그의 눈앞에 딸만 일곱을 낳고 평생을 아들 못 낳는다는 시부모와 시누이들의 괄시에 눈물마를 날이 없이 이집 저집 딸네 집을 전전하다 버든의 막내딸 집에서 눈을 감은 저 들내인가 어디가 집이라는 여든 살 난 노파의 꽃상여를 보면서 불과 다섯의 젖비린내 나는 기출이가 귀남이 누나의 등에 업혀 바라보던 일이 생각났다. 일곱 딸들의 온갖 넋두리와 행상의 앞머리에 올라타고 요롱을 절렁절렁 흔들며 선창을 하던 선소리꾼과 열 명도 넘는 상두꾼들의 후렴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을 따라서 중얼거리다 나이도 어린 것이 청승맞다는 소리와 함께 굴밤을 먹이던 텁석부리 외삼촌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기출이는 그는 아직 채 자라기도 전에 강원도와 경상북도, 남해와 서해의 크고 작은 섬과 증도의 소금밭을 떠돌면서 이상하게도 상여가 나가는 소리나 꽃상여를 보게 되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떼지 못 하고 뚫어지라 바라보며 흥얼흥얼 따라 부르더니 마침내 별별 곳의 상여소리를 거의 다 외울 지경이 된 것이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나이에. 그것도 지난 해 창대 같은 젊은 목숨 재출이, 또출이 두 형을 보내면서 애달픈 눈빛과 청승이 가득한 가락으로.

ⓒ서상균

갑자기 목덜미가 섬뜩한 느낌에 기출이가 가늘게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떡집과 팥죽집 앞에 옹기 굴에서 접시를 말듯 흙먼지와 지푸라기를 돌돌 말아 올린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막걸리와 국밥을 파는 술집의 낮은 울타리를 지나 다시 한 번 솜씨 좋은 상쇠가 쇠를 치듯 비스듬한 각을 세워 뱅그르르 돌며 온갖 잡동사니 한 뭉텅이를 기출이네 어물좌판에 쏟아놓았다.

깜짝 놀라 궤짝뚜껑을 발로 덮으려고 하는데

“기출아, 기출아, 니 기출이 맞제?”

누가 어깨를 툭 쳤다.

“... 어어, 어어, 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뭇대던 그가

“맞다. 거, 근수도령이제? 뒷집 석암선생님 장 손자.”
“그래 맞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이까 기출이 니도 많이 컸구나. 장골이가 다 되었구나.”
“그 기 무슨 말이고? 아만 상놈이라 캐도 내가 니 보다 나이 두 살 많은데.”
“그렇구나? 그라면 기출이 새이야!”

비록 사립문이 기출이네는 서쪽 앞 세메를 향하고 근수도령, 그러니까 석암선생댁은 동쪽으로 동사가 있는 복걸을 향해있지만 집터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어 호박이나 구기자덩굴이 서로 담을 넘어 엉키고 감나무, 살구나무가지가 담을 넘어 남의 집에 열매를 떨굴 정도로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넓고 윤택한 근수도령집과 늘 한미하고 적적한 기출이네는 피차 서로 이 말 저 말 주고받으며 살갑게 지낼 처지도 아닌데다 마주 쳐다보기조차도 겁이 나는 석암선생과 먼빛이라도 눈이 마주칠까봐 기출이가 늘 조심하는 바람에 이웃은 이웃이라도 좀체 마주치지도 않는 생소한 얼굴이기도 했다.

그 근수도령은 늘 은인자중 조신한 석암선생과는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동성이 강해 상북면 이불마을의 이(李)씨네, 명촌과 천전의 김(金)씨네를 비롯하여 궁근정과 능산의 성(成)씨, 정(鄭)씨에 이르기까지 토박이부자마을의 울분에 찬 젊은이들이나 나이 지긋한 선비들을 방문하며 나라 잃은 서러움과 어서 왜놈을 몰아내고 자주조선, 아니 대한제국의 영광과 주권을 되찾으려는 청년운동에 앞장서 늘 왜놈순사의 표적이 되어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고 보니 근수도령은 옆구리에 무겁도록 두툼한 자루 둘을 들고 있었다.

“그거 뭐꼬? 심들면 내가 미다 주까?”
“아이다, 그보다 새이 니 말이다...”

방금 자기가 자루를 들고 나온 장국밥집을 흘낏흘낏 살피면서
“니 말이다. 인자 전을 걷고 집에 가거라.”
“와?”
“이따가 장터껄에서 큰 난리가 날 끼다. 장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 주재소의 왜놈순사들이 긴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난리법석이 나면 장바닥이 발칵 뒤집히면 물건도 못 팔고 사람도 다치기 십상인기라.”
“봐라. 장꾼도 장사꾼도 다 만세를 부른다면 나도 만세를 불러야지? 나는 와 조선사람이 아이가?”
“거기 아이라 새이 니는 집에 가서 니 어무이 서촌댁이를 돌봐야 된단 말이다. 가뜩이나 밤톨 같은 두 아들인 니형 재출이와 또출이를 보내고 넋을 놓고 누운 서촌댁이를 니 아이문 누가 돌볼 끼란 말이고? 그렇다고 사시장철 눈만 반들반들 손끝 하나 얄랑거리지 않는 니 생이 선출이가 할 것도 아이고...”
“...”
“그라고 이건 우리 할배 당부말씀잉기라. 희한하게도 우리 할배 석암어른은 기출이 니 일이라면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서 늘 안절부절못하시는데 내가 슬쩍 물어보니 기출이 니 증조부가 둔터에서 소문난 젊은 선비로 향청에서 별감을 지낸 그 유명한  반동선생님으로 우리 할아버지 어릴 적에 가끔 글을 가르쳐준 은사라고 하더라.

그래서 니까지 이리저리 세상풍파에 휩쓸려 니 증조부의 집안이 흩어지거나 대가 끊기면 우리 아버지도 스승 볼 면목이 없는 기라. 알겠제?“

“그래. 아, 알겠다.”

근수도령의 채근에 무심결에 답한 기출이는 방금 들은 자신의 증조부 반동선생님이니 별감은물론 자신의 증조부와 석암선생간이 사제지간이라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대로 전을 걷을까말까 망설이는데 가던 길을 멈춘 근수도령이

“기출이 새이야, 명심해라. 만약 니가 잘못 되면 내가 우리 할아부지한테 시껍묵는단 말이다.”
“아, 알았다.”

대답을 하던 기출이가

“야야, 거 잠깐 있어보소.” 황급히 달려가 짐이 든 자루를 빼앗아 둘러매고
“자, 앞장서라. 짐도 미는 사람이나 미지 신식학생이 함부로 미기에는 힘에 부칠 끼다. 짐은 짐꾼이 미야된다 말이다.”
“안 미조도 된다 캐도 자꼬 그래쌓네. 알았다. 따라오너라.”

이미 반상이 무너졌지만 또 자신이 오히려 더 뼈대 있는 월성이씨지만 왠지 뭔가 캥겨 우대도 하대도 아닌 어중간찰 말 부로 주고받으며 휘적휘적 앞장을 서더니 바깥장터 소전껄 앞에서 

“인 도! 욕받데이.”

짐을 받고

“니는 인자 가거라.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다시 기출이에게 다짐을 받았다.

 

근수도령 말처럼 이대로 전을 걷어야 될까,  정말 난리가 나기는 나는 걸까, 난리가 난다면 당분간은 장도 안서고 물건도 못 팔면 우리 집은 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다문 대구 한 마리, 조기 한 손이라도 더 팔아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리쌀이라도 몇 되 더 사다놓아야겠다며 기출이가 다시 엉거주춤 난전에 앉는데 마침 솜집아재가 찾아와서

“기출아, 니는 전 안 걷나?”
“아재요, 설마 난리가 나기는 나겠능교?”
“글키 말이다. 내사 내 점방이라 문만 잠그면 되지만 니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밟고 가면 물건도 다 베리뿔 끼 아이가?”
“그까짓 껏 이 따위 생물이야 어차피 날짜 지나면 물이 가서도 못 팔 낀데 나는 파는데 까지 팔아볼 끼요.”
“그라든지.”

솜집아재가 돌아가고도 한참이나 상념에 빠진 기출이는 문득 아침에 머리를 감아 빗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한 줌이나 뭉텅 빠지면서 오래 끼어 닳은 은비녀가 머리채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 ...

 어화세상 벗님네야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인생 일장춘몽이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아웅다웅 하지말고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부귀영화 누리소서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북망산천 찾아가서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잔디밭을 이불 삼고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송백나무 울을 삼고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하늘을 지붕 삼아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자는 듯이 누웠으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살은 썩어 물이 되고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뼈는 썩어 흙이 되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사후 청산 일분토라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한 평생을 마친후에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마지막 가는 길이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이다지도 허무하니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인생일생 무상하다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

 

또다시 혼곤히 꿈에 잠긴 기출이가 강원도 어느 산중의 숯쟁이영감이 죽어 나가던 꽃상여와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아 머리에 짚으로 만든 둥근 똬리를 쓰고 서럽게 울던 두 딸들의 울음소리와 그 황망한 와중에서 뭇 사내들의 간장을 태우던 서럽도록 붉은 둘째 딸의 입술과 연지볼을 떠올리고 있는데

“마, 마마 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저 아래 바깥장터에서 목이 꺽꺽 막힌 중년사내의 고함소리를 신호로 어느 새 여러 사람이 합세해 우우하는 함성과 함께 이제 가락을 맞춘 만세소리가 장바닥을 진동하는 것이었다. 이어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바로 턱밑에서 만세소리가 튀어나오더니 우당탕탕! 국밥집마누라와 떡장수아지매, 팥죽장사할머니가 튀어나오고 장작집, 숯집, 육고간사내도 뒤를 잇고 대장간의 텁썩부리영감도 뒤뚱뒤뚱 뒤를 따르며 장터골목의 온갖 장꾼과 장돌뱅이들이 만세, 만세를 외치며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국밥집여자는 바쁘게 달려가는 와중에서도 부지런히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만세, 만세!”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따라가던 기출이는 바깥장터 입구에서 방금 자기가 메다준 자루에서 태극기과 종이쪽을 꺼내주는 근수도령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대신 매어다 준 그 자루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이라는 종잇조각이  들어있었던 것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두루마기를 입고 짧은 갓을 쓴 청년하나가 소전거리의 국밥집마루에 올라서서 무언가를 읽고 주먹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를 하며 같이 주먹을 쳐들거나 만세를 불렀다. 그게 바로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문이라는 것인 모양이었다.

“만세, 만만세!”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
“쪽발이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흥분한 군중들이 나름대로 고함을 지르자 온 장바닥이 아수라장이 되어 마루위에서 독립선언문을 읽는 선비도 자주 낭독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다시 목소리를 맞춘 군중들이

“만세, 대한독립만세!”

를 외쳐대면 말뚝에 묶어둔 소들도 흥분해 움메, 움메! 울었고 그 사이사이에 송아지들이 겅중겅중 뛰고 달리자 꼬꼬댁! 암탉이 울고 병아리가 삐약대니 여기저기 수탉들이 때 아닌 한낮에 날개를 푸득거리며 길게 목을 빼기 시작하고 염소전의 염소들도 음매애애... 길게 울었다. 흥분과 환호성으로 가득차기는 했지만 짐승도 사람도 모두 길길이 뛰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마침내 독립선언문낭독이 끝나고 만세삼창을 하고 난 뒤에

“왜놈들은 물러가라!”
“왜놈들은 물러가라!”

아우성을 지르던 군중 틈에서 누가

“쪽바리를 쫓아내자!”

소리를 지르니 일시에 기세가 고조되어 

“쪽바리를 쫓아내자!”
“쪽발이를 쫓아내자!”

두어 번 반복되다 마침내 또 누군가

“주재소로 가자!”

소리치니
“주재소로 가자!”
“주재소로 가자!”

 

봇물처럼 터진 함성과 함께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모두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문 앞의 주재소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