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4)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7장 4·2언양장날 독립만세 ⑤새뜰양반 머슴

이득수 승인 2022.02.02 16:42 | 최종 수정 2022.02.04 11:52 의견 0
ⓒ서상균

7. 4·2언양장날 독립만세 ⑤새뜰양반 머슴 

이미 너무 저물어 다른 집에 자러가기도 그렇고 해서 혀를 끌끌 차며 앞방에 이불을 펴는 데 아닐까 다를까 뒷방에서는 유독 게을러빠진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부지런히 아이를 만드는 소리가 철벅거리면서 방금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디 만큼 강가
당공 멀었네
어디 만큼 강가
당공 멀었네
이랴좌랴 쟁기질
묵은 밭에 따부질
어디만큼 왔나
당공 멀었네
어디 만큼 왔나
당공.....

외갓집의 암소와 쟁기를 빌려 기출이가 새로 산 진장 밭을 갈아엎고 있었다. 날씨가 풀리자마자 우선 감자를 한 백여 평 심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감자 서너 가마니를 캐면 푹푹 찌는 한여름의 장마로 감자가 썩어 들어가기 전까지 식구들의 양식을 반이나 줄일 수가 있을 것이었다. 마침 외삼촌 곰쇠도 기출이가 산 새밭을 구경하느라고 따라 와서

“워따, 자네 훌쩡질 하는 것 처음 보는데 생각보다 훌쩡질을 잘 해버리네. 어디서 다 배웠당가?”

아직도 입에 붙은 전라도사투리로 물었다.

“오며가며 배웠지요. 고깃배도 타고 숯도 굽고 소금도 구웠지만 농가 집에 머슴 산 것도 서너 해가 되지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희안바꾸양한 소리는 어디서 배웠당가? 영판 밭을 갈거나 논을 맬 때 고랑을 세는 소리 같구먼.”
“거기 아이라 없는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기고 부잣집 장려 쌀을 어떻게 갚을까 걱정하는 소리지요. 저기 아마 전라도 고흥인가 완도 어디선가 듣고 배운 것일 낌더.”
“그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참말로 총기도 좋아. 한번 듣고는 당최 이자뿌는 법이 없으니 말이야.”

잠시 멍에를 벗겨 소를 쉬게 하고 오랜만에 숙질간에 막걸리 참을 마주 하고 앉는데

“이보게, 기출이, 기출이!”

솜집 아재가 헐레벌떡 올라왔다.

“자네 거처가 해결되었네. 중남 상천 새뜰에 머슴자리가 났단 말일세.”

 

솜집아재가 일러준 대로 기출이는 장심배기골짜기를 넘어 회나무진에서 징검다리를 건너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조선인 인부를 고용하여 허허벌판 갱빈을 개간하는 뒷벌마을 위의 벌짱을 넘고 마산, 신복을 지나 마침내 새 뜰 마을에 도착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새 뜰 마을은 말이 마을이지 이제 개발이 한창인 허허벌판으로 그 한가운데 동척에서 나온 일본인이 거처하는 커다란 기와집을 중심으로 십리에 하나 오리에 하나 드문드문 조선 사람의 초가집들이 나지막이 박혀있는 형상이었다.

기출이가 알기로 이미 칠팔 년 전에 쪽발이라고 불리는 일본 측량 기사들이 조선청년들을 기용해 붉은 깃발을 들고 이지저리 가게해서 깃발을 세워놓고 요상하게 생긴 물건으로 이리저리 사진을 찍듯 하다가는 하얀 종이에 무엇인가를 끄적거리며 황칠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 이듬해엔가 집집이 자기가 붙이는 논밭의 문서를 면사무소로 가지고 오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투성이들은 먼지 앉은 궤짝을 뒤져 꾸깃꾸깃한 문서들을 들추어 있는 대로 들고 가서 신고를 하고는 농사일이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듬해 설을 쇠고 나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멀쩡하게 잘 부치던 논밭은 물론 집터와 산소가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문서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들이 어쩌다 논마지기를 사도 새로 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옛날부터 내려오던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된 문서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 나거나 한 마을에서 서로 잘 아는 처지에 그런 문서 따위는 주고받을 생각도 않고 땅을 사고팔기가 예사였던 것이었다.

또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온 집터와 문전옥답이나 선산은 당연히 장남의 몫이라 굳이 문서 운운할 이유도 없었고 차남이나 삼남 같은 지차 아들들이 장가들어 분가할 때 본가 가까이 초가삼간을 집고 그저 집 앞 논 몇 마지기에 뒷밭 몇 십 평하는 식으로 물려준 농토역시 부자간에 문서를 작성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 사람이 사는 집터, 문서가 있는 논밭, 누가 보아도 그 집에서 부치는 것으로 인정되는 논밭이나 대대로 무덤을 쓴 선산이 분명한 산들을 제외하고 남은 논밭이나 산지, 못이나 물구덩이, 하천부지 등이 모조리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가버렸다. 눈을 번하게 뜨고 목숨 줄인 논밭을 빼앗겨 곱다시 굶어죽게 생긴 무식꾼들이 항의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바가야로!” 뿐이었고 심하게 항의를 하다간 언양 주재소의 칼찬 순사들에게 실컷 얻어맞을 뿐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저울에 속고 매가리에 속는다>라는 속담이 생겼는데 저울에 속는 것이야 대저울에 돼지를 달거나 고깃간에서 쇠고기를 살 때 더러 당하던 일이었고 싸전에서 쌀장사가 말이나 되에 쌀을 될 때 살 때는 아주 높게 고봉으로 올리고 팔 때는 낙엽이나 지푸라기로 집을 짓듯 슬쩍 올려놓는 시늉을 하다 퍼뜩 내려놓는 식으로 해서 팔 때는 아무리 되를 넉넉히 가져가도 조금씩 모자라고 살 때는 집에 와서 다시 되어보면 또 조금씩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저울에 무게를 속고 되질에 부피를 속은 사람들이 멀쩡한 땅을 뺏긴 일, 그러니까 평평한 땅, 즉 넓이를 속은 것이 바로 매가리에 속은 것으로서 결국 저울에 속고 매가리에 속았다는 것은 이리저리 모조리 다 속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일은 그 매가리란 말이 동척의 초대사장인 매가다란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무식한 농투성이들이 알 턱이 없어 그냥 입에 익은 청어새끼 매가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탈한 토지에 일제(日帝)는 내지의 오갈 데 없는 낭인들을 불러들였다. 명치유신 이전의 옛 사무라이를 비롯한 온갖 떠돌이와 낭인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조선으로 들어와 그렇게 빼앗은 땅에 농장의 간판을 달고 조선인을 고용해 개간을 하거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드넓은 호남평야, 전남평야, 김해평야에는 수만 정보의 평평한 논에서 나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을 싣고 가기 위해 철도를 놓기까지 하면서 그들은 야금야금 조선 땅을 잠식(蠶食)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산이 높고 들이 좁은 언양 일대에서는 간월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급류가 홍수 때마다 엄청난 모래자갈과 함께 장정도 들기 힘들다는 들돌보다 더 큰 돌멩이를 퍼다 부은 회나무진에서 뒷벌마을 사이의 벌짱 일대의 자갈밭 수만 평이 지목되었다. 또 신불산의 두 계곡 들내와 금강골에서 흘러내린 급류가 축시도랑으로 만나는 지점인 상천과 신복사이의 수십만 평 황무지가 집중 개발되고 그중에서도 대번에 일인이 집을 짓고 들어올 정도의 넓은 들에는 신안, 즉 <새 뜰>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길 정도로 갑자기 주변의 가난한 소작농들이 몰려들어 일인관리자의 신임을 얻은 자는 단번에 스무 마지기 쉰 마지기의 소작권을 따내어 졸지에 대농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중 제일 횡재한 사람이 평생 허리 한번 못 펴고 살다 졸지에 쉰 마지기가 넘는 농사를 짓게 된 들내댁 김 서방이었고 다음이 서른 마지기가 넘는 새뜰양반이었다.

 

이제 쉰이 좀 넘은 들내댁 김 노인, 그러니까 들내 김 손은 젊어서 머슴살이를 오래 하면서 농사일과 땔나무를 하느라고 너무 많은 노동, 특히 쟁기질과 지게질이 골병이 들어 그 나이에 어깨가 구부정하고 해소기침을 달고 있어 눈에 총기가 없었다. 겨우 너덧 마지기의 자기 농사도 짓기 힘든 처지에 그렇게 넓은 땅을 얻어낸 데 대해 중남면 일대에서는 요상한 소문이 돌았다. 우선은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 황무지 어름에 방금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에 사는 그들에게 그 지역의 개간을 책임진 사십 전후의 와다나베상이 처음 나타났을 때 겁이 나 덜덜 떨면서 물을 떠주고 밥을 해주며 귀한 닭 한 마리를 잡아 삶아준 데서 신임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표면상의 이유였고 진짜배기 속사정은 따로 있다고 했다. 바로 한번 시집을 갔다가 자식도 낳기 전에 남편이 호열자로 죽어 집구석 망치는 며느리로 몰려 친정으로 쫓겨 온 스물다섯 살의 큰딸이 아직 내지에서 처자식이 오지 않아 혼자 지내는 와다나베상의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는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 덕분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까짓 빨래 좀 해주고 닭 한 마리 고아 먹인다고 그 넓은 땅의 소작권을 줄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가정부로 간 큰 딸이 <보리주면 외 안 주느냐>는 속담처럼 빨래해주고 이불 깔아주면서 뭔들 안 주었겠냐는 소문, 이미 왜놈의 계집이 되어서 베개 밑 송사를 단단한 덕분이라는 소문이 점점 정설로 되어가고 있었다.

ⓒ서상균

그 김 영감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죽은 모 호방네와 같이 위로 딸 넷에 막내아들 하나의 1남 4녀였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이 모 호방네 외아들은 덩치는 크고 말이나 행동거지가 굼뜬 어딘가 조금 부족한 편이라면 김 영감네의 외동아들은 돌이 지나도 고개도 잘 못 들고 열세 살이 되어도 배밀이나 겨우 하는 정도의 배냇병신이었다. 1년 내내 집안에만 박혀있어 온몸이 눈처럼 하얗고 피둥피둥해 <백새>라고 불리기도 했다.

밥걱정도 못 감당하는 사람이 졸지에 왜놈의 눈에 들어 대농이 되고 떵떵거리며 도로 예전의 상전이나 이웃에게 소작을 알선하고 소작에 소작을 주면서 떵떵거리자 사람들은 사람팔자는 시간문제라고 부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저 인간이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선지 저런 형편없는 병신자식을 외아들로 낳았지만 무식한 농사꾼처지에 그 사람 같지도 않은 아이를 그래도 제 새끼 제 출물(出物)이라고 금 쪽같이 애지중지하는 것이 안타깝고 기특해 하늘이 복을 내려 말년에 복을 준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늘 팍팍하면서 또 심술이 많은 우리네 심사가 어디 그렇게 좋게만 남의 말을 할 수가 있으랴?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왜놈의 노리개로 준 큰 딸 덕분이라고, 전쟁이 나면 병정에도 못 나가는 병신자식이 효자가 된다고 요즘 같은 말세에는 소박맞고 쫓겨 와 쪽발이의 콧김이나 쇠는 그런 헤픈 년이 도로 효녀가 된다면서 옛말 그런 것 봤냐며 삐쭉거리기도 했다. 농사일이 한가한 날 머슴들의 초당방이나 중늙은이들의 사랑방에서는 막걸리만 한 두 잔을 걸치면 불그레한 얼굴들이 그 냄새나는 입으로 세상살이 뭐 별게 있나, 그저 새 뜰 김영감처럼 딸을 너덧 낳아서 하나쯤은 부산 공장에도 보내고 또 하나는 읍내 술집에도 보내고 또 하나는 왜놈 첩으로 주면 애먹이는 불출아들 열보다 낫다는 농담 같은 악담들을 쏟아냈다. 그래도 좀 양심이 있는 작자가

“보소, 그 죄 많은 소리 좀 작작 하소. 만약에 당신이 딸 넷에 병신아들이 있는 처지라면 그런 말이 나오겠소?”

힐책하면

“그야 그 많은 딸 중에 하나를 송대 성당이나 석남사 절에 보내 평생을 빌게 하면 되지 않겠소?”

그렇게 다시 낄낄대기를 반복했다.

 

하필 아이들이 이름마저 큰진이, 작은진이, 순진이, 끝진이에 배냇병신아들은 금출이였는데 문제의 그 큰 딸이 큰진이였다. 또 소진이라고도 불리는 둘째 작은진이는 지난해 시집을 가서 기출이는 본 적이 없고 집에는 이제 열아홉의 순진이, 열일곱의 끝진이와 열다섯의 금출이가 있었다.

원래 김 영감의 집은 방이든 부엌이든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지막한 초가삼간으로 가운데 안방을 중심으로 오늘 쪽에는 부엌이, 왼쪽은 작은 방이 있어 딸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출이가 들어가면서 본채 옆에 더 낮고 더 길게 지어 농기구와 곡식을 넣어두는 도장방과 소를 매는 마구간에 돼지 막과 측간을 배치했는데 마침 돼지가 없던 때라 맨 입구의 도장방의 물건을 돼지 막으로 옮기고 급하게 구들을 놓고 장판을 깔아 기거하게 하였지만 저녁마다 천장으로 벽으로 웃풍이 사정없이 들어와 잠을 깨기가 일쑤였다.

 

김 영감이 두 딸들에게 저녁상을 물린 후로는 아래채의 기출이네 방에 얼씬도 못 하게 했지만 두 딸 순진이와 끝진이는 그게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빈방에 누어 뭐라고 중얼중얼 온갖 타령을 읊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아직 마을 밖을 못 나가본 풋 처녀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네들의 눈이 비치는 기출이는 키가 크고 눈빛도 깊으며 농사꾼답지 않게 얼굴도 희고 행동거지도 차분하며 친절하기도 했다. 거기다 저 눈이 깊고 머리채가 여자보다도 더 숱이 많고 검어 삼단 같은 기출이오라비는 벌써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는 물론 조선천지를 안 가본 데가 없고 고기 잡은 어촌, 숯 굽는 산골, 심지어 소금 굽는 염막까지 있어봤다는 것이 태어나서 이 나이까지 맨날 신불산의 품에서 칼바위만 쳐다보고 자란 처녀들로서는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오빠, 자능교? 기출이오빠, 주무시능교?”

삶은 감자나 고구마, 누룽지나 홍시만 있어도 처녀들은 기출이의 방을 찾고 저 먼 바닷가나 산골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기출이는 그들의 형상이, 특히 눈매가 그윽하고 콧마루가 단정한 순진이가 영판 죽은 끝님이만 같아 혼자 깜짝깜짝 놀라면서 되도록 마음을 주지 않고 냉정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그 젊은 살 냄새가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번 기출이의 방에 들어오면 도무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도 안방의 김 노인이 해소기침을 연방 터뜨리다 측간에라도 가려고 여닫이문을 여는 순간 번개같이 신발을 감추고 죽은 듯이 숨을 죽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으며 측간에 다녀오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해 새경을 치른 저녁에 김 영감이 뜬금없이 기출이의 본관이 어디냐고 운을 떼어 이어 집안내력과 식구가 몇인지 꼬치꼬치 물어보더니 평소에 잘 안 가는 장에 간다면서 의관을 갖추고 외출을 했다.

그러고는 저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어오더니 그날부터 갑자기 순진이와 끝진이가 기출이의 방에 드나들거나 어울리는 걸 심하게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미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은 했지만 나중에 새뜰양반을 통하여 김 영감이 일 잘하는 기출이를 순진이의 짝으로 마음에 두고 언양장에 나가서 소문을 들어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들었는지 몰라도 기출이가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유복자라는 데서 덜렁대던 두 형이 상한 참가자미를 먹고 호열자로 객사한 데다 만날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지내는 지독한 게으름뱅이 형님에 어딘가가 좀 모자라는 어중개비 형수와 두 조카에 키가 팔대장승 같은 어머니가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의 논밭으로 조반석죽도 제대로 먹지를 못 한다는 것이었다.

농사꾼들은 사위를 보는 일에 비록 집안이나 재산, 인물 따위가 보잘 것이 없어도 때로는 사람 하나, 특히 건강하고 부지런한 것만 보고 딸을 주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건 기출이가 읍내의 모 호방집에 좀 모자라는 아들의 아이보기로 들어가 자기보다 네 살이나 위의 딸과 무슨 일이 있어 여러 번 쫓겨나고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다 큰 사달인 났다는 것이었다. 결국 둘이 배가 맞은 것이 탄로나 사내는 다시 쫓겨나고 이미 배가 불러 오르는 막내딸을 마침 혼인날을 받아놓은 세 째 딸로 속여 시집을 보내 탄로가 나는 바람에 울산병영의 시가집이 쑥대밭이 되고 당자도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병영의 사돈이 따지러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 호방마저 머리에 피가 몰려 측간에서 주당이 걸려서 죽고 세 째 딸에서 졸지에 막내딸이 되어 시집을 간 진짜 순임이도 남편으로부터 사기결혼이라는 추궁을 받다 문설주에 목을 매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 곱상한 얼굴과 멀쩡한 허우대와 달리 무슨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액운을 몰고 와 비명횡사를 시키기가 예사인 흉물이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성질머리도 있어 기미년만세운동 때에는 언양읍성 아래서 일본도를 빼든 왜놈순사와 치고받는 난투극을 벌이고 도망가는 바람에 언양땅을 4, 5년이나 떠나있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 영감 혼자만 좋다말고 난 뒤 또 한 해가 흘렀다. 기출이가 지난해에 받은 새경 닷 섬을 장려를 놓아 일곱 섬이 넘게 불리고 그해는 다시 여섯 섬의 새경을 받아 김 영감의 마당 한 쪽에 자기 몫으로 커다란 나락두지를 세워놓은 것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진 새뜰양반이 그날 저녁 한참이나 걸어가야 하는 중남면 사무소가 있는 작하의 주막집에 기출이를 데리고 가서 의중을 떠보는데 그 이야기가 기가 막힌 것이었다.

먼저 내 자네와 벌써 두 해를 같이 지내다보니 심지가 곧고 부지런한 것은 잘 알겠다고 운을 떼면서 언양바닥에 도는 자네에 대한 얄궂은 소문도 잘 알지만 농사꾼의 사위는 그저 건강하고 힘 좋고 부지런하고 심지만 곧으면 되는 법이라 자네만 좋으면 사위를 삼아 땅도 상답으로 한 닷 마지기쯤 제금으로 내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땅을 떼어준다는 거지 힘 좋은 사위를 봐서 그 많은 농사에 소처럼 부려먹겠다는 농사꾼다운 속셈이고 욕심이었지만 문제는 그 딸이 이제 겨우 나이 열 넷이라는 것이었다.

기출이가 허허 웃으며 아직 장가갈 마음도 없지만 은진이라는 그 딸이 어려도 너무 어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묻자 위인은 그게 왜 어리냐면서 여자 나이 열넷이면 있을 것 다 있고 아는 것 다 알아 시집을 가기만 하면 집안 살림은 물론 능히 아이도 낳을 수 있다면서 자기의 어머니는 열넷에 시집을 와서 열여섯에 자기의 누님을 낳았고 외할머니역시 열 셋에 시집을 와서 열다섯에 외삼촌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키도 너무 작고 몸피도 가늘어 도저히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말에 위인은 또 은진이 그년이 그래 봐도 제 어미를 닮아 눈도 크고 콧대도 반듯해서 나중에 키가 조금만 크면 한 인물을 할 것이라며 마누라와 딸을 싸잡아 자랑하는 팔불출이 되더니 심지어 그 애가 지난봄에 벌써 어망이 터져 다달이 꼬박꼬박 달거리를 하는지라 아이 낳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니 사위가 되기로 약조만 한다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방을 내어 합방을 시켜줄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고뭉치에 미천한 사람을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마음만 고맙게 생각하고 앞으로 삼촌처럼 잘 대하겠다며 점잖게 사양했지만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작자는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보라면서 원한다면 논은 몇 마지기 더 줄 수도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겨울을 넘기고 기출이가 스물여섯이 된 해의 음력 2월이었다. 아직 논밭을 갈기에는 이르지만 마침 날씨가 따스한지라 기출이는 한창 힘이 오른 여섯 살짜리 암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오랜만에 멍에를 씌우자 움찔 놀라며 킁킁 콧김을 내뿜는 소의 목덜미를 슬슬 쓰다듬어 달래고 두 손에 침을 흠뻑 발라 겨우내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손잡이, 손 좆을 단단히 잡고 부지런히 밭을 갈기 시작했다. 땅이 질거나 자갈이 많은 땅은 상일꾼이라도 하루 서너 마지기, 평지의 상답은 다섯 마지기를 갈기가 빠듯하지만 기출이는 소만 손발이 잘 맞으면 평지 땅 예닐곱 마지기는 거뜬히 갈 수가 있었다.

아침나절에 너 마지기 저녁나절에 또 두 마지기를 갈고 은진이가 삶은 고구마와 막걸리로 새참을 내와 나란히 앉아 먹기 시작할 때였다. 쉬느라고 멍에를 벗기고 집단을 풀어 새참을 먹이던 소가 갑자기 뒷다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쉬이 하면서 오줌을 깔기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 무심코 동시에 그 모양을, 그러니까 암소의 속살을 쳐다보던 순진이가 얼굴이 벌게지더니

“오빠!”

기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낮이라 좀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선들선들한 바람결에 순진이의 향긋한 살 냄새가 실려 그의 콧속을 파고들더니 이어 새끈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가늘게 떨리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어미의 동백기름을 훔쳐 발랐는지 새까만 머리채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문득 아랫도리에 불끈한 기운을 느끼면서 기출이는 슬며시 순진이를 밀어내며

“이라면, 안 된다. 너거 아부지 알면 큰일 난다.”

말했지만

“큰일은 무슨 큰일, 큰일 나면 큰 일 치면 될 것 아이가?”

열아홉 처녀로서는 당돌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어떻게든 일을 저지르고 혼례를 치르자는 말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발개진 두 볼과 물기가 촉촉한 눈빛에서 간절한 애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는 삼수갑산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단숨에 덥석 보듬고 짚북데기가 깔린 논바닥에 뒹굴어버릴까 생각이 들다가도 사방이 환하게 트인 허허벌판이라 또 다시 밀어내었다.

“오빠, 저녁에 끝진이 잠들면 오빠 방에 가께.”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돌아보며 논길을 걸어가는 나풀거리는 머리채를 보며 이러다간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 나겠다, 그럭저럭 왜놈장인이라고 소문이 난 김 영감의 사위가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다시 암소의 멍에를 씌우고 부지런히 논을 갈기 시작하는데 신불산꼭대기로 거의 다 기운 비스듬한 햇살에 문득 커다란 사람 그림자가 하나 비치는 것이었다.

“...!”

잠시 소를 세우고 바라보던 기출이가 흠칫 놀랐다. 뜻밖에 치만이가 서 있는 것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고 총기도 없는 사람이 이 먼 곳으로 어떻게 용케 찾아왔는지 기가 찰 일이었다. 다시 소의 멍에를 벗기고 논둑으로 나가

“치만이성, 오랜만이요.”

악수를 하고 손을 내미는데

“가, 가자! 집, 집에 가자!”

덥석 손을 잡은 치만이가 읍내쪽을 손짓했다. 자기 집에 가자는 말인 모양이었다. 정신이 성치 않은 사람이 힘이 세다고 했던가, 엄청 센 악력에 손이 다 얼얼했다.

“아이고 아파라. 이 손 좀 노으소. 가도 하던 일은 해 놓고 가야지.”

손을 빼고 찬찬히 바라보니 어깨가 더 구부정하고 눈에 정기가 빠져 힘이 없었다. 그러다 바쁘게 오느라 그랬는지 한쪽 볼에 코가 말라붙어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 아무리 수소문해도 서부 6개면 근동에는 딸을 주겠다는 사람이 없어 이태 전에 논 닷 마지기를 주고 경주 입실의 처녀를 사다시피 해 장가를 들었는데 어둔한 말씨와 행동, 또 황소 같은 덩치에 밤새 시달리느라 아예 널치가 났는지 딸아이 하나를 낳아 백일이 지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는 것이었고 그 후로 치만이는 더욱더 말수도 줄고 정신도 희미해졌다고 했다. 한마디로 정신 줄이 빠진 것이었다.

“가, 가자! 어서!”

치만이의 채근에 기출이가 멍에는 논에 그대로 놓고 소만 몰고 치만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김 영감 내외와 순진이, 끝진이가 치만이의 행색을 보고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소문으로만 듣던 모 호방네의 병신아들이라는 것을 짐작했는지 돌아서서 혀를 끌끌 찼다. 하는 수 없어 읍내로 좀 갔다와야겠다는 말에 우선 깔딱요구라도 하라면서 삶은 고구마를 가져와 둘이서 나눠먹고 길을 나섰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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