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7)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8장 노름쟁이 조(趙) 서방 ③쓰러진 호방댁

이득수 승인 2022.02.04 20:10 | 최종 수정 2022.02.07 16:41 의견 0
ⓒ서상균

8. 노름쟁이 조 서방 ③쓰러진 호방댁
 

제 아비가 노름꾼이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외가가 언양읍에선 밥술께나 뜨는 집인데 생떼 같은 외손녀들을 굶겨죽인다는 것도 말이 아닌 것이었다.

그렇다면 철철이 먹을 양식이나 당해주면 되련만 우선 삽재와 외양만디를 넘어 사십 리길을 싣고 가기도 힘들 뿐더러 그렇게 힘들여 싣고 간다고 해서 얼마가지 못해 그 고약한 인간의 노름밑천으로 다 날아가고 아이들과 어미는 또다시 굶고 앉았을 것이 불을 보듯이 빤한 것이었다.

이리 할지 저리 할지 몇 며칠을 고민하던 호방댁은 마침내 이튿날 아침상을 물리자 기출이를 불렀다. 날이 새자 당장 동꼴로 가서 작은님이 모자와 세 딸아이를 마저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선걸음으로 출발해도 해전에 돌아오기에는 힘들 형편이었다. 급한 대로 누룽지와 곶감으로 길양식을 챙기고 아침에 먹다 남은 찬밥도 찬합에 담았다. 동꼴에 가자마자 며칠째 굶은 아이들을 밥을 하기 전에 우선 먹이기 위해서였다.

 

길을 나서려는데 치만이도 같이 간다고 부득부득 우겨 부득이 셋이 같이 길을 나섰다. 궁근정에서 엿장수를 만나 기출이가 엿 세 가락을 사려다 아이들 몫 세 가락을 더 샀다. 우물우물 씹으며 삽재를 넘어가는데 아이를 업은 작은님이가 뒤에 쳐지는지라 기출이가 대신 업으려니 치만이가 굳이 자기가 업는다고 우기더니 쇠등에 닭이 올라탄 것처럼 모양세는 좀 엉거주춤 해도 우줄우줄 잘도 앞서 걸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 동골에 닿으니 늘 배가 고픈 아이들이 방문을 빼꼼히 열고 혹시 아비가 돈을 따 돌아오는지 사립문을 향해 눈이 빠지도록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고 이쁜 새끼들!”

기출이가 딸 셋을 차례로 안아보며 머리를 쓸어주며 어미 작은님이는 장정이 둘이나 왜 왔을까 잔머리를 굴리기에 바빴지만 했지만 아이들은 그 와중에 기출이가 내어준 엿을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주 보지도 못하던 태산 같은 삼촌과 낯선 기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주춤주춤 물러나곤 했다.

기출이의 말을 들은 작은님이가 밥을 앉혀놓고 아이들의 옷가지랑 포대기며 이불을 챙기는 동안 기출이는 집 안팎을 쭈욱 둘러보는데 농사를 짓지 않으니 나락뒤주나 볏가리는 물론 농기구나 멍석 한 쪽도 없었다. 도대체 무얼 먹고 무얼 때어 밥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정이 나무를 하지 않아 작은님이가 아쉬운 로 들판에 버려진 고춧대와 참깨, 들깨의 마른 줄기를 주어다 밤을 하는 모양으로 부엌에 불을 지피면서도 연방 기침을 콜록거렸다. 하긴 고춧대를 태워 밥을 한다니 맵기는 오죽 매우랴.

기껏 돈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작은방에 먼저기 수북이 쌓인 제상과 목기와 족보 책들이었다. 명색이 종가집, 종손이라는데 요즘은 기제사, 명절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도 어쩌면 삽재와 궁근정에 흩어져 사는 집안사람들이 따로 조치하는 지로 모를 일이었다.

도둑 줄 물건은 있어도 동생 줄 재산은 없다고 하는 것처럼 종가종손의 욕심으로 악착같이 선대재산을 물려받아 지켜야하는 것이건만 이제는 하도 먹을 것이 없어 쥐조차도 떠나버린 퇴락한 집이었다. 달리 문단속을 할 것도 없이 사립문만 대충 걸고 집을 나섰다. 치만이가 여섯 살짜리를 업는 바람에 기출이는 한결 가벼운 네 살짜리를 업고 여덟 살 큰아이는 앞장서 걸리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세 남여가 다시 외양만디를 넘어 삽재와 장성, 향산, 능산, 송대를 지나 집에 닿으니 해가 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초저녁이었다.

ⓒ서상균

그렇게 한 열흘이 지났을까. 이제 갓 돌이 지난 막내도 발그랗게 볼에 살이 오르고 위의 세 누이들도 삼시세끼 더운밥을 먹어 얼굴도 희어지고 눈빛이 또랑또랑해졌다. 첫날은 호방댁이 자는 안방에 작은님이 다섯 식구와 부엌데기 할머니까지 무려 일곱이 자고 은실이는 모처럼 제 아비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기출이가 사랑방으로 거처를 옮겨 다섯 식구의 방을 내어주자 치만이가 멀쩡한 제방을 두고 건너와 같이 자기로 했다.

낮에 치만이를 데리고 마구뜰은 물론 직동뜰과 모단뜰까지 못자리를 제대로 하는지 논밭은 제대로 갈고 보리밭에 풀은 매는지 둘러보고 오느라 피곤한 기출이와 치만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분필아, 내다. 여게 분필이, 아니 분필이에미 왔제?”

누가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늦은 밤에 누굴까, 누구이기에 저렇게 요란하게 문을 흔들까, 퍼뜩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던 기출이는 문득 동꼴에서 같이 넘어오던 작은님이의 큰딸이름이 분필이라는 생각과 함께 머리끝이 쭈뼛했다.

그렇다면 천하의 노름장이 조 서방인 것이었다. 며칠 전에 그렇게 아내를 두들겨 패고 집을 나간 사람이 저렇게 술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찾아왔으니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라며 대문가에 엉거주춤 섰는데

“아니, 이기 누고? 조 서방 자네가 여기 우짠 일고? 우리 분필이애미 하고는 인자 넘잉기라, 넘! 그라니 인자부터 여기는 얼씬도 하지 말고 지 신세 지 알아 하라고. 넘도 아닌 조강지처를 반 죽이 놓고 나간 사람이 찾기는 와 찾노? 곱기 돌아가소. 주재소 순사 부르기 전에.”

작은님이는 문설주를 잡고 오들오들 떨고 호방댁은 섬돌을 내려와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빙모님, 거기 무슨 말씀잉교? 사람이 길을 두고 뫼로 갈 것이요? 지 집 두고 절로 갈 것이요? 십년을 산 조강지처에 자식을 넷이나 둔 지가 가면 어데 가겠능교? 지 마누라 여게 두고.”

“그렇기 생각하면 사람은 와 개 잡듯이 팼노?”

“아이구, 장모님, 사람이 성이 나면 무슨 말을 못 하겠능교만은 둘이 서로 토닥토닥 입씰레기를 하다 그만, 그건 좌우간 지가 죽을 죄를 지었심더. 다시 지가 그런 짓을 한다면 지가 사람새끼가 아니지요. 아이지요. 손가락에 불을 붙여 하늘에 올라가는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더.”

“몰라. 내사 몰라. 내가 자네한테 속은 것이 어데 한 분 두 분이가?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봐라. 자네 같으면 믿겠능강?”

호방댁이 돌아서는데 어느새 잠이 깼는지 위에 두 아이가 마당으로 내려와

“할머니!”

“아부지, 아부지!”

소리치며 대문으로 내달리고 작은 놈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새 치만이도 마당에 나와 멀뚱히 서있었다.

“아이고! 이 일로 우짜꼬? 이 일로 우짜꼬?”

작은님이가 아이를 업은 채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등에 업힌 아이까지 와아 울음을 터뜨렸다.

“이 어리숙은 년아! 그렇게 몬 살겠다고 울어쌓더니 그래도 지 서방이라고 말 한마디도 몬 하고 또 울어쌓나?”

입술을 달달 떨며

“아이구, 분필이아버지, 분필이아부지!”

를 불러쌓는 작은님이를 보며

“아이구, 내 팔자야!”

호방댁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탁 닫아버리자 작은님이가 성큼성큼 대문간으로 나가 문고리를 확 벗겼다.

“빙모님, 그간 잘 기셨습니껴?”

지신지신 안방으로 들어와 엉거주춤 엎드려 절을 하는 조 서방에게

“보믄 모르나? 자네 같으면 심관 편히 잘 지내겠능가?”

호방댁은 다시 외면해버렸다.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또 얼마나 밥을 굶었는지, 그렇게 굶으면서 술은 또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도 옷도 땟물이 졸졸 흐르고 상투도 풀어져 봉두난발이 되어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번쩍번쩍 했다.

“보소. 분필이아부지요.”

할매와 부엌에서 밥을 짓던 작은님이가 어느새 끓인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섬돌 아래로 왔다. 그러더니

“봐라. 치만아!”

불러 급한 대로 치만이의 옷장에서 무명 바지저고리 한 벌을 꺼내들고 와

“어서 옷 갈아입으소. 내 밥상 채려 올 께요.”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호방댁은 또 혀를 끌끌 찼다. 이러다가 오늘 밤에 다시 다섯 번째의 외손자가 생길 판이었다.

 

그러기를 또 한 열흘. 호방댁 대문 안에 날이면 나날이 술 주전자가 줄을 서 드나들었다. 무슨 큰 벼슬이나 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작은 방에 떡 버티고 앉은 조 서방은 삼시세끼 고기반찬에 반주를 찾았고 작은님이는 그런 서방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호방댁은 날마다 닭을 사다 잡고 돼지고기를 사와 수육을 삶고 소고기를 사다 콩나물이나 미역을 넣고 국을 끓이는 작은님이를 차마 나무라거나 말리지 못했다. 아무리 노름쟁이지만 그래도 제 서방이요, 제 아이들의 아비인 바 비록 친정살이지만 모처럼 따신 방에 등 붙이고 오롱조롱한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사는 것이 어찌 살갑지 않을까? 거기다 자신도 일남사녀를 낳아 오롯이 잘 키워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고 이어 두 딸이 그릇되고 이제 셋만 남았는데 미운 자식도 자식이라고 그나마 가장 못 살고 애가 많은 작은님이가 이유야 어떻든 집에도 자주 드나들고 입을 섞어 말을 하는 젤 살가운 자식이 아닌가?

그깟 다섯 식구 먹여 살리는 것은 명색 언양읍의 부자 축에 드는 살림이니 날마다 닭 마리쯤 잡고 술 몇 되 날라 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호방댁이 가장 괴로운 것은 밤마다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작은님이의 내 죽는다고 내지르는 괴성이었다. 그 멀쩡한 조 서방이 원래 밤농사를 그렇게 힘도 좋고 솜씨 있게 조분조분 잘 짓는지 아니면 제 딸인 작은님이가 저렇게 사족을 못 쓰고 사내를 밝히는 체질인지, 그렇다면 다섯 자식을 낳은 자신도 젊을 적엔 저렇게 숨넘어가는 콧소리를 팍팍 내지르는 그런 안들이었는지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가까운 데 집을 구해 양식은 대어주더라도 일단 거처는 달리해야겠다고 기출이의 솜집아재를 통해 집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아이구, 우짜꼬! 아이구 이 일을 우짜꼬?”

안채 뒤뜰에서 들리는 찢어지는 듯 한 호방댁의 비명소리에 기출이는 후다닥 일어나 대충 신발을 꿰고 달려갔다. 그가 뒤란에 다다른 순간 챙그랑 소리나 나면서 호방댁이 그 속을 이리저리 더듬던 옹기 독을 떨어뜨려 박살이 난 것이었다. 같이 달려온 치만이가 어미를 부축하는 사이 기출이는 땅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기출이가 도조 나락을 받아와 다시 장려를 놓거나 방앗간에 맡기거나 월세로 받아온 돈을 둘 다 서툰 언문으로 기록하던 장부책이 깨어진 옹기조각 틈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제까지 장롱 안에 있는 오동나무상자에 돈을 넣고 쇳대를 단단히 채워 보관하던 마님이 지난번에 작은님이가 딴은 논밭을 사서 자식새끼 안 굶기려고 몽땅 꺼내가서 그만 제 서방의 노름밑천으로 속절없이 빼앗겨 버린 이후 어딘가 다른 곳에 숨기는 줄은 알았는데 마침내 저렇게 뒤란에 장독채로 묻어둔 것을 알고 몽땅 털어 도망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점포세로 받은 적잖은 현금과 당장 쓸 곳이나 이자 놓을 곳도 없어 기출이가 맡겨둔 현금까지가 몽땅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는 작은님이도 조 서방도 네 아이도 흔적이 없었다. 아마도 신 새벽에 땅을 파고 돈을 꺼내어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도망간 모양이었다. 아침에 잠을 깨자마자 인기척이 없어 수상한 기미를 챈 호방댁이 문득 묻어둔 돈독이 생각나 소스라치게 놀라 확인을 하고는 그렇게 실신해버린 것이었다.

아직도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할머니를 깨워 물을 덥히게 하고 아랫목에 눕혔지만 마님은 ‘어버버버’ 더듬기만 하고 말을 하지 못 했다. 많이도 놀란 모양이었다. 덥힌 물로 마님의 얼굴이랑 손발을 닦아주라고 치만이에게 당부하고 기출이는 약국집을 향했다.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고는 평생 기가 허약한 데다 너무 놀라서 그런 것인데 며칠 안에 쉽사리 툭툭 털고 일어날 수도 있지만 잘못 되면 아주 오래 고생하거나 영영 맑은 정신이나 말이 돌아오지 못 하는 수가 있다는 말을 하자 기출이는 더럭 겁이 났다. 무얼 먹는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아침을 먹고 치만이에게 엄마 곁을 꼭 지키라는 신신당부를 하고 기출이는 시오 리나 떨어진 명촌을 향해 달려갔다. 맏딸 큰님이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