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논도 사고 밭도 사고 ④석안선생의 약속
언제 왔는지 조카 동찬이와 정찬이가 저들도 지신을 밟듯이 발을 굴리며 수작을 하고 있었다.
그 어린 것들이 어느새 어깨너머로 그 긴 사설을 다 외었는지 그것도 동생 정찬이가 더 기억이 좋은지 설쇠가 되어 해설을 하고 형 동찬이는 간주 깽자작작 깽작작 깽작작 작작작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나마 무릎이 아파 한 번씩 동작을 멈추고 오만상을 찌푸리기를 반복했고 이제 여섯 살인 계집아이 복찬이는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거저 위아래로 뛰어오르고 내리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야, 이놈들 봐라!”
기출이 빙긋 웃으며 마당에 들어서는데
“짬촌!”
복찬이가 춤을 멈추고 달려오더니 품에 안겼다. 누구를 닮았는지 처음부터 말수가 적고 쌀쌀맞은 아이였는데 오늘은 꽤나 기분이 상기된 모양이었다.
“아이구, 내 새끼!”
아이를 안아 올리면서 문득 은실이 생각이 났다. 이제 그 애도 세살이 되었을 터였다. 작은님이가 제 새끼처럼 잘 돌볼지, 조 서방의 눈총이나 받지 않는지 걱정이 되면서 코끝이 찡했다. 그러면서도 작은님이의 네 아이들에 묻혀, 특히 동갑이자 외사촌, 고종사촌간인 작은님이의 막내아들과 잘 어울려 놀겠지 하고 자위하는데
“인자 오나?”
방문을 열고 서촌댁이 나왔다. 시어머니의 등 뒤에서 잠시 얼굴을 보이던 이제 열일곱의 새색시는 뭐라 말을 하려다 도로 문을 닫았다.
“어무이, 추운데 어서 들어가입시더.”
“아이다. 우리가 가야 너거도 지녁을 묵지. 야들아, 가자!”
아이 셋을 부르며 마당으로 내려서는 것이었다.
“어무이, 지녁 묵고 가이소.”
“아이다. 내 호문차도 아이고 하루 이틀도 아이고. 동찬아, 정찬아, 복찬아, 가자!”
기출이가 앞을 가로막고
“그라문 오늘만 지녁 묵고 가이소.”
억지로 방으로 밀어 넣으며
“야들아, 춥다. 너거도 들오너라.”
아이들을 불러들이자 새색시가 바가지에 쌀을 담아 정지로 나갔다. 아마도 자기내외가 먹으려던 저녁밥이 시어머니와 세 아이들이 먹기에 턱도 없이 모자라 새로 밥을 더 하려는 모양이었다.
처음 기출이가 신접살림을 차리자 서촌댁은 작은 아들집을 둘러본다고 와서는
“너거 집이 볕도 잘 들어 따시구나.”
서향집인 자기 집보다 훨씬 일찍 볕이 들고 종일 볕이 비치는 남향집인 기출이네집이 더 좋았는지
“아이구, 방이 따시니 온 삭신이 다 노곤하네.”
아침 숟갈을 놓자말자 와서 보통 점심을 먹고 어떤 때는 해가 빠져 저녁까지 먹고 갈 때가 많았다.
“희한하제. 아직 나도 어린 작은 며느리, 둘째의 장이 더 달구나. 숭녕도 더 구시하고...”
미안해서 그런지 늘 기출이처의 음식솜씨를 칭찬했다. 기출이가 보기에 평생 뭘 연구하는 법이 없이 그냥 그대로인 형수의 손맛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제 아내의 음식솜씨도 결코 좋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머니 서촌댁이 장이 달다는 말은 정말 장이 달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따라와서 같이 밥을 먹고 가는 세 아이들을 보기가 민망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제 집에서는 늘 먹을 것이 부족하고 따뜻한 온기나 깔깔 웃는 활기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세 아이는 늘 볕이 잘 들어 따뜻하고 쌀이 반 이상이나 들어간 작은 집의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좋고 아직도 알록달록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숙모가 좋았을 것이었다.
이튿날은 아래각단을 한 바퀴 돌며 제일 부잣집에 속하는 능산댁의 기와집에서 성주지신, 조왕지신, 장독지신, 마구지신까지 착실히 울리고 우물가에서
여루화산에 지신아 우물지신을 울리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천년샘을 울리자 만년샘을 울리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동해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남해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서해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북해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천년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만년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부르자 부르자 황하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불르자 부르자 은하수를 부르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천년샘도 여기요 만연샘도 여기요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은 여기로.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우물지신을 울리자 큰 아들이 대구로 가서 무슨 공장을 하여 큰돈을 벌어 마을에서 제일먼저 기와집을 짓고 논밭도 넉넉한 집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능산댁이 처음 쌀을 서 되 폭이나 내놓고도 기분이 좋은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야야, 빨리 술상 안 차리고 뭐 하노?”
며느리 삼동댁을 독촉하여 멍석을 깔고 김치를 내어오는데 마침 읍내 술도가에 술을 받으러 갔던 머슴이 한말들이 나무통을 지고 들어와서 구경꾼까지 넉넉히 마셨다.
그러고서 아랫각단에서 마지막으로 석암선생의 종택 곽남댁으로 가 삽작 앞에서
주인주인 문여소 나그네 손님 더감더.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한 바탕 놀아도 기척이 없어 다시
주인주인 문여소 나그네 손님 더감더.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풍물을 치면서 흘낏흘낏 안을 살피는데 한참만에야 드르륵 안방의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아이구, 우짜꼬? 근수할배가 몸이 성치 않아서...”
곽남댁이 울상을 짓는데
“그 뭐하노? 어서 손님을 안 맞고!”
다시 문이 열리며 석암선생이 소리쳤다. 그 새 단정히 옷을 차려입고 위엄 있게 장죽을 빼물었지만 얼굴이 표가 나게 초췌하고 머리카락에도 힘이 빠졌는지 탕건안의 상투도 축 쳐진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진 기출이가 애써 마음을 달래고
여루화산에 지신아 성주지신을 울리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강남서 나온 연자 솔씨 한 알 물어다가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거지봉에 던졌더니 그 솔이 장성하야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하나님이 물을 주고 산신령님이 부끼를 도아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행자목이 되었네 청자목이 되었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소부동이 되었네 대부동이 되었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앞집에 김대목아 뒷집에 박대목아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서른세 가지 연장을 갈아 왼어깨에 둘러매고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올라간다 올라간다 태백산으로 올라간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신명나게 한판을 놀아 등허리로 질퍽하게 땀이 흘러내리는데
“아이구야! 인자 우리 기출이가 상쇠로구나! 머리 좋고 목청 좋고 훤하게 신수 좋고 우리 버든동네에 설쇄하나는 제대로 구했구나!”
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온 석암선생이 5촌 당질인 사대부역 반천어른과 마주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기다란 장죽 두 개가 부딪히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이 사람 기출아, 아이지, 인자 명촌에 장가갔으니 명촌가손이지. 그래 명촌이 니가 마실 일에 나서니까 얼매나 좋노? 우리 버든마실의 대복이다, 대복. 그래 부지런히 해라이.”
기출이의 어깨를 툭 쳤다.
늘어졌다 황자목아 도리 비어 앵두나무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청룡활용 긴긴 나무 온갖나무를 벌멎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왼도끼로 찍어내자 스르릉시르릉 톱질이야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온동네 부역꾼아 일심동체 하여주소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한 토막은 비어다가 공자님 두겁하고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또 한 토막 비어다가 맹자님 두겁하고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또 한 토막을 비어다가 우리나라 희사하고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또 한 토막을 비어다가 이집 성주 마련했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아까 마신 탁주냄새가 시큼하게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자 점점 흥이 난 기출이가 힐끔힐끔 석암선생을 쳐다보면서도 차츰 빠른 장단으로 쉴 새 없어 내닫다가 휘익휘익 상모를 돌리기 시작하는데
“아이구, 안 되겠다. 숨이 차구나!”
석암선생이 춤을 멈추고 마루로 올라가 앉자 근수씨의 아내 선동댁이 재빨리 두툼한 이불을 꺼내와 어깨에 둘러주었다.
건곤의 신씨댁이 동서남북을 다녀도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남의 눈에 꽃이 되고 남의 눈에 잎이 되소.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건곤의 마씨댁에 살이나 한번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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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이라 들온 살 이월 영등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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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이라 들온 살 삼월 삼진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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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라 들온 살 사월 초파일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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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라 들온 살 오월 단오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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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라 들온 살 유월 유두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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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라 들온 살 칠월 칠석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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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이라 들온 살 팔월 한가위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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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이라 들온 살 구월 구일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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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라 들온 살 시월상수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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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이라 들온 살 동짓달 동지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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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에 들온 살 섣달 그믐에 막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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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하고도 열두 달 과년 하고도 열석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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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태평 하여주소 재수대통 하여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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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풍물소리와 매구북잡이의 춤사위와 붉은 고깔에 빙빙 도는 상모와 까르르 웃는 구경꾼들의 소리 속에서 문득 근 20년 한가위 씨름판에서 탁주병을 들고 터덕터덕 갱빈을 걸어가던 석암선생의 구부정한 어깨가 생각나면서 불콰하게 술기가 오른 얼굴이 떠오르더니 이어 순님이, 끝님이의 얼굴이, 치만이형의 태산 같은 덩치와 끔뻑끔뻑 소 같은 눈동자가 떠오르더니 화가 나 지개작대기를 휘두르던 모 호방, 늘 조용조용 소리 소문 없이 착하기만 하더 호방댁, 앙칼진 작은님이와 조 서방, 늘 차분한 큰님이와 대찬 선비 김서방이 떠오르고 마침내 열 살 적 비오는 한여름 오후에 술에 취한 도장방과 열다섯 적 빙빙 하늘을 도는 솔개와 오리나무가지에서 노고지리가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몸을 섞던 봉꼴산의 무덤가가, 신안 시루섬의 염막과 염분이와 목포선창가의 여인숙과 그 여인숙의 요에 찍힌 붉은 얼룩과 염분이가 던져준 돈 뭉치와 손죽도와 중남의 새뜰과 논두렁에 서서 한참이나 자기를 기다리던 치만형이의 모습이 펄럭거리는 상모와 고깔과 메구북의 치맛자락 사이로 어른거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정신을 차린 기출이가
건곤의 신씨댁에 모진 악담을 막아주소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건곤의 신씨댁에 모진 질병을 막아주소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건곤의 신씨댁에 관재구설을 막아주소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건곤의 신씨댁에 삼재팔난을 막아주소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다른 집에서는 중간중간 뻬 먹던 구절도 빠짐없이 엮어나가다 보니 해설이 너무 길어 숨이 가빠와 잠시 장단을 늦추는데 이불을 둘러쓴 채로 꾸벅꾸벅 졸던 석암선생이 문득 눈을 뜨고 바라보는지라 기출이가 황급히 장단을 끌어올려
물궈주자 불궈주자 천석만석을 불궈주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불궈주자 불궈주자 만석천석을 불궈주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앞뜰에는 앞 노적 뒤뜰에는 뒷 노적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쌀 천석을 가려주자 쌀 만석을 가려주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천년판도 여기요 만년판도 여기로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들어온다 들어온다 만복이 들어온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나간다 나간다 잡귀잡신이 나간다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은 이리로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이렇게 성주풀이를 마무리하는데 이제 분가를 해서 읍내에서 여인숙을 한다던 석암선생의 장손 근수씨가 양조장총각의 어깨에 탁주 통을 둘러매게 하고 앞장서서 들어오더니
“아이구, 이기 누고? 기출이새이 아이가?”
숨을 돌리는 기출이를 한참 들여다보는데 언양영명학교를 나와 신학문을 배운 사람답게 상투를 잘라버린 시원한 앞이마가 이젠 정수리 한가운데 까지 벗겨져 나이 든 태가 완연했다. 저도 벌써 스무 대여섯이 가까웠으리란 생각을 하며
“오랜만이제. 잘 지냈제?”
꾸뻑 인사를 하자 상모가 철렁 했다.
“내사 뭐 별일이 있겠나? 형님이나 내나 인자 옛날 그 불칼 같던 기백이 다 죽고 그저 남의 눈치나 보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지. 그거는 그렇고 기출이새이는 참 재주도 용하이. 팔도강산을 다 떠돌며 그 소리들은 언제 다 배았노?”
사기사발에 탁주를 부어주며 쳐다보았다.
“뭐 재주라 칼 끼 있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그저 귀동냥으로 쪼깨...”
“그래. 아무튼 장하다. 기왕이면 지신도 고루고루 잘 밟아주소. 안 그래도 어른이 몸이 편찮아서 올 겨울을 우째 넝길지 걱정임더.”
“그래.”
다시 정지와 우물, 장독간, 마구간까지 빠짐없이 돌아서 마당 한가운데 대열을 갖추게 하고 낮은 장단으로 숨을 돌리고는 마루에 앉은 석암선생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이제 짧은 마당지신과 대문지신을 이 댁의 성주풀이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여루화산에 지신아 대문지신을 울리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천년구틀을 울리자 만년구틀을 울리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천년문도 여기요 만년문도 여기요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짧게 대문지신을 울리고 마구간, 부엌, 우물, 장독간을 비잉 돌아 마당한가운데에 서면서 점점 빠르게 장단을 몰아쳤다. 비로소 하직인사를 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여루화산에 마당아 마당너구리를 울리자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천년판도 여기요 만년판도 여기요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은 이리로.
깨앵깨갱 깨갱깽 깽깨갱 깨갱깽
이렇게 아랫각단의 성주풀이를 다 하고 이튿날은 산 너머 구시골과 복숭밭이 있는 진장의 조부자집까지 지신밟기를 마쳤다. 구유처럼 좁지만 나가는 구멍이 없어 여남은 집 대부분이 살림살이가 윤택한 구시골에서는 쌀이 많이 나오고 진장 조부자집에서는 교회에 다녀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쌀 대신 현금으로 백 원짜리를 내 놓았다.
그렇게 사흘 동안 지신을 밟은 풍물꾼들은 마지막날밤 동사 마루방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결산을 하자 쌀이 도합 너 말 닷 되에 돈이 250원이나 되었다. 구장의 주재로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의논하여 우선 꽹과리와 징 등 낡고 금이 간 풍물을 바꾸고 매구북도 늘리고 고깔과 상모도 새로 장만하기로 했다. 그러고도 남는 돈으로 잔치나 초상 때 돌려가며 쓰는 상 그릇과 배상도 늘리고 한여름 뚝다리가 떠내려가 새로 놓거나 자갈이 날아가고 모래가 패인 신작로를 고루는 부역(負役)때 막걸리 참값으로 쓰기로 했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동사를 나서는데
“보소, 기출새이!”
기다리던 근수씨가 불렀다.
“새이는 내일은 우리 집에 좀 오소. 할아버님이 찾으신다네.”
“뭐라?”
“새이한테 꼭 이를 말이 계신다고 하셨네.”
“아, 알았어.”
대답을 하는 기출이의 가슴이 뜨끔했다. 한 이십년 세월이 흘러 네가 장가를 들면 그 때 이야기를 해주겠다던 석암선생님의 약속, 바로 그 약속, 그 내막을 들으러 가는 날이 온 것이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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