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2)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11장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⑧석암선생 운명하다

이득수 승인 2022.02.21 12:55 | 최종 수정 2022.02.22 11:17 의견 0
ⓒ서상균

11.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⑧석암선생 운명하다


긴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 허망한 이야기가 서글퍼서 그런지 아니면 지쳐서 숨이 찬 건지 석암선생은 한 동안 눈을 감고 나지막이 숨소리를 고르고 있었다. 차츰 기력이 돌아오며 정신을 차리던 석암선생은 자신의 낮은 숨소리너머 물레방아에 떨어지는 물소리처럼 씩씩대는 또 하나의 가쁜 숨소리를 들어야했다. 얼굴이 시뻘건 기출이를 보며

“와 그라노? 기출이, 아니 명촌이 이 사람아?”

“아, 아입니더.”

“아이기는 뭐가 아이고? 그래, 억울하고 분하다는 말이지. 자기 조상이 당한 그 억울한 일을 알고 분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또 증조부가 당한 그 기막힌 일로 아비와 할아비는 물론 자기 자신의 당대에 이르기까지 온 식구가 여기저기를 떠돌며 밥을 굶고 한뎃잠을 잔 그 고생을 생각하면 어디 잠이나 제대로 오겠는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봐. 무엇이 어떻게 분하고 또 어떻게 해서 그 분한 마음을 설분해야할지 말이야.”

“그런데 선생님.”

“그래. 말 해봐라.”

“아무리 사또라캐도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매질하여 죽게 하고 또 그렇게 분한 일을 당하고도 왜 우리 조부님 3형제는 그 못된 현감에게 복수하지 못 했을까요? 아닌 말로 사또가 행차를 할 때 어디 숨었다가 비수로 찌른다던지, 또 아니면 어디 진정서를 넣는다든지.”

“그게 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지사란다. 우선 그 당시 지방관아의 수령은 죄지은 관할 백성을 잡아들이고 죄를 물어 죽이고 살리고를 모두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졌지. 말하자면 나라님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수 있고 다 할 수 없게도 할 수 있고 무슨 일을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무슨 고약한 짓을 해도 부끄럼이 없듯이 지방의 수령방백들도 제 관할에서는 작은 임금이나 다름없지.

또 지금의 왜놈순사를 보게. 무지렁이 일반 백성이 누가 감히 그 왜 순사에게 무얼 따지고 대들겠는가? 우선 그 커다랗고 번쩍번쩍 하는 일본도만 보면 그만 간이 콩알만 해져서 제 스스로 등허리에 진땀이 날 지경이 아닌가. 그런데 당시의 수령은 지금의 왜놈순사보다 열 배도 더 무서운 존대였단 말이야. 왜냐하면 지금의 왜놈순사는 죄지은 자를 잡아만 올 뿐 정말 죄가 있는지 어떤 벌을 주어야할 지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법관들이 재판이라는 절차를 거쳐서 처리지 않는가?. 말하자면 순사가 잡아들인 범인을 죄상을 적은 조서와 함께 검찰에 제출하면 검사는 그 죄에 대한 형량을 구형하고 변호사는 죄인의 입장에 서서 그 죄가 불가피하며 구형량이 과도함을 변호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나름대로 또 심사숙고한 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최종판결을 내린단 말이지. 그런데 당시의 사또들은 지금의 검사, 판사가 하는 일을 제 맘대로 할 수 있고 변호사는 물론 피의당사자의 발명마저 ‘그저 죄인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를 연발하니 그가 저 걸주(桀紂) 같은 포악한 임금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러니까 자네 조부의 3형제가 현감에게 대들거나 설욕을 하려 않고 각기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도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 우선 만약 현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다가는 그 3형제 마저 어떤 다른 구실로 옥에 잡아넣거나 모진 고문을 할 수도 있어 줄줄이 떼죽음을 면하지 못 할 수도 있었지.

그러나 그보다는 이미 죽은 사람은 죽었다 치더라도 그들에겐 나이 든 할머니와 상심이 큰 어머니가 있었지. 각각 가슴에 아들과 남편을 묻은 절망에 죽지 못해 살아있는 미망인들을 위로해야하는 것이 급선무였겠지. 그러나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우선 그 많은 식구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이제 양반으로서 선비로서 그 가문이 자랑거리였던 상징인 족보를 비롯해 병풍과 제기, 그러나 이제는 어디 거치할 데마저 없는 애물단지를 울러 메고 대석과 구늪과 반곡의 세 곳으로 떠나갔지. 형제가 똘똘 뭉쳐 한 곳으로 가지 않고 세 곳으로 흩어진 것도 나름대로는 다 뜻이 있었어. 우선은 각기 식구가 홀가분해야 움직이기도 수월하고 어디 가서 얻어먹든 빌어먹든 적응하기도 쉬웠겠지. 그러나 그 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 험한 세상에서 그렇게 세 갈레로 흩어져야만 나중에 단 한 갈레라도 살아남아 가문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까닭이겠지. 여보게, 기출이, 아니 명촌이. 바로 그렇게 해서 자네의 집안이 이렇게 내려온 것이라네. 대석에서 봉당골에서 또 버든으로 옮기면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지만 자네 모친 서촌댁 같은 사람이 먼 곳에서 들어오고 또 여러 아이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면서 지금의 자네 집, 자네의 모친과 처가 있고 이어 자네의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란 말일세. 세상이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네.”

“그런데 선생님, 그러면 당시의 좌수어른이나 전교어른은 왜 단 한마디도 저희 증조부 반동선생님을 변호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바로 세상인심이란다. 반동선생이 정상적으로 깊은 학식과 빼어난 시심을 가진 선비일 때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별감으로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누구든지 가까이 지내려 했지만 어느 순간 그가 죄인으로 몰리자 갑자기 입장이 바뀐 것이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평소의 정의(情誼)로 보아 당연히 제 일처럼 걱정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또에게 나아가 이 별감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런 일이 없다고 변호해주어야겠지만 이미 인생의 저녁 답에 이르러 지는 해와 같이 짧은 목숨과 희미한 광채를 가진 그들로서는 우선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목숨이 험한 일에 매이지 않고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가는 와석종신(臥席終身)을 위해서, 말하자면 그 시들어가는 한 줌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은 것이지. 그게 바로 평소에는 군자연(君子然)하다가 무슨 일만 있으면 꼬리를 빼는 소심하고 고루한 선비정신이 아닌가, 거 참 내가 다 부끄럽구먼. 아무튼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자기 일신의 안위는 물론 가문을 지켜낸 것이지. 그러니까 그 또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뭐라 하거나 자네가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지.”

“에이, 지께미 씨이! 아이구, 아이구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면전에서 제가 감히 욕을 다 하고요.”

“아이다. 욕도 나올 만하다. 내 자네 심정을 다 이해하지. 그저 자네가 원하는 답을 한 번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선생님, 그렇다면 양반이고 선비가 다 무슨 소용잉교? 왜 그 사람들은 일도 않고 책상물림이 되어 거들먹거리고 상민이나 하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두려움의 존쟁교?”

“명촌이 자네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구먼. 소위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글을 읽고 훈장을 지낸 내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구먼. 그러나 일단 한번 들어보게.

우선 그 양반이라는 것도 일단은 사람이니까 먹어야 살고 먹으니까 똥오줌을 누어야 하고 그래서 측간을 출입하는 구린 존재이지. 또 자식을 낳고 살아야 하니까 자연 밤이 되어 이불 속에 들어가면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발가벗고 민망한 놀음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도 더 한 것이 있지.”

“더 한 것이라고요?”

“그렇지. 그렇게 구리고 민망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우선 양반은 일을 않고 먹으니 그것이 상민이든 노비이든 아무튼 남이 땀 흘려서 만든 곡식을 먹고 의복을 걸치니 바로 도둑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또 이불 밑의 민망한 일만 해도 부모가 맺어준 정실부인과의 관계라면 무슨 흉이 되랴만 그래 밥술이나 뜨고 행세께나 하는 벼슬아치나 양반치고 기생첩, 화초첩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또 그까짓 거야 이해한다 치더라도 본처가 시집올 때 데려온 몸종은 물론이고 행랑아범과 부엌데기 사이에서 태어난 언년이, 삼월이 같은 종년들이 열서너 살이 되어 입술에 붉은 빛만 돌아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가만 두지를 않는단 말이지. 그 정도라면 민망한 정도가 아니라 추잡한 일이지. 아니 부끄러운 일이지. 그러니까 양반이라고 하여 허리띠 아래쪽은 상놈이랑 조금도 다름이 없단 말이지. 먹으니까 엉덩이가 구리고 여색을 밝히니 아랫도리가 추잡하단 말이지. 그래서 그 구리고 추잡한 것들을 스스로는 잘 보이지도 않은 으슥한 곳, 그러니까 가랑이에 달아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아무튼 그러고서도 양반입네 점잖게 팔자걸음을 걷고 저고리 위에 도포 받쳐 입고 정자관을 높다랗게 쓰고 다니는 것이 그 얼마나 같잖은 일인가? 원, 훈장질을 하는 내가 다 부끄럽구먼.”

“송구합니다. 지는 선생님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데 말입니더.”

“아이다. 이건 니 문제도 내 문제도 아니고 모두의 문제이다. 내가 알기로 명촌이 자네도 양반집의 후예가 아닌가? 자네의 중시조(中始祖)되는 분은 한성판윤을 지낸 지조 있는 선비로서 골육상쟁과 당파싸움으로 피바람이 부는 조정의 난맥상이 보기 싫어 홀연히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신 훌륭한 어른으로 아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벼슬에서 물러난 양반의 후손이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못 한 향반이 되고 나중에는 향교나 향청에 출입하며 토색질을 일삼는 토반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밥걱정을 하는 잔반이 되기도 한다네. 그러다가 흉년이나 난리로 유리걸식을 하게 되면 양반이라는 족보와 이름만 달고 다니는 고집 센 거지가 되고 마침내 족보를 팔아먹거나 남의 집 고공살이도 마다하면서 상민이 아닌 노비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절이 좋고 형편이 피면 다시 족보를 갖추고 양반행세를 하는 거지. 옛말에 삼대부자도 없고 삼대거지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부자가 되면 차츰 나태해서 몇 대가 내려가면 필경 거지에 가깝게 되고 거지가 되어 밥을 굶게 되면 모질게 돈을 벌어 나중에는 전답을 사고 족보를 갖추어 다시 양반이 되는데 이렇게 흥성과 몰락을 반복하는 일에는 자네 집안 우리 집안이 다를 바가 전혀 없네. 그러니까 자기가 양반이라는 좋은 처지에는 좋은 마음으로 성실히 살며 가문을 지탱해야 하고 거지가 되어 밑바닥에 처할 때는 어떻게든 목구멍에 풀칠을 하여 명을 잇고 자손을 잇고 다시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것일세. 자네나 나도 그런 집안의 자손, 한 마디로서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다 하여야 하는 것이지.”

ⓒ서상균

“선생님, 그건 그렇다 치고 제가 듣기로 저 치만이형님네의 선조라는 모(牟) 씨네 집안의 이야기인데 이방인 모 씨는 우리 증조부를 위해 온갖 배려와 걱정을 하시었고 호방과 다른 육방관속인 모 씨들은 증조부를 모함하고 해코지를 하였다고 하는데 지는 저 모 씨네를 미워해야하는 것일까요,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말 참 잘 나왔구먼. 안 그래도 내가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미워할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다는 것이지. 굳이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명고명 시시콜콜 따지지 않더라도 우선 당대인 지금 자네가 죽은 치만이네 집 그 모 씨네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해보게. 무슨 연유, 누가 누구를 먼저 좋아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자네를 좋아하던 끝님이가 죽고 죄 없는 순임이도 덩달아 죽지 않았던가? 또 그렇게 그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자네가 호방댁이 병들어 몸을 가누지도 못 하던 시절 그 마지막을 지키고 치만이의 어린 딸을 돌봐주지 않았는가? 그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 은혜와 원성, 원망이 한데 엉겨 굳이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지. 그렇게 서로 은원을 맺으면서 얼크러져 자식을 낳고 세대를 이어가며 사는 것이지. 굳이 절에서 말하는 업보니 윤회를 들먹일 것도 없이 그렇게 어울렁더울렁 얼크러져 사는 것이지. 그것이 세상사는 이치인 것이지.

말하자면 죽은 모 호방이나 그 부인이나 치만이와 끝님이와 순임이와는 그들과 미운 사이였든 좋은 사이였든 죽고 못 사는 사이였던 그 관계가 이미 다 끝났으니 좋게, 좋게 생각해야하고 살아있는 큰님이와 작은님이, 치만이의 딸 은실이도 말이야. 물론 큰님이는 너그럽고 후하며 다정하고 작은님이는 영악하고 얄망궂겠지만 그나마 다 인연이니 그렇게 알아야겠고 그 어린 것도 그렇게 불쌍하면서도 귀여운 존재일 뿐이야. 비단 모 호방네와 자네의 인연 뿐 아니라 자네와 나의 인연도 지금은 서로 좋은 감정으로 서로를 돕고 걱정하며 사는 좋은 이웃이지만 앞으로 어느 세월에 자네와 나의 후손이 사랑하고 미워하며 은원을 쌓아가는 그런 어울렁더울렁이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저 산 사람들끼리 서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예, 듣고 보니 또 그렇군요. 선생님.”

고개를 주억거리던 기출이

“그건 그렇고 선생님께서 지를 보고 한사코 글을 배우지 말라. 글을 안다고도 또 다른 무엇을 안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죽은 듯이 숨어살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말하자면 괜히 글을 좀 한다고 향청에서 별감을 지내며 마을일을 보다 변을 당한 제 증조부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우선 자네가 그 생긴 외모에서 내 스승이신 반동선생이 환생하신 것처럼 빼닮은 데다 몸매나 걸음걸이, 심지어 웃는 모습까지도 판박이인 데다 무얼 하나 들으면 금방 기억하고 절대로 잊지 않으며 하나를 배우면 둘을 깨치는 그 총명함이 영판 닮은 데다 옳고 그름을 따져 반드시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다든지 옳지 못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까지 한 치의 차이가 없는 것이야. 그래서 조선이란 나라가 왜놈에게 넘어가고 반상이 무너지고 온갖 해괴한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 시대에 우선 자네의 일신을 보존하려면 그저 묵묵히 초야에 묻혀 땅이나 파는 농자(農者)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그렇게 자네가 살아남아야 자네의 후손, 그러니까 내 스승이신 반동선생님의 후손이 이어나가고 그러다가 좋은 시절에 자네나 반동선생님보다 더 영명한 인재가 태어난다는 것이지. 그러나 또 그보다는...”

“그보다는 요?”

너무 지쳤는지 파리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는 석암선생이 이야기를 끊고 한참이나 숨을 헐떡거렸다. 살며시 등 뒤로 돌아가 조심조심 등을 두드리며 쓸어내리기를 한참 만에 비로소 석암선생이 숨소리가 평온해지면서 화색이 돌아왔다.

“선생님, 좀 쉬시지요. 며칠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이다. 거기 앉아라. 내 이미 천수를 다하여 바람 앞에 촛불처럼 깜박거리는 목숨인지라 이제라도 마음을 풀면 풀잎처럼 조용히 드러눕겠지만 그래도 자네에게 이 이야기들을 해주기 위해서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모양이야. 자, 이젠 얼마 남지 않았어. 나머지 이야기를 해보자.”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는

“그러니까 그 어떤 것보다도 지금 자네 집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자네만이 그 어렵게 얽힌 가정사를 풀어가고 식구들의 입에 풀칠을 하게 할 것 같다는 말일세. 자네가 들으면 섭섭할지 몰라도 자네 증조부인 반동선생 생존 시에도 그 두 아우가 그렇게도 덩치도 보잘 것 없고 마음도 소심하고 글이든 일이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반 벙거지더니 희한하게 자네의 조부와 아비의 2대가 또 그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안사람이 차려다 주는 밥상만 기다려 밥만 축을 내면서 아이들만 줄기차게 만들어내더란 말이지. 어디 그 뿐인가? 자네 대에 와서도 죽은 자네의 두형은 그렇다 치고 하나 남은 자네의 백씨는 또 어떻단 말인가? 나는 세상에 <씨는 못 속인다, 씨도둑은 없다.>는 말을 자네 집안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를 더는 보지 못했다네. 어디 그뿐인가 아직 어린 자네의 조카들 그 동찬인가 정찬인가 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아도 영판 그 사람들의 눈이야. 체격이 작고 마음이 소심하며 방구들에만 처박혀 살며 아이를 잘 만드는 그 얼굴이 반질반질한 사람들 말이야. 그러니까 온 집안을 통틀어 오직 자네만이 키가 후리후리하고 뒷모습이 호창호창 흔들리며 눈에서 빛이 나고 제대로 일을 하고 판단을 하고 경우가 바른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것이야. 이제 환갑이 다 된 자네의 모친 서촌댁을 자네가 아니면 누가 먹여 살릴 것이며 자네의 조카 둘과 조카딸, 또 앞으로 태어날 자네의 아들딸과 조카들도 자네가 아니면 아무도 먹여 살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야. 한 집안의 막내로서 응석 한번 부려보지 못하고 그렇게 한 평생 온갖 궂은일을 다하여 어머니를 부양하고 형과 형수와 조카까지 책임져야 하는 자네와 달리 자네 형 선출이는 억지로 편해도 편하면 제일이다, 그 비좁은 콩나물독 안에서도 번듯이 누워서 크는 콩나물이 있듯이 다 그렇게 살기 마련인 것이라 어쩔 수가 없지. 오직 자네가 있어 자네만이 그 많은 대식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나 또 그보다는...”

“또 그보다는 요?”

“그래 이 말을 잘 들어라. 이제 내 비로소 스승이신 반동선생님에 마지막 소임을 전하는 것이다. 내 자네를 보니 자네의 후손, 아니 후손까지 갈 것도 없이 자네의 자식이나 손자 대에서 반동선생에 필적하거나 그를 뛰어넘을 총명한 아이들이 두서넛 태어나고 그중 한둘은 나름 가문이나 이 마을, 언양고을을 위하여 무언가를 공헌하고 그만한 이름을 남길 사람들이 태어날 것 같다는 말이야. 점쟁이가 아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자네는 우습고 믿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나도 이 나이가 되도록 명색 책을 읽은 선비에다 하도 많은 사람들을 겪다보니 나름대로 느낌이 있고 직감이 있다네. 그러니까 어쨌거나 자네는 앞으로도 늘 자중자애(自重自愛)하여 모쪼록 우리 반동선생님의 후손으로서 그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다 하시게.”

“예, 선생님.”

석암선생도 기출이도 말이 없이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그럼 선생님 몸조리 하시이소. 좋은 말씀 고맙십니더. 제가 이적지 늘 궁금하고 답답하던 일들의 내막을 알고 나니 눈앞이 훤해지는 것 같심니더. 선생님 말씀을 명심하겠심니더.”

부스럭거리며 기출이가 일어서려는데

“아이다. 거 게 앉아라. 내 한 마디만 부탁할 것이 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석암선생이 바짝 다가앉았다.

“이건 내 개인적 부탁이다. 이제 니가 돌아가면 이달 안에 아마 초상이 날 끼다. 내가 죽거든 니는 울지도 슬퍼하지도 말고 그저 열심히 선소리를 하여 내 행상을 저 복걸에서 새빗도랑을 건너 진장만디를 지나 마실공동묘지까지 구름에 달 가듯이 허위허위 인도하고 상여노래도 구성지게 불러다오. 내 명색 반가에 태어나 사서삼경을 배웠건만 평생 남의 눈치나 보고 그저 남 되도록 살다보니 아무것도 이루지도 못 하고 스승 반동선생처럼 눈 한 번 부라리지 못 하고 옳다 그르다 한 번 따져보지도 못 하는 소심한 시골선비로 살다 이제 저 먼 조상님들의 나라로 가는구나. 장지 옆에 솥을 걸고 소고기국밥도 넉넉하게 펄펄 끓이고 막걸리도 많이 받아와 모든 상두꾼과 문상객이 넉넉히 먹고 마시고 신나게 소리를 질러라. 이건 슬픈 죽음이 아니고 비로소 안온한 새 세상, 한 없이 밝고 가벼운 저 연두 빛 새잎처럼 빛나는 새 세상에 내가 떠나간다고, 아니 다시 태어난다고 말이야.”

“아입니더. 선생님.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우째 그래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요?”

“아이다. 내 몸과 내 명은 내가 안다. 내 이 험한 세상에 벌써 일흔이 넘어 고종명에 이르니 겨우 죽음이 뭔지 그거 하나는 알 것 같구나. 그리고 날 하관하고 성토하여 땅을 다질 때는 정말 신나게 땅을 울리고 굴려서 비 한 방울, 바람 한 줄기도 들어가지 못 하게 꼭꼭 잘 다져다오. 그리고 자네 손으로 활활 꽃상여를 태우게. 그리고 그 복숭아꽃보다도 더 선연한 불빛을 보며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시고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을 불러주게.”

“예, 선생님. 걱정하지 마시이소. 지가 시키신 데로 할 낍니더.”

목소리가 울먹울먹하는 기출이에게

“그래 고맙구나. 내 이제 편안하게 눈을 감고 길을 떠나겠구나.”

마치 방금 열명길에 들어 황천으로 출발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깜짝 놀란 기출이가

“선생님, 선생님”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자, 인자 이불을 덮어다오. 그리고 아무 기척 없이 조용히 나가거라. 그라고 내 죽거든 절대로 울지 마라. 알았제? 아무튼 회자정리(會者定離)에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회자정리, 생자필멸, 회자정리, 생자필...”

스르르 눈을 감았는데 놀란 기출이 얼굴을 가져다대니 다행히 희미한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얼굴도 평온해보였다. 조용히 문밖으로 나와 짚신을 찾아 신는데 눈물 한 방울이 발등에 특 떨어졌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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