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8)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3장 해방된 언양장터 ①둘째 처남 응진씨

이득수 승인 2022.02.26 20:01 | 최종 수정 2022.02.28 17:50 의견 0

3. 해방된 언양장터, 우국지사 조 서방 ①둘째 처남 응진씨

그렇게 모진 일이 일어나는 사이 봄은 무르익어 접동댁의 살구도 변손댁의 앵두도 명촌댁의 돌감도 오지게 열어 알뜰히 익었고 처마 끝에 둥지를 튼 제비도 다섯 마리나 새끼를 치고 마당가를 종종 거리던 병아리들도 중닭이 되더니 수탉들은 꼬끼오, 목청을 빼는 연습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창 무더위가 몰려오는 초복 무렵에 기출씨에게 또 하나의 조카딸 귀찬이가 태어났다. 아비와 4촌 언니 둘의 목숨과 바꾼 새 생명이었지만 자신과 똑 같은 유복자였다. 형수 상남댁이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묻자 기출이가 아비와 사촌언니 둘과 바꾼 귀한 생명, 귀하게 얻었다고 귀득(貴得)이라고 지었다가 사촌언니들과 끝을 맞추느라 귀찬이로 고쳤다.

그해는 시절이 좋아 비도 흔하고 태풍도 한 번 불지 않아 논과 밭 모든 곡식이 다 잘 여물었다. 이빨 대신 잇몸이라고 맨날 구들장이나 지는 선출씨와 정찬이 부자가 없으니 더는 원망하고 싸울 일도 없이 먹새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당장 봄을 넘길 양식걱정을 덜었다. 여덟 살 상찬이, 일곱 살 순찬이 두 조숙한 아이들이 기출씨를 졸졸 따라 다니며 그 고사리 손으로 농사일의 시늉도 내고 심부름도 잘 해 기출씨에게 큰 낙이 되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장녀 갑찬이는 열 살이나 되어도 도저히 아무 생각이 없는지 그냥 먼 산이나 보다 어미아비가 무얼 시키면 겨우 시늉이나 할 뿐이었다. 하 많은 사람 다 두고 하필이면 매사에 달기가 없는 제 큰어미를 닮았는지 아니면 사촌오빠 동찬이와 짝을 이루려고 그러는지 서촌댁과 기출씨 모자가 자주 혀를 끌끌 차야만 했다.

 

그렇게 가을걷이를 하자 작은 집 큰 집에 제법 곡식이 쌓이고 한 해 넘기기가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큰집은 엿 마지기 논에서 대충 엿 섬이 나왔지만 선출씨와 정찬이 두 장골이의 입이 줄어 양식걱정은 한결 들었기 때문이었고 작은 집 기출씨네도 물이 흔해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 오룡골에서 한 섬 반, 집 앞의 한 마지기와 갈배기 서마지기에서 합계 닷 섬에 올해부터 새로 부치게 된 진장골짝논에서 또 석 섬에 가까운 소출이 있어 무려 열 섬이 넘는 곡식을 거둔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자기네 다섯 식구에 어머니 서촌댁까지 먹고 조금은 시장에 내어 가용으로 쓰고 서너 섬은 족히 남을 것이었다.

그 남는 서너 섬을 내어 송아지를 한 마리 사다 키울까, 아니면 보리쌀이나 호밀, 하다 못 해 밀기울이나 다른 잡곡을 보태먹고 왕창 쌀을 내어 작은 논배미라도 하나 살까, 기출씨가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는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둘째 처남 응진씨가 찾아온 것이었다.

처음 무심히 그냥 누님댁이 궁금해서 놀러온 줄 알고 막걸리를 받고 보깡구집의 조피를 사와 술상을 벌이던 기출씨와 부엌에서 찹쌀을 푹 삶아 주걱으로 조물조물 으깨어 팥고물을 발라 주게 떡을 만들던 명촌댁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남 응진씨가 그냥 놀러온 것이 아니라 진장골짝논 서마지기의 도지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사단은 이랬다. 지난 가을 명촌의 처가가 울산에서도 30리나 더 들어가는 남창으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최근에 울산까지 버스가 다니고 울산에서는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언양에서 걸어서 가려면 삼동면 작동에서 고개를 넘어 웅촌면 대복마을과 곡천을 지나 대운산의 옆구리를 돌아가는 근 70리의 먼 길이었다. 근 10년이 지났을까, 솜집아재가 살아있을 때 대운산꼭대기 넘어 상대리란 곳에 몇 대조인지도 모르는 묵은 산소가 있어 자신이 살았을 때 마지막으로 벌초를 하고 이제 더는 못 온다고 축문을 지어 정리를 한다고 한번 가보기는 했는데 그 무더운 한여름에 웅상면 서창이라는 데서 대추나무만디라는 고개를 넘는다고 진땀을 흘린 기억이 선명했다.

그 날 땀을 팥죽처럼 흘리던 솜집아재는 여기 묻힌 할아버지가 둔터에 살던 분인지 그 전 반곡이나 구량에 살던 분인지는 몰라도 산 이름에 구름 운(雲)자가 붙으면 산봉우리에 늘 구름이 걸려 있을 정도로 높고 험한 산이라는데 그런 대운산 중턱에 묘지가 있다는 것은 그 죽음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에 망인이 높은 벼슬을 했거나 학문이나 덕망이 근동에 소문날 정도로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은 바에야 이 높은 곳에 운구며, 산역이 너무 힘들어 도무지 엄두도 못 낼 일이니 이는 필히 흉년이나 난리로 숨거나 도망치려고 이 높은 산을 넘다 실족을 하였거나 굶어죽었거나 아무튼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닌 객사죽음일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기출씨에게는 단지 높고 험하다는 느낌밖에 없는 대운산 기슭인 대원리에 그것도 동쪽의 산기슭에 터를 잡아 아침 해가 늦게 뜬다는 하대리 음달마을에 이사를 한 것이었다.

그해 환갑을 넘긴 기출씨의 장인 능산전손은 보통 사람이면 제 살던 마을에서 긴 담뱃대를 물고 에헴, 에헴 상노인 행세를 하며 괜히 마을일을 간섭하고 선산을 돌본다고 집안사람들을 들볶고 자기 묻힐 자리나 찾아다닐 나이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느닷없이 논밭과 집을 팔고 70리나 떨어진 외진 마을로 이사를 한다고 식구들과 마을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마도 언양장날 소를 팔러 갔다가 어느 소장수한테서 솔깃한 이야기라도 들은 모양이기도 했지만 명촌이라는 마을 자체가 언양바닥에서는 그중 흔한 성씨이며 신라의 왕족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한 경주 김씨 중에서도 특별히 자기마을이름을 딴 계림김씨, 명촌김씨로 부르는 것처럼 자부심이 대단한 집성촌에서 타성인 전씨로 살아가는 것이 좀은 버성기기도 하고 마땅찮은 점도 있어 어차피 떵떵거리며 주인행세를 못 할 바이면 차라리 바닷가에 가까워 양반, 상놈을 따지지도 않고 땅값도 산 남창으로 가서 넓은 땅에 농사를 지어 가을에 커다란 나락두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몰랐다.

ⓒ서상균

그러니까 기출씨의 장인 전 영감에게는 모두 4남 2녀가 있었는데 장녀인 명촌댁 윤봉씨 아래로 장남 재봉씨, 차남 응진씨, 삼남 상진씨가 있었고 다음으로 둘째딸 특봉씨와 막내 철진씨가 있었다. 그 나이에 솔가하여 이사를 갈 정도의 배포였으니 그 전 영감이나 아들들도 어느 정도 머리도 돌아가고 늘 푼수도 있고 뱃심도 있는 편이었는지 장남 재봉씨는 기출씨가 장가를 든 이듬해 열다섯 어린 나이로 어찌어찌 일본으로 밀항해 일인의 점포나 여관에 잔심부름을 하면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은 모양으로 여관주인의 딸인 일본인 아내를 얻어 자식도 여럿 낳고 밥걱정도 없어 삼년 전엔가 조선에 나와 이제 열한 살이던 막내 철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에다 삼남 상진씨는 어디서 그런 머리가 나왔는지 인근 길천의 갓 생긴 국민학교에 6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아 약간의 장학금을 받으며 고학으로 부산의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내지의 대학을 가기 위해 부모 몰래 현해탄을 건너 동경바닥을 전전하다 삼동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굴지의 섬유회사를 경영하는 사까모도씨, 한국이름 서갑호 씨의 눈에 뜨여 그 유명한 동경제대 공대의 섬유과에 입학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세 아들이 다들 일본 물을 먹으며 잘들 성장하는데 비해 차남 응진씨는 키도 작달막하고 구부정한 어깨에 목이 굵고 얼굴도 그냥 펑퍼짐한 지극히 평범한 아들이었고 집밖에 나가 뭘 할 정도의 위인도 못 되는 좀 처지는 축이었다. 그러나 옛말에 눈먼 자식이 효자고 병신자식이 집을 지킨다고 유일하게 전영감의 슬하를 떠나지 않고 땅 욕심, 일 욕심, 자식욕심, 밥 욕심의 욕심쟁이가 되어 생전 집밖에 나가거나 친구를 사귀는 일도 없이 해만 뜨면 혼자 논밭에 나가 끙끙 앓으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명촌의 전답과 집을 팔아 하대리의 음달마을에 집을 사고 명촌땅의 배가 넘는 논 열두 마지기와 밭 천이백 평을 사 흐뭇한 마음으로 이사를 하려던 전 영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큰딸인 기출씨의 아내 명촌댁이 문제였다. 조상에게 그런 내리기(遺傳)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희한하게 전 영감의 두 딸인 윤봉씨와 특봉씨는 날 때부터 한쪽 다리를 잘숨잘숨 절었다. 큰딸 윤봉씨가 오른 발을 약간 뒤로 끄는 편이라면 작은 딸 특봉씨는 왼발을 제법 표가 나게 절뚝거렸다.

어느 누가 자식욕심이 없고 자식걱정이 없으랴만 명촌마을에서 일만 아는 욕심쟁이 뚝보로 소문난 전 영감도 두 딸만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고 동지섣달 긴긴 밤에 집 뒤의 대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잠이라도 깨는 새벽이면 늘 다리를 저는 두 딸의 생각, 특히 버든에 시집가서 아이를 셋이나 낳고 사는 큰딸 윤봉씨가 어떻게 나이 많은 이 서방의 안사람으로 또 아이들의 어미로서 잘 해내는지가 걱정이었다. 물론 작은딸 특봉씨도 걱정이기는 하지만 아직 부모 품에 있고 나중에 심덕 좋은 사윗감을 만나면 논마지기라도 떼어줘 단단히 매어둘 심산이었다.

전답과 집을 정리하고 남창으로 이사 갈 날만 기다리던 어느 날 새벽에 잠을 깬 전 영감은 그날따라 유달리도 큰 딸 윤봉씨의 걱정이 가슴에 사무쳐 등잔불을 켜고 대토를 하고 남은 돈을 꺼내어 세어보기 시작했다. 일등 답이면 한 마지기, 골짝 논 봉답이면 두세 마지기를 살 액수가 되었다. 아침을 먹고 전 영감은 바로 딸이 사는 버든마을로 내려가 사람을 시켜 사위 기출씨를 불렀다. 갑자기 들이닥치면 딸이나 사위가 놀라기도 할 뿐더러 친정아버지가 자주 딸네 집에 들랑거리면 딸이 못산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옹서간이 의논 끝에 벌써 밥술이나 뜨는 구시골의 전 씨네가 힘들게 모를 심어도 날이 가물면 씨나락도 못 건진다고 몇 년째 묵혀둔 진장골짜기 천수답 서마지기를 알아보기로 하고 마침 전 영감과 일족인 전 구장을 사이에 넣어 언양 저잣거리 대폿집에서 흥정이 벌어졌다.

뜻밖에도 쌀 닷섬 값에 손쉽게 거래가 성사되고 논문서가 전 영감의 손을 거쳐 사위 기출씨의 품으로 들어왔다. 상답이라면 한 해에도 나락 석 섬, 그러니까 쌀 세 가마니가 나는 논 서마지기에 쌀 닷섬 값이면 터무니없이 싼 값이었다. 이태만 농사를 잘 지으면 바로 땅값이 나오니까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밥을 먹고 살 만한 집이라면 모를 꽂는다고 반드시 곡식을 먹을지 못 먹을지도 모르는 천수답, 그것도 서 마지기에 논배미가 아홉 도가리가 되어 모심기 때 어쩌다 내리는 빗물을 가두려고 논두렁을 바르느라 골병이 들고 장마철엔 논둑에 방천이 나거나 산에서 복새가 밀려와 실농을 하기 일쑤라 부치기도 뭣 하고 버리기도 아까운 그 따위의 박토에 마침 임자가 나왔으니 두 손 들고 반길 일이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기출씨처럼 농사 지을 힘은 있고 땅이 없는, 거기다 식구까지 많은 사람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여섯 식구의 배를 채울 귀한 밥그릇이었고 새로운 희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창으로 이사를 하기 이틀 전 이사준비도 도와줄 겸 하직인사를 하려고 죽은 도분이까지 네 아이를 업고지고 여섯 식구가 명촌에 갔을 때였다. 평소에도 말이 없고 퉁명스럽기는 해도 보통 “자영 왔능교?” 하고 인사 한 마디를 툭 던지곤 하던 처남 응진이가 어쩐 셈인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인사조차도 않고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온 것이었다.

솥단지와 장독, 쟁기, 써레, 똥장군, 길마 같은 무겁고 덩치 큰 짐들은 새 주인에게 주고 자신들로 남창의 전 주인에게서 그런 농기구를 받기로 해서 이불이랑 옷가지와 당장 먹을 양식 조금만 대충 꾸려놓고 저녁상을 받을 때였다. 그날따라 모처럼 장닭을 잡아 무를 숭숭 썰어 넣고 발갛게 고춧가루를 뿌려 기름기가 동동 뜨는 닭볶음탕을 젊은 기출이 내외와 처제 특봉이는 물론 늙은 전 영감 내외와 기출이의 어린 세 딸까지 핥고 빨고 야단이 나고 돌도 안 된 일찬이도 잘게 찢어준 살코기를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는데 유독 응진이만 치이치이 볼멘소리를 내며 그 맛있는 국그릇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장모 능산댁이 눈치를 채고

“야야, 니 속에 넣어놓고 그래 입만 티 나올 끼 아이라, 니 자영 있을 때 니 아부지 앞에서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해 봐라.”

운을 떼어도 얼굴이 새빨개져 숨소리만 더 가빠지며 말을 못 하는지라 할 수 없이 능산댁이 대신 하는 말로는 시집간 제 누나한테 논을 사주면서 자신과 의논도 않았다고 불만이라는 것이었다. 기출씨가 얼굴이 벌개져서 국그릇에 고개를 푹 박고 있는데 장인 전 영감이

“에라이, 못 난 자슥! 응진이 니는 형제일신이라는 말도 모리나? 부모가 늙어서 죽고 나면 큰형님은 아부지 대신, 큰누님은 엄마 대신이라 카는데 니는 니 큰 누부, 그것도 몸도 성 찮은 니 누부가 저렇게 오롱조롱 새끼들을 매달고 해마다 양식이 달랑달랑 해서 시래기죽, 무시죽에 꽁보리밥도 옳게 몬 묵는 것을 모리나? 제기나 사람 같으면 지가 먼지 걱정을 하고 쌀말이라도 져다 줄 낀데. 그래 이 놈아야, 니는 니 누부, 니 조카 입에 받들어가는 것이 다 아깝단 말이가!”

버럭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 도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덩달아 일찬이도 씹던 닭고기를 뱉어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렇든 말든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던 응진이가 마침내 밥숟가락을 놓고 방을 나가버리자

“아이고, 내 우짜다가 저런 곰통을 낳았을꼬? 나도 어데 가면 욕심 많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 자식이지만 저렇게 욕심 많은 인간은 처음 보네.”

전 영감이 늙은 사위 보기가 민망한 표정을 짓는데

“영감도 생각해보소. 영감이라면 성이 안 나겠는가? 사람 욕심은 똑 같다 카는데 내라도 속에 천불이 나겠는데.”

능산댁이 남의 속도 모르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 눈치 없이 꽉 막힌 성격을 응진이가 그대로 빼닮은 모양이었다. 순간 전영감이 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상 치아라! 안 처묵는 놈 준다고 밤새도록 놔둘 끼가?”

 

나뭇가리에서 솔잎 하나를 빼 모처럼 이빨 사이에 낀 고기조각을 빼던 기출씨는 영 기분이 찝찝해서 설거지를 하는 명촌댁을 불러

“그만 집에 가자. 대강 해놓고 아아 업어라.”

이르고 갑찬이, 순찬이의 옷과 신발을 챙기고 도분이를 업고 일어서려는데

“이 사람, 가서방! 자네도 손우가 되서 그라면 안 되지. 이 어두운 밤에 아아 너이를 데리고 어데로 간단 말이고?”

하더니 도분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응진이를 불러

“얼릉 송대 주막에 가서 탁주 두 되만 받아오너라. 그라고 온 저녁에 니 자영한테 잘못했다고 안 빌면 니는 사람도 아이다. 니가 자꾸 보골 채우면 남창에 새 논도 니 누부 다 조뿔 끼다.”

을러대었다. 근 십리나 되는 송대에서 받아온 탁주로 술상을 보아 전 영감과 기출씨와 응진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둘러앉았다. 몇 순배 술이 돈 뒤에

“응진아, 니도 한 번 생각해봐라. 천지에 니 자영같이 살라꼬 노력하는 사람이 어딨노? 또 경우는 좀 바르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더니

“혹시 아나. 그 봉답에서도 물이 흔해 나락 섬이나 묵으면 니한테 쌀말이나 줄지...”

이렇게 달래서 겨우 수습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나이 많은 맏사위를 잘 챙겨주던 전 영감은 집을 바꾸고 전답을 대토하는 대역사인 이사에 너무 신경을 썼는지 아니면 전 가족을 뿌리째 솔가하느라 그야말로 뿌리가 흔들렸는지 이사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아침을 잘 먹고 논에 나간다며 축담을 내려가다 마루에서 떨어져 죽었다. 너무 신경을 쓰서 급하게 풍을 맞은 모양이었다. 양껏 농사를 지어 커다란 나락두지를 짓기는커녕 모 한 포기 꽂아보지 못 하고 만 것이었다. 그게 바로 농사꾼의 운명이었다.

아직 장가들지는 않았지만 이제 바야흐로 대주가 된 응진이는 뚝심 좋게 그 많은 농사를 잘 지어냈고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괄괄한 능산댁도 다리 저는 딸 특봉이를 매번 꾸물댄다고 나무라면서 천이백 평이나 되는 밭에서 콩과 팥, 감자와 고구마에 고추와 김장채소 무, 배추는 물론 참깨와 들깨, 녹두와 동부, 차조와 매조, 수수, 기장에 호박까지 고루고루 잘도 농사를 지어 마당에는 커다란 나락두지가 자리 잡고 도장방엔 온갖 잡곡이 넘쳤다.

그러자 응진이에게 올 겨울엔 자신이 장가를 들든지 여동생 특봉이를 시집을 보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보니 우선은 농사일도 시원찮고 밥이나 축내는 특봉이를 먼저 시집보내고 어머니와 둘이 홀가분하게 살면 양식도 덜 들고 살림도 늘어 금방 더 많은 땅을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은 특봉이의 몸이 그래서 전에 아버지가 생전에 늘 입에 달고 있듯이 어쨌거나 열심히 살림을 늘려 특봉이가 시집갈 때는 평생 밥걱정이 없도록 논마지기나 떼어주어 사위를 사다시피 해야겠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자면 논밭의 일부를 떼어주거나 마당에 쌓아놓은 나락두지를 털어 돈이라도 한 뭉치 주어야하는데 너무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중 하루는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 무릎을 탁 쳤다. 버든의 큰 누님에게 사준 진장골짝 서마지기가 생각이 난 것이었다. 물이 흔한 해였으니 틀림없이 곡수도 많이 났을 것이었다.

 

기출씨가 모처럼 처가손님이 왔다고 아직 알을 낳는 통통한 씨암탉을 잡아 닭도리탕을 끓이게 명촌댁에게 넘겨주고 간과 염통과 모래주머니와 똥집을 앉은 자리에서 쓱쓱 잘라 안주삼아 막걸리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도 한 사발을 마시고 응진이에게도 한 잔을 주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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