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5)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장 열두 식구 ③은실이

이득수 승인 2022.02.21 14:30 | 최종 수정 2022.02.25 09:56 의견 0

1. 열두 식구 ③은실이

그 후 한동안 작은님이네는 참으로 평온한 시기를 맞았다. 조 서방이 노름을 끊고 점잖게 책을 읽거나 바지저고리를 잘 차려입고 마고자까지 걸친 채 장터거리를 뒷짐을 지고 다니거나 마구뜰의 논밭을 돌아보고 천천히 남천내공굴을 돌아오는 완전한 양반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지로 들어오는 양식도 넉넉하고 다달이 들어오는 점포세로 생활비도 부족함이 없으니 비로소 작은님이의 얼굴에 낀 주근깨도 색갈이 옅어지고 목에서 뺨을 타고 이마까지 다시 처녀 때처럼 뽀얀 살갗이 돌아오면서 눈망울에도 물기가 반짝였다. 그렇게 신수가 훤해진 것은 비단 작은님이뿐이 아니고 세 딸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큰딸 분필이는 어느 새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는데 어미아비가 다 훤칠한 편이라 그야말로 몸매도 곱고 살성도 흰 부잣집 딸의 형색이 완연했다.

그 1남 3녀 틈에서 치만이의 딸 은실이도 무던히 잘 자랐다. 아직 어릴 적에는 저자거리에서 기출씨를 만나면 “짬촌, 짬촌!”을 외치며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기고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더니 심상소학교에 다니고부터는 괜히 부끄럼을 타면서 생글생글 웃기만 했는데 그 아이가 자라가면서 점점 죽은 제 고모 끝님이를 닮아가는 것이 기출씨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러기를 또 몇 해를 보내고 12읍면 울산바닥을 쩡쩡 울리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군청의 산림계 직원이랑 큰 딸 분필이의 혼담이 오고가던 시절에 조 서방은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그 때는 늘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상북면의 삽재나 외양만디나 운문재 넘어 소호나 동골, 그러니까 쇠동꼴이 아닌 울산읍쪽으로 발길을 돌렸는지 범서면의 입암이나 웅촌면의 검단, 남창의 대운리쪽으로 넘나들었는데 그게 다 버스가 생기고 철로가 뚫려 세상이 변한 덕이었다. 한번은 청량면 덕신이란 곳에서 소 판 돈과 논문서가 오고가는 제법 큰 판이 벌어졌는데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어찌어찌 조 서방이 판쓸이를 해 그야말로 옛날 동골에서 잘 나가던 시절처럼 돈 자루를 메고 나올 판인데 돈을 잃은 울산 노름꾼들이 조 서방이 속임수를 썼다며 방을 나가지 못 하게 하면서 주먹다짐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싸움이 커져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서 남창주재소로 신고가 들어가 그들은 몽땅 연행되어 당일로 울산경찰서에 넘겨져 조 서방이 가진 한 자루나 되는 판돈을 몽땅 뺏긴 데다 벌금까지 물게 되었고 벌을 덜 받기 위해 합의과정에서 이미 상습도박의 전과가 있는 조 서방은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찢어진 노름꾼의 치료비까지 적잖이 물어주어야 했다. 거기에다 큰칼을 찬 왜놈순사와 경찰서장에게 돈을 바치지 않으면 바로 형무소로 넘어간다는 말에 뇌물까지 주었으니...

직동뜰 닷 마지기로 수습을 나섰지만 삶은 호박에 대침도 들어가지 못 할 어림없는 일, 결국 장터거리의 점포하나가 날아가고 말았는데 이마를 싸매고 끙끙 앓으며 드러누운 조 서방에게 돈이나 논이나 점포보다도 더 끔찍한 횡액이 찾아왔다. 잘 나가던 분필이의 혼담이 괜히 시들해지고 진도가 없어 마침내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해를 넘기는구나 싶었는데 설 안날에 들린 중신애비가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소식을 들고 온 것이었다.

덕하 노름판의 사건을 취조하던 울산경찰서의 담당형사가 바로 분필이와 혼담이 있던 산림계직원의 삼촌이었던 것이었다. 총각으로서는 신붓감의 집안도 넉넉한 데다 분필이가 한창 피어나는 나이로 연꽃처럼 흰 살성에 몸매도 풍만한 맏며느리 상으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미색이라 종내 미련이 많았지만 도박전과자의 딸을 데려와 노름장이자식을 낳으면 얼마 못가 온 집안이 패가망신한다는 말에 손을 들고 만 것이었다.

작은님이 혼자서 속을 끓이면서 사랑채의 조 서방이 모르게 쉬쉬했지만 정월 대보름날 우연한 말끝에 사태를 눈치 챈 조서방이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후다닥 부엌으로 들어가 도마 위에 손을 얹고 정지 칼로 왼쪽 검지를 자르고 말았다. 몇 년 전에 조씨문중 사람들에게 이것까지 마저 자르라고 으름장을 놓던 그 손가락마저 날아간 것이었다.

그렇게 일 년을 더 묵힌 후 분필이는 두동면의 진밭이란 마을의 중농에게 시집을 가 평범한 아낙이 되어 줄줄이 아이들을 낳아댔다. 이어 두 여동생 분옥이와 또필이도 하나는 두서면의 봉계로, 또 하나는 중남 들내로 시집을 보내고 외아들 덕칠이는 공부를 잘 해 부산에서 고보를 나와 서울의 무슨 관공서에 촉탁으로 들어가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제 두 내외만 남은 집에 유일한 식구는 조카딸 은실이었다. 사람들은 하기 좋은 말로 작은님이 내외가 곁방살이 주제인 자기 딸들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조카이면서 주인 격인 은실이는 잘 챙겨먹이지도 입히지도 않는다고 험담을 했지만 자라나는 은실이의 혈색이나 옷차림 또 늘 밝은 표정인 것을 보아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작은님이나 조 서방의 됨됨이가 그저 제 식구, 제 욕심을 챙길 정도이지 남을 헤치고 핍박할 정도의 모진 성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은실이는 분필이, 분옥이, 또필이 세 고종사촌언니와 어울려 온갖 소꿉놀이와 장난을 즐기며 세상을 배웠고 동갑짜리 고종사촌 덕칠이와도 사이가 좋으니 의식이 다 풍족한 판에 무슨 분란이 일어날 것도 없었다.

단 한 가지 사람들의 입방아를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이 설, 추석 두 번 명절의 제사문제였다. 처음 은실이가 아직 핏덩이이던 시절 작은님이네 식구가 모 호방네에 들어와 살면서 첫 명절을 넘기고 나자 마을사람들의 커다란 궁금증은 조 서방이 제 본가와 처가의 두 집 제사를 모셔야하는데 과연 따로따로 제물을 마련하는지 또 제사순서는 자기집안의 제사를 먼저 모실지 자기가 몸을 의탁한 처가의 제사를 먼저 모시는지 였다.

사람들은 조 서방이 패가망신하여 처가살이를 하는 형편이니 명절제사는 조 서방네 조상이 아닌 모 호방네 선조들의 제사를 먼저지내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 다음 친정의 대가 끊겨 시집간 딸이 혼백을 모셔온 경우처럼 시가집의 제사가 끝난 뒤 부엌에서 따로 상을 차려 제사라기보다는 그냥 <빈대 코 꿴다.>는 말처럼 그냥 시늉만 내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작은님이가 생선이랑 건어물, 과일을 두 몫으로 사는 것은 물론 안방에서 은실이를 제관으로 모 씨네의 제사를 먼저 지내면서 조 서방 내외와 네 아이들이 공손히 절을 하고 사랑방에서 조 씨네의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밝혀져 노름장이치고 경우하나는 밝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 씨 집안에서도 앞으로도 그저 잊지나 말고 처가 모 씨네의 제사도 잘 지내주기를 바란다는 정도로 끝이 났다.

 

제사준비를 위하여 장꾼들이 서둘러 빠져나가 정오가 지나자 장터는 눈에 띄게 한적했다. 아직 남아있는 닭 다섯 마리를 마저 팔려고 한참이나 기다려보아도 간간이 지나가는 장꾼 중에 눈길 한 번 주는 사람이 없었다. 출출해서 장국밥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입가를 훔치며 나오는데

“삼촌, 삼촌!”

등 뒤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들리면서 호리호리한 그림자와 함께 풋보리바심처럼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이구, 우리 애기씨 은실이 왔는가베.”

돌아서니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여드름이 듬성듬성한 은실이가 방긋 웃고 서 있었다. 반듯한 가르마며 치렁치렁한 머리채에 반듯한 이마 귓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에서 바야흐로 한창때를 맞이하는 처녀티가 완연했다.

“삼촌은 혼자서 뭐 묵노? 이 은실이는 좀 안 주고. 삼촌 나빠!”

옛날 누룽지를 달라고 조르듯 기출이의 품을 파고들어 손을 잡더니 가슴을 통통 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다정한 부녀간의 모습이었다.

“언양공립국민학교 수석졸업생이 와 이래 버릇이 없노? 공부 잘 한다는 말이 다 거짓말인가베?”

기출씨가 등을 토닥이는데 머리카락에서 동백기름냄새와 함께 은은하고 익숙한 살 냄새가 풍겨왔다. 어찌 된 셈인지 조금씩 자라면서 은실이는 목소리와 걸음걸이와 맵시가 점점 끝님이를 닮아가고 있었다. 동글납짝한 얼굴에 반듯한 이마와 완강한 콧부리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당돌하면서도 사내를 끌어들이는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아재도 들었제?”

“뭐 말이고?”

“내지인 교장선생이 날 서울에 진학하라고 해서 우리 집이 발칵 뒤집힌 거.”

“그래. 소문은 들었지.”

남은 닭 다섯 마리를 새끼로 묶어놓고 기출이와 은실이는 떡집에 앉았다. 쌀가루반죽에 양대를 넣고 주먹으로 빚은 떡을 오물오물 씹는 은실이의 입모양을 한참이나 바라보는데

“우짜면 좋겠노?”

“뭐로?”

“서울로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글키 말이다. 안 그래도 나도 소문을 듣고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그 기 가기도 그렇고 안 가가도 그렇더라. 말하자면 은실이의 장래, 비록 여자지만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고 서울에 유학을 해서 똑똑한 신여성이 되어 일신의 영광과 호사는 물론 가문을 다시 일으키면 얼마나 좋겠노마는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세아 놓고 간 빼간다는 서울에서 하루, 이틀도 아닌 긴 세월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만 만약 그 먼 곳으로 한 번 가고나면 다시 오기도 어려울 터, 그러면 남아있는 언양의 집과 논밭이며 제사와 산소는 누가 챙길지, 물론 니 작은고모 조 서방 내외가 있다지만 그것도 니가 있을 때 하고 없을 때 하고 다를 것이 뻔하고 그리고 또...”

“또?”

“내가 우리 은실이 보고접어 우짜꼬 말이다. 하하하”

“아이고, 아재도 참!”

입을 삐죽거리며 은실이가 기출이를 꼬집는 시늉을 하자

“아이고 눈꼴시러버라. 닭장사아재는 지 딸도 서이나 있다카던데 호방댁 손녀가 그래도 좋소?”

떡장수아주머니가 끼어드는데

“좋고말고. 내 딸 서이까지 다 이렇게 귀여우면 나는 매일 밥 안 묵고도 배가 터져 죽을 끼다. 너무 좋아서 말이요. 하하하.”

이렇게 한참 시간을 끌고 나서

“어쨌기나 배우기는 배워야제.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판에. 그러나 꼭 그 먼 서울로 가야만 좋은 것일까? 내가 듣기로 언양서 하루걸음인 부산 초량인가 좌천동인가 그전부터 왜관이 있어 사람이 많이 끓던 시내 산기슭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일신여고라는 여학교가 있었는데 기미년에 동래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많은 여학생이 왜경에게 곤욕을 치른 후에도 학생들이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우리 한글을 쓰거나 독립운동에 군자금을 대면서 저들이 말하는 내선일체에 걸림돌이 되어 재작년에 학교를 폐쇄시킨 동래일신여학교가 되었지.

그 일신여학교가 폐쇄되자 동래읍의 여러 유지들이 재단을 설립하고 학교를 인수하여 동래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동래읍성안의 복천동인가 어딘가에 다시 학교를 세웠다고 들었다. 요즘은 부산의 장사꾼들도 이런저런 차편으로 해안에 왔다갔다 하는 판이고 뭐잖아 빠슨가 뭔가 아침저녁으로 정기적으로 댕기는 차편도 생긴다고 하니 그것도 괜찮지 않나? 그 정도 거리면 명절이나 제사 같은 집안의 대소사도 안 빼묵고 방학 때는 쨤을 내어 집안의 논밭이나 산소도 돌아보며 이제 집안의 기둥인 종녀(宗女)로서의 소임도 다 해야 될 꺼 아이가?”

“알겠심더. 한 번 생각해보지요.”

“정초에 혹시 명촌의 큰 이모나 이모부를 만나거든 의논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일은 내보다는 명촌의 김 서방 형님이 더 잘 알 것 같으니 니하고 같이 부산에 한번 갔다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한집에 사는 조 서방 형님이 해 줘도 되지만 잘 안 갈라 칼 끼다.”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떡집을 나오는데

“삼촌. 이리 내 따러 좀 오소.”

은실이가 은근히 불렀다.

“와?”

어물전으로 향하는 은실이를 따라가는데

“이거 가주가서 할매하고 국끼리 잡수소. 아아들도 믹이고.”

두 살배기 아이보다도 큰 대구를 가리켰다.

“야가 와 이라노? 내가 왕년에 대구장산줄 모리나?”

“그러니까 더 묵고 싶겠제. 그라고 삼촌 까지매기 좋아하제? 이거 참까지매긴데 가서 꿉어잡수소.”

“와 이라노? 니가 무슨 돈 있다꼬?”

“내 돈 많다. 인자는 고모한테 안 타 쓰고 점방 하나는 내가 세받아서 쓴다. 저금도 많이 있다.”

“좋겠다. 그래도 앞으로 공부하자면 애끼 써라.”

“알았심더.”

“그래 잘 묵으께. 고맙고도 미안타. 어른인 내가 명절이라고 용돈도 주고 해야 될 낀데 어린 니 한테 이런 신세를 지다니. 옛날에 니 아부지 치만이형님과 막내고모 끝님이가 매일 내를 챙기디마는 인자는 니가 내를...”

울컥하는 마음에 말을 더듬거리자

“삼촌은 울본가베. 어서 집에 가이소. 삼촌 설 잘 쇠이소.”

“그래. 니도 설 잘 쇠어라.”

 

그렇게 은실이한테서 얻어온 대구와 가자미를 빨랫줄에 걸어놓고 설과 보름을 지나고 영등할미가 내려온다는 음력 2월 초하루까지 기출이 내외와 네 아이들이 포식을 하여 얼굴이 다들 반들반들 해진 것 같았다. 물론 날마다 들리다 못해 요즘은 아이들 방에 자고가기가 예사인 할머니 서촌댁도 잔뼈가 없고 부드러운 흰 살이 많은 대구국을 “어허 시원타!”를 연발하며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집에 드러누운 큰 아들 선출씨와 식구들이 짠한 눈치였다.

큰아들 내외가 평소에 몸이 가볍거나 일을 부지런히 하는 편도 아니고 시어머니나 아이들에게 살가운 것도 아니어서 특별히 무얼 챙겨주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즈음의 서촌댁이나 기출씨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제 열일곱이 되는 조카딸 복찬이가 재작년에 대구에서 무슨 공장을 한다는 기와집 향산댁의 큰아들을 따라 대구로 가서 아이도 보고 물도 긷는, 말하자면 식모살이를 갔는데 지난 설에 고향에 다니러온 기와집아들에게 우리 딸은 잘 있는지, 웬만하면 같이 데리고 오지 않았는가 안부를 묻다 그만 낭패가 나고 말았다.

그 철딱서니 없는 것이 지난 설 대목에 가끔 집에 출입하는 공장의 나이든 직공 하나하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이 어린 복찬이야 온갖 달콤한 말로 다가오는 늙은 총각의 꾐에 빠졌을 뿐이지만 입사한 지 오래 되어 사장의 신임을 받아 이미 수금까지 다니던 총각이 상당한 액수의 물품대금을 들고튀었다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처녀가 몸을 버려 아이를 뱄다거나 한 푼 없는 빈털터리에게 시집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멀리 도망가 깊숙이 숨은 만큼 당분간은, 아니 아주 오랜 동안이나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날 눈만 반들반들하여 구들장을 지키는 선출씨야 얼마나 섭섭할지, 또 아무리 섭섭하더라도, 설사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라도 눈 하나 깜작 않고 억지로 편해도 편하면 그뿐이라고 아무 내색을 않겠지만 가뜩이나 마음이 여리고 야무진 구석이나 강단이라고는 찾아볼 데가 없어 마을에 질정 없다고 소문난 형수 상남댁이 눈물을 질금거렸다. 기출이는 남은 대구를 반으로 나누어 큰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봄은 봄이라 해도 음력이월은 아직도 한겨울 찬바람의 잔가시가 남은 것처럼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의 잠깐을 뺀 아침저녁으로 늘 옷차림이 얇은 기출씨네 여섯 식구와 선출씨네의 일곱 식구의 가슴팍을 찔러대고 손끝, 발끝을 시리게 했다. 해가 지면 작은 산등성이 하나 의지하지 못하고 남천내 갱빈에 바로 붙은 버든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운문재를 넘어오는 북풍과 석남재를 넘어오는 서풍에 그대로 알몸이 되어 시달려야했다.

바람막이라야 집 뒤를 따라 울타리를 겸해 죽 둘러놓은 낮은 대밭이 전부였는데 여남은 살 되는 사내아이들이 서까래 끝 초가지붕을 뒤지고 댓가지를 흔들어 참새를 잡느라고 법석을 뜨는 긴 겨울밤이면 마을의 늙은 아낙과 할머니들은 하나둘씩 기출씨의 좁은 집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대밭을 흔들어대다 가끔은 지붕의 이엉을 날아가게 하고 삽짝 옆의 감나무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는 바람소리 속에서 기나긴 겨울밤을 보내기에는 기출씨의 집에 찾아와 팔도강산을 떠돌던 온갖 이야기랑 그 총기 좋은 머리로 들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한 구절도 빠뜨리지 않고 온전히 기억하는 온갖 타령이나 판소리, 그러니까 <짜린소리, 진소리>를 듣기가 그만이었다.

어쩌다가 누가 엿이나 박상, 삶은 고구마를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한 해에 한두 번, 명촌댁이 담은 시원한 동치미가 떨어질 즈음이면 땅에 너무 오래 묻어 노랗게 움이 돋은 무나 아직 움이 들 튼 미나리를 뽑아와 먹으면서 그 긴긴 이야기 <이바구 또는 이약>의 밤은 계속되었다.

아낙들에게 한겨울 강원도 겨울바다에서 이까나 쑤루메라고 불리는 오징어를 잡아 말리고 태백산의 덕장에서 명태를 얼리고 말려 황태를 만들거나 숯을 굽는 이야기, 심지어 신안 시루섬의 염막과 손죽도의 전복 따는 이야기와 흑산도의 조기잡이와 홍어, 하루 종일 걸어도 산이 안 보이는 김제만경의 드넓은 벌판이야기도 마냥 재미있고 신기했다.

 

그러나 그 긴 겨울밤을 새우려면 이야기라면 역시 장화홍련전, 콩쥐팥쥐, 심청전과 춘향전이 제격이었다. 뺑덕어미처럼 미워할 계모나 혼쭐이 나야할 사또 또는 늘 불쌍해 남의 일 같지 않아 절로 눈물을 돋게 하는 심청이와 심봉사, 옥에 갇힌 춘향이와 계모에게 시달리는 장화, 또 콩쥐팥쥐의 이야기는 중간, 중간 시골아낙들의 분노를 자아내거나 눈물을 질금거리게 하기에도 제격이었다. 기억력이 좋을 뿐 아니라 신명이 많고 우스개도 잘 하는 기출씨가 중간중간 감정을 넣거나 숨 가쁘게 타령조로 읊으며 뺑덕어멈이 코큰 총각 엿 사주는 이야기며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는 옥중에 큰칼을 차고 온갖 고초를 다 겪는데 과거에 낙방하고 폐의파립의 이몽룡이 월매를 찾아와 식은 밥을 졸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는 대목을 읊으면 그 입술의 움직임이나 가락에 따라 노파들도 입을 삐죽대고 어깨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또 판소리수궁가를 흉내 내어 읊으면서 저 눈치 없는 촐랑새 토끼가 엉큼한 거북이에게 속아 용궁에 잡혀가서는 자신의 간을 빼먹으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자기의 간은 한 달에 보름동안 꺼내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 말린다는 간월산이 바로 저 신불산과 가지산 사이의 간월산이며 지금도 안 간월이나 간월폭포쯤에서 잘 만 살피면 나뭇가지에 걸어 바람에 말리는 토끼 간을 한두 개쯤 찾을 것이라고 우기면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말이 안 믿어지면 향교마을에 가서 갓 쓴 선비님께 물어보라고 그래서 저 간월산(肝月山)의 간자가 사람이나 짐승의 간이라는 간자라고 해서 누가 진짜 물어보니 틀림 없더라면서 과연 갑찬이애비 기출이는 머리도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서상균

그렇게 초저녁에 시작된 이야기가 어떤 때는 자정을 넘기기도 했는데 걸쭉한 판소리나 타령도 좋지만 노파들은 종종 김부대왕(金傅大王)이니 조원이이야기니 하여 나라가 망국 신라경순왕과 마의태자나 조웅전(趙雄傳)의 비장한 이야기를 좋아하였고 분위기가 처질 때마다 기출이가 끼어 넣는

장모님 주실라고 굵은 호박을 삶았는데
삶고삶고 또 삶아서 요강단지를 삶았네.

아주까리 동백아 피지를 마라
산골에 처녀가 대난봉난다.

타령을 따라하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를 손뼉을 치며 합창하는데 어머니 서촌댁의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더니 안절부절하는 것이었다. 기출이가 노래를 멈추고

“어무이 와 그라능교, 어디 아풍교?”

묻자

“아이다, 내 갑자기 중치가 막혀서. 인자 개안타.”

하면서 측간에 나간다고 방을 나갔지만 아무도 그녀가 그 갑오년의 녹두장군의 난리 통에 저 먼 전라도 지리산 달궁마을에서 이 먼 언양땅으로 온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긴긴 겨울밤을 날이면 날마다 막내아들 기출이가 하는 온갖 이야기와 타령을 젤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듣는 서촌댁을 보고 동네 할머니들이

“희한하제 서촌댁이 저 할마이는 기출이가 하는 이바구를 저녁마다 수십 년을 들어도 제헙지도 않은갑제?”

하고 놀려도

“내사 마 잘 생긴 우리 아들이 이바구하는 것도 좋고 얼굴만 쳐다봐도 좋다. 지 자식 이바군데 제헙기는 뭐가 제헙겠노?”

절대로 지루하지도 따분하지도 않다고 잘랐다.

그렇게 긴 겨울이 가고 집집마다 새해 농사를 시작하느라 사내들은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아낙들은 호미로 울타리 밑을 뒤져 호박구덩이를 파고 채소를 심느라고 야단이었고 덩달아 털갈이를 시작한 소와 염소와 돼지가 온몸을 들썩이며 움어- 메에- 꿀꿀 울어대며 묵은 털을 날리면 닭들이 부산하게 마당의 네 구석을 돌아다니며 부리로 땅바닥을 헤져 지렁이를 잡고 수탉은 그 틈새에 시도 때도 없이 암탉의 등을 타고 내렸다.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돌아가는 그 활기찬 시절에 단 한 집 기출씨의 큰 집 선출씨네는 사람이 살다나간 빈집처럼 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쌀 한줌에 보리쌀과 시래기를 섞은 죽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우고 서촌댁이 작은 집 알라를 본다고 나서고 나면 밥숟갈을 놓자말자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질이 유한 두 사내인 아버지 선출씨와 둘째아들 정찬이는 각자 안방과 뒷방에서 곧바로 구들장을 지고 나이 스무 살이 되어도 오른 쪽 무릎과 발목을 못 써 일을 못 하는 큰 아들 동찬이만 절룩거리며 마당을 서성거리다 서향집 뒤란에서 볕 바라기나 하는 형편이었고 늘 푼수 없는 아내도 방문 밖을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이제 아홉 살이 되는 상찬이나 여섯 살의 종찬이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할머니가 있는 작은 집을 찾았다. 거기엔 할머니나 사촌 여형제나 사내동생 일찬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작은 집엔 매일 점심도 그르지 않고 또 국도 장도 자기네 보다 달고 맛있는 것을 아이들이 알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후한 명촌댁이 늘 밥을 좀 여유있게 하는 법이라 밥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지만 매일 시어머니 서촌댁이 거꾸로 며느리 명촌댁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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