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1)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4장 서촌댁 ①귀남이

이득수 승인 2022.03.01 10:47 | 최종 수정 2022.03.03 10:32 의견 0

4.  서촌댁 ①귀남이

조 서방의 초상을 치르는 사이사이 탁주를 마신 기출씨가 낮술이 취해 한동안 누웠다가 신불산에서 간월산 위에까지 저녁놀이 빨갛게 불타오르는 해질녘에 측간에 갔다 오는 참이었다. 

아직도 술이 덜 깬 채 그 눈이 어질어질한 노을을 보며 사람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저렇게 불타오르는 노을처럼 어느 한 순간 황홀한 그 빛이 시나브로 사위어 흔적이 없어지는 애련한 슬픔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사립 앞이 저승이라는 말처럼 단 한 순간, 한 발짝 앞이 바로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의 늪인지 골똘히 생각에 빠졌는데 그야말로 사립 앞에 무슨 저승사자처럼 커다랗고 시커먼 그림자가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놀란 기출씨가 눈을 비비며 찬찬히 사립 앞을 훑어보는데

“여게가 기출이집 맞제? 자네가 혹시 기출인가? 맞제, 기출아!”

눈가에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노파가 사립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고 등 뒤에 아까 본 키가 커다란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누, 누구신지?”

하던 기출이가 갑자기

“누님, 귀냄이누님!”

외마디소리를 지르자

“그래 내다. 기출아.”

다가오면서

“야야, 만택아 인사해라. 너거 끈텅 외삼촌 기출이다.”

뒤에 선 아들을 돌아보는 눈가에 눈물이 흥건했다. 순간

“누고, 이기 누고?”
방에서 세 살짜리 금찬이를 안고 나오던 서촌댁이

“귀냄아, 아이구 불쌍한 내 새끼!”

부르짖자 

“아이고, 엄매! 내가 잘못 했심더. 내가 죽일 년이지요.”
“그래. 이 독한 년아! 이기 얼마만이고? 나는 살아서 다시는 니를 몬 보고 죽는 줄 알았다.”

모녀가 끌어안고 우는데 일흔이 넘어도 아직도 허리가 꼿꼿한 서촌댁보다 이제 쉰둘로 한 뼘이나 키가 작은 딸이 갓난애처럼 매달려 울고 있었다.

“얼매나 고생했으면 이렇게도 늙었노? 와 이렇게 걸망하노?”
“아임더, 엄마.”

모녀의 뒤에서 어깨가 구부정한 두 숙질이 어둠에 젖어들고 있었다.

“만택아, 아니지. 인자 니도 나이 서른이 훨씬 넘었겠제? 그래 조카야, 그동안 와 그래 소식이 없었노? 하긴 나도 내 산다고 하매 가본다, 가본다 카면서 하나 밖에 없는 누부를 한 번도 찾아가지 못 했지만.”
“글키 말임더. 사는 기 다 뭔지. 지도 외삼촌을 닮아 역마살이 들었는지 거리구신이 붙었는지 열다섯에 객지로 떠나 이적지 떠돌다가 작년에 해방되고 집에 들어왔지요.”
“그랬구나. 그랬구나.”

기출씨가 만택이를 방으로 이끌자 서촌댁과 늙은 딸도 따라왔다. 아직 어린 금찬이, 일찬이, 귀찬이가 뜻밖의 손님들을 흘낏흘낏 쳐다보는데

“야아, 아부지 누님이면 고모다. 새이야, 저 할매가 우리 고몬갑다.” 

눈치 빠른 순찬이가 언니 갑찬이에게 속삭였다. 아내 명촌댁을 불러 시누올케간의 인사를 시킨 뒤 기출이는 큰집식구까지 넉넉하게 밥을 하라고 일렀다. 얼핏 듣기에 누님이 자기가 시집갈 때까지 자란 큰집에 찾아갔는데 장남 선출씨는 보이지 않고 마흔 너덧의 아낙이 짐작으로는 올케가 되는데 그저 소 닭 보듯 멀뚱히 쳐다볼 뿐이고 스무 살이 넘어 보이는 다리 저는 총각도 도무지 반응이 없고 여남은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하나만 멈칫멈칫 자신들을 따라오더라는 것이었다. 

이제 너희들에게 이런 고모와 고종사촌이 있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어 암탉 한 마리에다 이제 병아리티를 벗어난 중닭까지 한 마리 더 잡았다. 아무리 무를 쑹쑹 썰어 넣고 국물을 많이 잡아 볶는다고 해도 큰 집 식구까지 열댓이나 되는 식구가 단지 껍질이나 국물이라도 맛을 보려면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그 많은 식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으면서 비로소 누님 귀남씨가 지나온 시집간지 무려 35년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점심녘에 살짝 낮잠에 든 귀남씨가 안 그래도 한 번 찾아보지 못 해 한이 맺힌 제 어머니 서촌댁이 죽는 꿈을 꾸고 놀라서 마침 작년에 집에 들어온 아들 만택이를 앞세워 부랴부랴 왔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서촌댁이 숟가락을 떨어뜨리자 모녀가 다시 한 번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상을 치운 뒤 오늘은 모녀가 한방에서 자게 명촌댁이 일찬이, 금찬이를 데리고 큰집으로 가서 동서 간에 자기로 하고 갑찬이, 순찬이 두 딸이 큰방으로 옮긴 아랫방에는 기출씨가 만택이와 나란히 누웠다. 

 

등에 업힌 갓난아이 때 보고 처음 보는 서른다섯의 장성한 생질과 나란히 자리에 누운 기출씨는 누님과 조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만택이는 자기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아무것도 없으며 남의 집 모내기를 하고 콩밭을 매는 품팔이로 보리나 콩을 조금씩 얻어오는 어머니와 하늘아래 첫 번째 마을이라는 보삼마을에서 날마다 어머니가 일을 하는 밭둑에서 서성거리거나 좀 자라서는 일을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 열 살쯤 되어서는 통도사 앞 신평마을의 공립보통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공립국민학교에 다니다가 폐병에 걸러 요양삼아 통도사말사인 어떤 암자에 들어간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몸이 좀 낫고 나이가 들면서 정처 없이 이 절, 저 절,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다가 온 나라가 해방의 감격으로 들뜬 지난 해 문득 어머니가 생각나 보삼마을로 돌아와 여전히 남의 집 밭을 매는 가난한 어머니와 다시 상봉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자네 어머니, 그러니까 귀남이누님은 왜 여태껏 단 한 번도 친정걸음을 않았는지, 어머니나 남동생들이 보고 싶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니까 만택이는 자신이 알기로 우선 먹고살기도 어려웠겠지만 어머니는 왜 그런지 세상 밖이나 남의 앞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성격이었다고, 그 이상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초저녁에 몇 마디를 나누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똑 같이 잠이 깬 숙질간은 이번에는 각자 자기가 떠돌았던 객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기출씨가 주로 바닷가를 중심으로 간혹 산중이나 들판을 떠돈 데 비해 만택이는 대체로 금강산,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도의 절간을 떠돌았고 심지어는 함경도의 백두산이나 평안도의 의주와 평양, 진남포에다  황해도 해주와 황주를 비롯하여 팔도강산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세상이치가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렇게 팔도강산을 떠돌았다면 상당한 법력의 선사가 되었을 것이 아니냐고 묻자 만택이는 자신도 머리를 깎고 바랑을 매고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을 떠돌아다니며 묵새기기는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주로 절에서 곡기를 채우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가끔 민가나 저자거리를 돌며 목탁을 치고 염불을 웅얼거리는 운수행각으로 몇 푼의 돈이나 곡식을 얻어 연명하며 이리저리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었을 뿐 원래 신심이 없었는지 애초부터 도무지 초발심(初發心)이 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출씨가 얼핏 느끼기에 만택이의 말투에는 보통사람과 뭔가 다른 낌새, 그러니까 하루하루를 먹고살기 바쁜 농사꾼, 장사꾼의 절박한 심정도 아니고 스스로 유림이니 양반이니 선비라 자부하는 게으르고 고루한 책상물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만사에 달관한 고승대덕도 아니면서 어딘가 좀은 비뚤어지고 불만에 젖은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너무나 오랜 시간 혼자서 지낸 탓이겠지 싶으면서도 어쩌면 그 방랑의 과정에서 논밭이나 집이나 모는 재산을 내 것도 네 것도 없이 꼭 같이 일하고 꼭 같이 나눠먹는다는 그 사회주읜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이 아닌가는 우려가 들기고 했다.

그런데 아침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누님 귀남씨가 서촌댁에게

“어무이, 이래 봐도 이 아이 만택이가 기가 찬 재주가 다 있다우.”

하면서 얼굴이 귀밑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만택이를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꺼낸 이야기가 여간 기가 찬 것이 아니었다.

대동아전쟁으로 학도병이니 보국대니 정신대니 공출과 부역으로 한창 왜놈이 조선사람을 쥐어짜던 보릿고개의 봄날에 웬 젊은 여자 하나가 서너 살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를 데리고 보삼마을로 최만택이를 찾아왔는데 그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영판 만택이를 빼닮았더라는 것이었다.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海棠花)가 절경이라는 원산이 고향이라는 아이어미는 고등여자학교까지 다니던 원산에서 제법 행세하는 상인의 딸이었는데 어느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금강산 유점사에 피서를 갔다가 우연히 키가 후리후리하고 박박 민 둥글고 파르스름한 뒤통수가 너무나 단정하고 인물이 훤한 젊은 스님 만택이와 눈이 맞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어느 숲속에서 댓바람에 통정(通情)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만나자던 만택이는 종적이 묘연했고 유점사에 승적을 두지도 않은 운수승이라 그야말로 한바탕의 꿈과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원산으로 돌아간 그녀는 겨울방학이 되기도 전에 학교를 그만두어야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 짧은 단 한 번의 정사에서 아이를 가져 자꾸만 배가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풀 때쯤 그녀의 부친이 다시 유점사를 찾아가 이러저러한 스님을 수소문하다 다행히 한동안 같이 여기저기를 떠돌던 도반을 만나 그 스님이 양산통도사 앞 논꼴인가 보삼인가 하는 마을에 홀어머니가 있는 만택이라는 이름의 청년이라는 것을 알아왔다.  

아비가 당장이라도 양산으로 내려가 그 어미라도 잡고 따지고 싶었지만 이 엉뚱한 생명과 사단을 불러온 장본인인 만택인지 천택인지 하는 탁발승이 사라지고 보니 그것도 참 싱거운 노릇이었다. 결국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 아이를 데리고 찾아가서 아이아비를 수소문해 같이 살거나 아니면 아이라도 제 아비 쪽에 주고 아직 아까운 나이의 어미는 새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서 아이가 세 돌이 넘어 네 살이 되자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찾아온 것이었다.

명색 항구도시 원산의 부잣집 딸인 아이어미가 어쩌면 지나가는 길에라도 어미를 보러 만택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면서  그 깊은 산골에 주저앉아 시어머니격인 귀남씨를 따라 개울에 빨래도 하러다니고 밭에 나가 호미질도 배울 때였다. 하루는 우편국에서 편진지 소폰지 무엇이 왔는데 희색이 만연한 그녀가 이튿날 시어머니를 데리고 신평의 저자거리로 나가자고 했다. 원산에서 거금이 송금되어 온 것이었다. 

일단 저자거리로 나가자 사거리의 식당에서 소고기국밥을 시켜 아이까지 삼대가 배불리 먹고 모자의 옷가지와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는 물론 시어머니의 이불과 요, 옷가지와 옷감을 한 아름 사고 소고기도 두어 칼 베어서 이고 들고 올라오면서 아이어미는 이제 약간의 논밭을 사드릴 테니 다시는 남의 집에 일을 다니지 말라고 했다. 이튿날 당장 대목을 물색해 허물어져가는 초가집의 지붕을 올리고 모자가 생활할 방을 더 넣기도 했다.

길가다가 도깨비방망이라도 주운 듯 뜻밖에 생긴 손자와 논밭과 많이 배워도 공손하기 짝이 없는 며느리가 생기고 집도 고치고 깨끗하고 두툼한 새 이불도 덮는 그야말로 꿈같은 세월을 보내기를 한 해도 되지 않아 해방이 되자 마치 돌아오기를 벼르기라도 한 것처럼 느닷없이 만택이가 어미를 찾아 온 것이었다. 처음 본가를 찾은 만택이는 자신이 떠날 때보다 지붕도 높아지고 어딘가 윤택하고 온기가 감도는 집을 의아하게 쳐다보다 늙어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의 등 뒤로 따라 나오는 젊은 여인과 너덧 살이나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러나 그동안 객지생활에서 닳고 닳은 배짱으로 애써 태연한 척 눈을 내려 감고

“아이구, 아 자식아! 만택아, 이 괘씸한 자식아!”

소리치는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 젊은 여인의 얼굴을 흘낏거리더니 문득 유점사의 여름밤이 떠올랐는지 

“어어, 어떻게 찾아왔지?”

히쭉 웃으며 등에 업힌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어쨌거나 아들내외에 손자까지 누가 봐도 오롯한 가족을 갖추고 이제 밥걱정이 없어진 귀남씨가 차마 입에 닮기도 어려운 창피한 일로 도망치듯이 떠나온 친정을 무려 서른다섯 해만에 찾아온 것이었다. 어머니와 남동생들도 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살만한 처지의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서상균

그렇게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만택이 내외가 이제 신평에 논밭을 마련하고 새집을 지어 가게라도 할 작정이라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추석을 쐬고 집터를 닦을 때면 기출씨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그 때 만택이는 지나가는 말처럼 원산의 처족도 모두 불러내려 남한에서 같이 살 생각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추석이 지나자말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벼락,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추석을 며칠 앞둔 날 귀남씨가 측간에서 일을 보다가 죽은 것이었다. 매일 시래기나 풀대죽만 먹다가 뜻밖에 부잣집 딸을 며느리를 보아 밥걱정을 놓은 것은 물론 날마다 비린 생선은 물론 소고기를 달고 살아 소화가 잘 안 되어 측간에 오래 쪼그리고 앉은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측간에 간지 너무 오래 되었다싶어 며느리가 슬쩍 들여다볼 때 귀남씨는 벌써 그 남루하고 고단한 생애를 벗어버리고 저 홀가분한 나라를 향한 열명길을 지나간 지가 한참이나 뒤였다.

그러면 왜 연락을 않았느냐고 기출씨가 묻자 워낙 창졸간에 당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미 명절이 임박해 모두가 꺼리는 상사(喪事)를 친정이나 이웃에 연락하기도 그렇고 또 모처럼 얼굴을 본 큰딸에 대한 정과 사랑이 새록새록한 외할머니에게 참아 딸의 죽음을 알리기도 뭣해서였다고 했다.

듣고 보니 딴은 그렇기도 했다. 기출씨는 가을걷이를 하고나서 만택이를 앞세워 누님의 산소라도 가볼 겸 한 번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추수를 다 마치고 김장을 하고 메주까지 다 끓인 동지 앞날에 기출씨가 큰맘 먹고 보삼마을로 찾아 나섰을 때였다. 대충 짐작으로 새로 손을 본 듯한 집을 찾아 주인을 찾아도 기척이 없었다. 한참이나 집 앞을 서성거리다 조금 떨어진 이웃집으로 찾아가 만택이네늘 물으니 역시 죽은 귀남이처럼 이가 빠져 합죽하고 주름살이 다글다글한 노파가

“아이구, 그 불쌍한 우리 갑장 만택이애미!”

혀를 끌끌 차더니 기출씨가 생긴 것부터 만택이의 외삼촌임을 확인한 뒤에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그리 급했는지 어미의 초상을 치자말자 만택이네는 어렵게 마련한 보삼마을과 신평뜰의 논밭을 서둘러 처분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아직 팔리지도 않은 보삼의 집과 세간을 그대로 둔 채 어느 날 마을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않고 홀연히 세 식구가 떠나버렸다고 했다. 처갓집 돈으로 부산에 큰 상가건물을 사고 장사를 하러갔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런 일로 그렇게 바쁘게 갈 일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아이어미의 친정인 원산으로 떠난 것 같다고, 당시에 벌써 북에는 새로 들어선 김일성정권이 삼팔선의 왕래를 엄격히 단속하기 시작한 시절이라 그녀로서는 친정부모를 한시바삐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웃집할머니와 귀남이누님의 산소에 들렀다가 한참이나 눈물을 짜고 기출씨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어머니 서촌댁이

“야야, 내 좀 보자!”

심상찮은 목소리로 기출씨를 불렀다. 그리고 어데로, 왜 갔느냐, 왜 팔월이 지나고 동지가 다 되었는데 귀남이는 안 오느냐, 그리고 지난 번 만택이가 나타나서 도망치듯 사라진 일은 무엇이며 요즘 왜 귀남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그렇게 간절하게 묻는 것을 너무 속이는 것도 죄가 되는 것 같고 또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속일 것도 못 되어서 기출씨는 마침내 모진 결심을 하고

“어무이 놀래지 마이소.”

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야기도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고, 내 새끼!”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서촌댁이 픽 쓰러져버렸다.

 

그렇게 쓰러진 서촌댁은 들판 가득 가을까마귀가 내려앉아 베어낸 그루터기의 하얀 무서리사이로 나락이삭을 찾고 꽁꽁 언 연당의 빙판으로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한겨울이 되도록 도무지 일어나지 못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