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4)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장 열두 식구 ②노름꾼 버릇 못고친 조 서방 

이득수 승인 2022.02.21 14:02 | 최종 수정 2022.02.24 10:15 의견 0

1. 열두 식구 ②노름꾼 버릇 못고친 조 서방 

장가를 들고 식구가 늘면서 넉넉잖은 농사로 해마다 늘어나는 아이들을 건사한다고 날마다 붙어사는 어머니 서촌댁을 슬그머니 작은집에 밀어 넣고도 봄만 되면 양식이 떨어져 어떻게든 쌀과 곡식을 빌려가고는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는 함흥차사나 강원도포수처럼 단 한 번도 돌려주는 법이 없는 형 선출씨네 식구까지 먹여 살리느라 도무지 허리를 펼 수가 없어 다시 저잣거리에 나왔을 때였다.

이제 원래의 저잣거리는 처음부터 있던 가게만 있고 난전들은 모두 미나리꽝을 매워 넓게 지은 새 장터로 옮겨가고 없었다. 그 새 장터도 그냥 난전이 아니라 좌우로 선을 긋고 기둥을 세워 비바람을 막는 점포형태로 변하여 이전처럼 마구잡이로 전을 벌일 수가 없었다. 이미 소캐집 아저씨도 세상을 떠나고 그 큰사위가 새 장터에 점포를 사서 솜을 사고팔게 되어 장바닥에 더는 의논할 상대도 없는 기출씨는 연구 끝에 우시장 한 귀퉁이에서 닭을 사고파는 닭장수를 하기로 한 것이 벌써 20년이 가까웠다.

원래 논밭이 좁은 이런 반촌에서는 곡식을 내어 옷을 사고 가용잡비를 충당하는 집은 열에 한 둘이고 대부분이 남의 송아지를 받아 두어 해 길러 새끼를 빼고 어미만 돌려주는 배내기 소를 길러 목돈을 쥐거나 닭이나 돼지, 염소를 길러 푼돈을 만지는 형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값이 싸고 따로 먹이가 필요 없는 닭이 대종이었다. 그래서 시골아낙들은 호롱불을 밝힐 석유나 성냥, 비누를 사기 위해 장날에 달걀을 들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월사금을 내거나 명절의 제사를 모시는 경우에는 커다란 수탉이나 통통하게 살이 찐 씨암탉을 한두 마리 이고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나오는 닭들을 키가 장대 같은 기출씨가 반강제로 빼앗다시피 달랑 들고 흥정을 하면 아직도 내외를 심하게 하던 시절이라 시골아낙들은 별 까탈을 부리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닭을 팔았다. 그렇게 산 닭을 기출씨는 차를 가지고 올라오는 부산의 도매상에게 약간의 이문을 붙여 팔았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근 쌀 한 말에 가까운 수입이 있는 날도 있었고 어떤 때는 본전건지기가 힘든 날도 있었다.

또 여름철에는 팔다 남은 닭을 집으로 가져가 다음 장날이 되는 5일 동안 아이들을 시켜 개구리를 많이 잡아다 먹여 통통하게 살을 찌워 꽤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했지만 갑자기 목에 막이 생기고 숨을 못 쉬고 꾸벅꾸벅 졸다 죽는 닭 병, 디프테리아에 걸려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설 안날 2 ,7일 제 날짜도 아닌 임시장날의 언양 장터는 명절준비를 위하여 나온 장꾼과 장사꾼들의 고함소리와 흥정으로 후끈 달아올랐고 이리저리 부대끼는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야야, 내 닭 한 마리 도.”

작은설이라고 불리는 섣달 그믐날의 장에서였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작은님이가 빙긋 웃고 서있었다.

“아이구, 누님잉교? 갑자기 닭은 웬 닭을 요?”

“니 자형 조서방 그 인간이 통 힘을 못 쓰고 드러누벘다 아이가? 이라다가 제사도 몬 지낼지 모리겠다.”

“와요? 자형이 어데가 안 종교? 하기사 몇 장따나 안 비디만은.”

마흔 여덟. 벌써 정수리의 머리털이 많이 빠져 머리 밑이 훤하게 드러나고 눈가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작은님이를 찬찬히 바라보며 기출이가 묻자

“와는 무슨 와고? 한평생 쪼그리고 앉아 화토장이나 만졌으니 눈도 어둡고 허리도 아프고 무르팍도 절딴 났겠지. 거기다 주야장창 술 마시고 담배만 피웠으니 지가 깡철이 아니라 무쇠라도 견딜 수가 있겠나? 인제는 감기만 걸려도 안 낫고 겨울 내내 기침을 달고 살고 측간출입도 어렵다. 이라다가 올겨울에 뭔 변이라도 날까싶어 내사 간이 하나도 없다.”

“뭐, 해동하면 낫겠지요. 원래 강골이 아입니껴?

“그라문 얼마나 좋겠노?”

방금 꼬끼오! 하고 정오라도 알릴 듯이 울어대던 제일 실한 장닭 한 마리를 날개를 젖히고 다리를 묶어 들고 가기 좋게 작은님이에게 건네자

“엄청 크고 실하구나. 고맙데이. 많이 팔아라.”

돌아서던 작은님이가 퍼뜩 돌아서면서

“기출이자네 설에 우리 집에 한분 오너라.”

“와요? 또 뭔 일이 있능교?”

“은실이 그년 때문에 말이다. 난데없이 서울로 공부하러가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아이가? 거기 어데 한 두 푼 드는 일인가, 또 이제 열다섯 살 어린 처녀가 홀몸으로 세워놓고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를 우째 간단 말인가?”

“야, 시간 봐서 가든지요.”

 

그랬다. 작은님이가 기출이에게 말하기도 전에 모 호방네의 근황은 이미 장바닥에 손금처럼 빠삭하게 소문나 있었다. 그 사이 밥하던 할머니도 죽고 아홉 살에 심상소학교에 들어간 은실이는 열다섯 살에 졸업을 했다. 머리가 좋고 행동거지가 똑 부러져 사내아이들보다 성적이 좋아 수석으로 졸업한 은실이를 담임선생은 물론 일본인 교장선생까지 이대로 시골아낙이 되게 두기에는 아깝다, 집안도 넉넉하니 서울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동경유학교를 마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이 되어 내선일체(內鮮一體)에 기여할 큰 인물로 키워야 된다고 바람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그러자 은실이를 돌본다는 명분으로 친정집에 눌러앉은 작은님이네에게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여섯 식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지냈는데 막상 은실이가 서울로 가면 우선 학비도 많이 들뿐 아니라 서울에 거처할 집을 마련한다면 언양의 논밭이나 점포, 심지어 은실이 혼자서는 너무 넓고 관리하기도 힘든 집을 팔지도 모르니 작은님이네로서는 뜻밖의 횡액이 닥친 것이었다. 만약 시집이라도 가서 은실이가 들어앉으면 이제까지 살던 집도 비워 주어야 하고 또 자기들이 마음대로 세를 받아먹던 가게 둘과 도지를 받던 마구뜰논을 내어놓아야 하니 혼처만 나오면 무슨 흠집을 잡고 악담을 하며 훼방을 놓는 작은님이 내외의 소문은 장날마다 장사꾼과 장꾼들의 입방아에 올랐고 공연히 작은님이 내외의 욕을 해대면서 한순간이나마 그들은 고단한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나 괜한 신명에 젖었다.

언양장터의 장사꾼과 근동의 장꾼들은 벌써 10년도 더 전에 삽재의 노름장이로 유명한 조 서방이 여섯 식구를 인솔하여 그 넓은 모 호방네 집에 밀고 들어온 이후 과연 저 집안이 어떻게 돌아갈지, 틀림없이 무슨 동티가 날 것이라고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장꾼들이 우려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조 서방과 작은님이를 욕하고 가엾은 은실이를 동정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이 죽은 모 호방이 언양현 6개 면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너무나 가혹하게 농사꾼들을 들볶고 등을 친 죄 값이라면서 입방아를 찧었다.

온 동네서 걱정하던 첫 번째 일은 과연 작은님이 내외가 제 아이 넷과 조카 은실이를 아무 차별 없이 두루 잘 돌볼 건지 의문이었는데 일단 어린 시절은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었고 처음에 사립영명학교에서 사립보통학교로, 다시 언양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다 4년 전부터는 언양심상소학교가 되고 마침내 작년부터 언양공립국민학교로 불리는 학교에도 똑 같이 보냈고 방도 자기들의 세 딸들과 같이 쓰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도 명색 은실이가 집 주인이라 안방은 아니더라도 독방은 내어주어야 원칙이라고 했지만 은실이 자신이 분필이를 비롯한 제 고종사촌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데다 물 한 그릇이라도 웬만하면 제 스스로 떠다먹고 고모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어 제법 처녀꼴이 나는 한 십여 년간은 세간의 의혹과 달리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의 이야기가 재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주변의 입방아에 오른 것은 역시 노름장이 조 서방이었다. 노루꼬리는 눈밭에 삼 년을 묵혀도 희어지지 않는다고 하듯이 어디 그 노름꾼의 버릇이 금방 고쳐져 개과천선 양반이 될 것인가? 호방댁이 죽을 즈음 이미 전 재산을 탕진, 패가망신의 오갈 데 없는 신세로 제 어미의 초상을 빌미로 들어와 다시는 나갈 생각을 않고 그 넓은 집에 눌러앉아 점포 세와 도조를 몽땅 챙겨 형편이 피고 얼굴에 부옇게 살이 오른 조 서방이 더 이상 그 구질구질한 가난뱅이의 처지로 머물러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 꼬질꼬질한 노름장이의 옷을 벗어버리고 바지저고리는 물론 조끼와 마고자에 두루마기와 도포까지 일습을 갖추고 전에 석암선생이 머물던 사랑방에서 정자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선비행세를 하는 한편 가끔은 마구뜰과 직동뜰, 모단뜰의 농지도 둘러보고 읍내의 가게에도 들러 어험어험 헛기침을 해대며

“어째 상도는 순풍한가?”

“예에?”

“그래 장사는 잘 되시는가?”

“아, 예에.”

를 연발하며 세를 걷어가는 양반행세에 맛을 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채 1년도 못 되어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그 넉넉한 밑천에 남아도는 시간이 점점 조 서방의 온몸을 비비 꼬이게 했는지 점포와 농지를 한 바퀴 둘러보러 간다고 나간 조 서방이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작은님이가 가게에 나가 알아보니 오후에 세 점포의 월세를 몽땅 받아 송대성당 너머 상북쪽으로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순간 작은님이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상북면이라면 제 집이 있던 삽재와 외양만디 넘어 쇠동꼴의 구석구석 노름방이 눈에 훤한 조 서방이 또 어디선가 한 동안 파묻혀 무르팍의 피를 말리고 한 밑천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돌아올 일이 너무나 뻔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르랴, 닷새 만에 눈이 벌개져서 돌아온 조 서방은 아무 말 없이 끙끙 앓으며 밤을 새웠다. 이튿날 작은님이가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왔느냐고 묻다가 금방 입을 다물어야 했다. 노름장이가 밖에서 돈을 잃으면 집에 돌아와 죄 없는 마누라를 친다는 말처럼 끙끙 앓기를 멈추고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 살벌해 금방이라도 주먹이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살아온 부부이기에, 또 세 딸과 막내아들의 어미와 아비이기 때문에 작은님이는 이내 더운밥과 쇠고기 국으로 차린 밥상을 올렸다. 그리고는 저절로 상심을 풀고 일어나기를 기다렸는데 위인은 해질 녘에 다시 길을 나섰다. 하도 눈길이 험악해 뭐라고 말을 붙이지도 못한 작은님이는 문득 맘속에 짚이는 것이 있어 급히 집문서, 논문서를 넣어놓은 장농의 잠긴 서랍을 열어보았다. 두 번, 세 번 확인한 결과 모단뜰 다섯 마지기의 문서가 없어진 것이 확실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천우신조로 그 문서를 잡힌 돈으로 전에 잃은 돈까지 찾으면 좋으련만 그게 얼마나 같잖은 희망인가, 노름장이 본전생각에 망한다고 하듯 노름장이 아내 십여 년에 어느 듯 작은님이도 그렇게 부질없는 희망을 걸고 남편이 돌아오는 날만 조마조마 기다렸는데 한 열흘이 지났을까, 다시 죽을상을 하고 돌아온 조 서방이 이번에는 안채에도 들어오지 않고 사랑채에 쓰러져버렸다.

ⓒ서상균

어디서 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졌을까? 작은님이가 쓰러져 자는 남편에게 차마 한 마디 물어보기도 전에 장터거리에는 조 서방이 처가재산인 모단뜰 닷마지기를 궁근정 노름판에서 날렸다는 소문이 퍼졌고 작은님이가 두근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더운밥을 지어 사랑방에 들여놓고 남편의 기척이 나기만을 기다리던 해질 녘에 뜻밖에도 모 씨 집안의 사내들이 우루루 몰려오기 시작했다.

“작은님이, 아니, 조 서방댁은 있는가?”

그렇게 아저씨뻘이 되는 좌상이 문을 밀고 들어오자

“평생에 손끝 한 번 알량 안 하는 불한당(不汗黨) 주제에 뻔뻔하게 처갓집 논문서를 들고 노름방에 가서 날려버린 인간 말종 조 서방인가 나발인가 어디 상판대기 좀 보자!”

같은 항렬의 쉰 남짓한 사내가 벌컥 사랑방의 문을 열어젖히더니

“허허 이 팔자 좋은 화상 좀 보게.”

혀를 끌끌 차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몰려 들어가 왈칵 조 서방이 덮고 있는 이불을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뭐라고 변명할 틈도 없이 조 서방을 마당으로 질질 끌고 나오자 누가 벌써 마당한가운데 멍석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멍석말이를 할 참이었다.

“아이고, 와 이라능교? 우리 분필이 아부지가 뭘 잘못 했다고 이 날링교?”

놀란 작은님이가 제 서방을 끌어안고 아이고, 분필이 아버지를 연발하자

“이리 나오너라. 니는 뭐 잘 한 게 있다고 서방을 두둔하노? 시방 저 인간의 못된 행구지를 고치지 못 한다면 결국은 우리 호방형님이 온갖 욕 다 얻어먹으면서 벌어 모은 재산을 다 노름판에 털어 넣고 말 끼다. 아니 어미아비도 없이 고모에게 얹혀사는 불쌍한 저 은실이가 시집갈 밑천마저 없어질 것을, 안 될 곡식은 싹수만 보아도 안다고 당장 이 인간을 쫓아내지 않고는 집구석이 거덜나고 말 끼다!”

이렇게 방금 덕석말이에 들어가려는 순간

“놔 보이소. 참새가 죽어도 꽥하고 죽는다고 나도 할 말은 좀 하고 보입시더.”

조 서방이 핏발선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사람들이 멈칫하는 사이에

“보소. 분필이어매, 내 이 수모들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이 더러운 노름쟁이의 목줄을 따고 말게 그 정지칼 좀 들고 오시게.”

작은님이를 찾았다. 작은님이가 멈칫하자

“당신이 십 년을 넘게 산 내 성질을 모르나 어서 가져오라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보소, 분필이 아버지. 이 녘이 노름해서 돈 내버린 것이 어데 한 두 번잉교? 그라고도 우리가 이적지 살았는데 어서 비이소. 다시는 노름을 안 하겠다고 비소. 어서 비이소.”

훌쩍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당가득한 분위기가 숙연해지는 것을 감지한 조 서방이

“어서 가오라카이! 니가 그렇게 내 말을 시뿌기여기고 기어이 내가 쇠를 깨물고 죽는 꼴을 봐야되겠나?”

고함을 질러대자 마지못한 작은님이가 멈칫거리며 부엌칼을 들고 나타나자 그 칼을 받아든 조 서방이

“보소. 동네사람들요.”

하면서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간 검지를 앞뒤로 흔들어 보이더니

“집안이 망할라꼬 노름쟁이 아들을 두어 문전옥답을 다 날리게 한 자신이 조상 볼 면목이 없다고 지가 서른 마지기가 넘는 논에다 1정보 가까운 산을 다 날려버린 날 스스로 우물에 뛰어들겠다는 저희 어른을 달래느라고 이 손가락을 잘랐던 것인데 아직도 그 버릇을 몬 고쳐 오늘 날 처갓집 재산을 말아묵고 마침내 이 왼쪽 손가락을 잘라야 되는 가 봅니다.”

하면서 왼손을 펴 보이더니

“봐라. 분필이어매, 자 눈 딱 감고 니 손으로 이 손가락을 잘라뿌라.”

멍석위에 손가락을 활짝 폈다.

“분필이 아부지요, 와 이라능교? 어서 비소. 다시는 안 그란다고 어서 비소. 그라고 집안어른, 동네어른들요, 한번만 용서하이소. 사람이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데 꼭 그렇게 피를 바야겠능교?”

시퍼런 식칼을 든 채 헝클어진 머리에 벌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멈칫대는 판에

“이 여편네가 와 이라노? 정녕 니 손으로 몬 하겠다는 말이가? 그라면 차라리 내가 할까, 아이지. 보이소, 지가 처가 집안 재산을 축냈으니 처가집안의 어른인 누가 좀 이 손가락을 잘라주소. 아재가 하실랍니껴?”

작은님이에게 빼앗아든 칼을 좌상어른에게 내어밀었다. 좌상이 멈칫대는데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

갑자기 분필이를 비롯한 1남 3녀가 몰려들더니 아비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다섯이 엉겨 붙어 한참이나 울고불고 야단이 벌어지더니 이제 열 살의 분필이가 슬며시 식칼을 뺏어 마당귀퉁이로 던져버렸다.

“아이구, 우짜겠능교? 죄 없는 저 아아들을 봐서 이번만 용서해주이소. 용서해주이소.”

작은님이가 좌상어른에게 손을 싹싹 빌자 옆에 사람이

“아재요, 마 한번만 용서하고 이 번 일은 물쇄하입시더.”

하면서 물러서자

“아재요! 마 그랍시더.”

젊은 축들도 슬며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안 돼지! 그렇게는 안 돼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던 좌상어른이 조 서방을 바라보더니

“다시는 안 그란다고 각서라도 받아야지. 자네 각서는 쓰겠는가?”

조 서방을 다그쳤다.

“이이구, 고맙심데이. 고맙심데이.”

조 서방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작은님이가 울먹이면서 사랑방의 벼루와 먹을 들고 나왔다. 그렇게 첫 번째 사단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 후 한동안 작은님이네는 참으로 평온한 시기를 맞았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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