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7)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11장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③납속제의 폐해

이득수 승인 2022.02.15 15:14 | 최종 수정 2022.02.17 10:09 의견 0

11.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③납속제의 폐해
 

그런데 이 양반과 상민과 노비라는 세 개의 신분은 지금부터 500년도 더 지난 이씨조선 개국초기에는 인구의 약 5부가 양반, 또 2할 가까이가 노비로서 나머지 팔 할 가까이가 상민층이다 보니 그 팔 할이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소금과 숯을 굽고 육의전과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여 그 많은 관리의 녹봉을 주고 나라살림을 도맡을 수가 있었지.

자네도 들었겠지만 약 사백 년 전에 조총을 든 왜놈이 삼천리강산을 짓밟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또 말을 탄 되놈들이 쳐들어온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피난을 가고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고 삼천리강산이 초토화가 된 적이 있었지.

그런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같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쳐 막상 그 난리가 수습되자 조정은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네. 그건 임진왜란을 예로 들 경우 7년이 넘는 난리 통에 억울하게 왜적의 조총이나 칼날에 죽은 사내나 겁탈당한 아낙네, 포로가 되어 붙잡혀간 사람도 많았지만 정작 살아있는 사람들도 더 큰 장벽에 가로막혔다네. 우선 대부분의 백성들이 남부여대 피난길에 올라 유리걸식을 하고 젊은 사내, 즉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여 논밭을 갈만한 장정, 그러니까 만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가장들이 대부분 전쟁 통에 죽거나 다쳐 7년 동안이나 묵어버린 논밭을 갈 사람이 없는 것이었지.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도 있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단순한 무지렁이 백성뿐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실이나 조정, 지방관아의 수령방백도 마찬가지겠지. 민간과 궁궐의 곳간이 텅텅 비어 임금의 수랏상을 비롯한 벼슬아치의 녹을 줄 오곡이 터무니없이 모자라자 조정에서는 팔도강산의 관찰사, 목사를 비롯한 전 고을의 관장에게 세곡을 독촉하였지만 이미 전국토가 피폐하여 생산이 없는데 어디서 곡식이 나올 것인가? 그래서 지방관들은 조정에 건의하여 그 신분이 무엇이든 일정량의 곡식을 바치면 상민은 양반이 되고 노비는 상민이 되는 납속(納粟)제를 시행하기에 이르렀지. 한번 생각을 해봐. 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일인가? 아무리 무식하여 낫 놓고 기역자는 물론 천자문의 하늘 천 자를 모르고 심지어 제 이름자도 못 쓰는 불학무식의 상놈이라도 하루아침에 양반이 되어 정자관을 쓰고 장죽을 물고 선비의 행세를 한다는 것을! 

이 기괴한 제도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쉽사리 받아들인다는 것이 또 동방예의지국 또는 해동성국으로 불리며 유학과 예의의 유풍이 남아있다는 이 나라의 희한한 너름새였지. 이렇게 쉽사리 납속제가 받아들여져 갑자기 수많은 양반이 생겨나면서 가까스로 수령방백과 왕실의 아침저녁 끼니를 때우게 된 이 납속제도는 사실상 병사나 의병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경우는 물론 평범한 상민이나 농사꾼도 왜적의 수급(首級), 그러니까 머리만 베어서 동헌으로 가져가면 바로 노비가 상민이 되고 상민이 양반으로 승차하던 전례가 있었으니 뭐 그렇게 낯설거나 수상한 일도 아니었을지 모르지. 

그래서 저 갑오년 개혁이후 이미 반상(班常)의 계급이 없어져 만백성이 동등하다고 하나 아직도 좁은 골짝에서 저들끼리 공맹(孔孟)을 주창하고 양반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사실 이 나라가 내려오면서 겪은 그 많은 우여곡절로 볼 때 뉘라서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깨끗하고 당당한 양반이며 설령 그런 양반이라 한 들 대대로 손끝으로 흙 한 번 만지지 않고 쓸데없는 공론과 음풍농월(吟風弄月), 율(律)이나 짓고 처첩을 거느리고 평생을 게으르게만 살아온 것이 무슨 큰 자랑이겠는가? 

먼 옛날 감히 진시황에 반기를 들고 왕후장상이 따로 씨가 없다고 거병한 진승오광을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고 사람은 시화연풍, 날씨가 좋아 오곡이 두루 열매를 맺어 여염의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고 곳간에 먹을 것이 쌓여 민심이 순화되고 학문과 예절의 기풍이 진작되면 비로소 양반과 양민 즉 착한 백성인 상민층이 흥하고 시절이 고르지 못 해 흉년이 들고 물난리가 나고 전염병이 돌며 흉포한 자가 수령방백이 되어 가렴주구 수탈과 억울한 옥사를 일삼거나 외적이 쳐들어오는 난세를 만나면 다시 뿔뿔이 흩어져 유리걸식하면 양반상놈도 따로 없는 것이며 그러다 다시 호시절이 오면 순 쌍놈이라도 의식이 풍족한 자가 다시 기와집을 짓고 족보를 수습하고 정자관을 높이 써 양반행세를 하는 수도 있고 번듯한 양반이라도 끝끝내 그 기세를 회복하지 못 하면 상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 그러니까 삼대부자도 삼대거지도 없다는 말은 사람의 유복함과 궁핍함이 그 건실함과 절실함에 따라 몇 대를 기준으로 돌고 돌아 영원하지도 않다는 말이지만 한 십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한 가문의 성쇠나 반상의 개념도 돌고 돌며 몇 백 년쯤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 겨레나 나라의 흥망성쇠도 이와 같을지도 모를 일이지. 

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밑도 끝도 없이 자꾸만 길어지고 옆길로 새는구먼. 그러니까 요는 조선이란 나라는 집권자인 벼슬아치와 그 배후세력이 되는 사대부나 유림의 양반층에게는 조세, 군역 등 어떤 의무도 지우지 않고 오로지 무지렁이 백성 상민에게만 모든 짐을 지워왔는데 그마저 임란 이후 군공(軍功)과 납속에 따라 점점 많은 상민들이 양반으로 변하여 남은 상민들만 점점 더 많은 곡식을 바치고 더 오랜 기간 번(番)을 서거나 그 보(保)로 군포를 바쳐야한다는 것이었지.

그래서 우리 언양고을만 해도 임진왜란이 백여 년이 지난 숙종연간에는 벌써 양반이 근 2할이나 되고 노비가 1할이 되어 상민이 7할로 줄어들더니 다시 백여 년이 지난 헌종연간에는 양반이 6할 가까이 늘어나고 노비가 단 1푼에 그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 겨우 4할에 이르는 상민이 그 많은 조세와 역을 다 부담해야했는데 바야흐로 진주를 비롯한 전국각지에 민란이 일어나고 자네 증조부, 그러니까 반동선생님이 현감에게 곤욕을 당하던 50, 60년 전에는 양반이 무려 8할에다 노비가 전멸해 겨우 2할의 상민이 그 많은 전곡(錢穀)과 노역을 다 부담하게 되니 이게 말이나 되? 한번 생각을 해 봐, 마을사람이 100명인데 나머지 80명은 놀고먹고 겨우 20명이 밤낮으로 일해야 한다면 말이야.  

이렇게 상민이 줄어들게 된 데는 한 두 가지 더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지방의 수령들이 너무 많은 공명첩(空名帖)을 팔아 양반은 없는 벼슬, 즉 이름뿐인 벼슬을 시키고 상민은 허울 좋은 양반으로 만들어버린 것일세. 

조선이 나중에 어리고 연약한 임금들이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말려 삼천리강산이 썩을 대로 썩자 우리 언양현감처럼 순무식장이가 일개 고을의 관장이 되어 부임하니 부임하가도 전부터 매관으로 현감감투의 본전을 빼고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하네.

우선 고을에 부임하기 전에 미리 고을의 아전과 토색질에 여념이 없는 토박이 양반붙이인 향반이나 토반, 잔반에게 통지하여 쇄마(刷馬)비를 걷는데 조정에서는 처음 부임하는 관장이 백성에게 피해를 줄까봐 임명과 동시에 거리에 따라 한 300에서 500량의 쇄마비를 미리 줌에도 불구하고 이중으로 몇 천량의 쇄마비를 받아 착복했다고 하네. 

그렇게 도임하면서도 미리 자기가 퇴임하고 난 뒤의 공덕비를 세울 비용을 염출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아무튼 이런 지방수령과 아전배의 농간과 수작은 언제 다시 한 번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렇게 상민이 줄고 양반이 늘어난 데는 그 놈의 납속과 공명첩의 판매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위하여서였지.

그러니까 그 납속만 해도 초기에는 적어도 쌀 사십 섬쯤은 바쳐야 엔간한 직첩을 주던 것이 나중에 수령들의 탐학이 심해지면서  쌀도 아닌 보리나 콩, 심지어 이름그대로 좁쌀 몇 섬을 주고서도 양반이 되는 판이었어. 거기다 나중엔 아무런 공헌도 없고 곡식을 바치지 않아도 단지 엽전 몇 푼만 주면 무제한으로 직첩(職帖))을 발행, 상민을 양반으로 만들었는데 하다하다 나중에는 직명조차도 없는 직첩, 그러니까 누구나 빈 칸에다 자기이름만 써넣으면 양반이 되는 공명첩(空名帖)까지 팔아대니 상민이 남아날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나마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춘향, 억지양반이 되는 상민들로서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양반이 되면서 바로 군졸로 번을 쓰거나 보를 맡고 나중에 균역법에 의하여 한해에 두 필의 군포를 바치다 다시 돈으로 바치는 그 군역을 면하게 되는 것이었지.
 

원래 양반을 제외한 16세에서 60세까지의 장정에게 부과하는 이 군역도 점차 상민의 수가 줄어들자 도무지 그 수를 채우지 못 하자 아직 젖먹이아이나 죽어 백골이 된 장정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점정, 백골징포를 예사로 하고 아직도 낳지 않은 아이, 그러니까 아낙네의 배만 불러와도 아들일지 딸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어 군적에 올리고 그 증명서인 홍패를 발급하는데 심지어 그 집의 강아지나 고양이의 이름을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네. 이 지독한 군포를 견디지 못 한 백성이 야밤중에 어디론가 도망을 가면 족징(族徵)이라 하여 그 친척에게 군포를 떠맡기다 못해 심지어 인징(隣徵)이라 하여 이웃에게까지 덤터기를 씌웠다하니 그 문란함이 어느 정도였을까?

하여간 이런 일로 자꾸만 상민들이 양반이 되거나 도망을 갔는데 그럼 그 도망간 상민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이틀 쉬고 다시 이야기함세.”

“예.”

하고 일단 자리를 파했다.

 

“그래, 일찍 잘 왔구먼.”

이틀 뒤 기출이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마루로 올라섰을 때 기다렸다는 듯 미닫이문을 반쯤 열고 내다보던 석암선생이 기출이가 좌정하려는 순간 상체가 휘청하더니 긴 담뱃대로 방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자세를 바로 했다.

“선생님, 힘에 부치면 한 이틀 더 쉬시지요?”
“아이다. 내겐 인자 시간이 얼마 없다. 시작하자.”

힘주어 말은 했지만 눈빛이 흐릿했다.

“그렇지. 그 많은 유민, 혹독한 조세와 군역에 못 이겨 도망간 상민, 유리걸식의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네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녀 많이 목도하고 또 실제로 목전의 허기를 때우기 휘해 한 끼의 밥에 목숨을 걸어본 일도 있을 것이야.

그렇지. 유리걸식의 무리가 되면 원래 농사꾼이었던 그들은 맨 먼저 깊은 산속의 화전민이 되어 강냉이나 콩을 심어먹거나 어느 외진 바닷가에서 날씨가 좋으면 조개를 잡거나 미역을 따고 물결이 사나우면 바닷가언덕에 약간의 채소를 심어먹는 그런 희망을 가지겠지. 그러나 그렇게 많은 유랑민들 앞에 화전을 할 산등성이가 남아있을 수가 없고 해안가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럼 다음으로는 진짜 유리걸식 즉 거지가 되어 빌어먹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웬만한 마을을 주민의 절반이상이 야반도주를 한데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조반석죽이 아니라 삼순구식(三旬九食)도 채우지 못 하는 형편에 얻어먹는 사람을 줄 밥이 어디 있었겠나? 

결국 밥을 먹고 사는 집, 밥이 아닌 죽, 아니 호박풀대기라도 먹을 수 있는 곳에 빌붙어야 굶어죽지 않는 이치라 거기가 어디든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무언가 곡식이 익어가는 김이 서리고 밥 냄새가 나는 곳으로 찾아가게 되겠지.

그러니까 그들이 가게 된 곳이란 그들이 대대로 씨 뿌리고 가꿔먹던 그 논밭을 빼앗아간 곳, 온갖 명목으로 곡식과 군포를 쥐어짜 곳간에 쌀과 엽전이 쌓인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지.

그런 그들이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금도 바치지 않고 군포도 물지 않는 곳, 그러니까 서슬 푸른 사또가 사는 관아와 그에 빌붙어 사는 서리, 육방관속의 아전, 포졸이나 역의 역승, 하다 못 해 마발이나 보발의 파발꾼, 천역인 봉수대의 잡역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전지만 가지고 삼시 세 때 밥을 먹는 집이면 그 곁방에 빌붙어 농사를 비롯한 모든 일을 도맡아하는 협호, 그러니까 섭포살이, 말은 셋방살이지만 세를 낼 수도 밥도 끓일 수 없어 스스로 종놈이 되어 비리는 거지.

그밖에도 향교, 역, 절 등 일반의 조세를 물지 않는 별도의 땅, 즉 둔전(屯田)에 기탁하여 향교나 절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좁은 고을바닥에 누대를 살아오면서 저들만이 대단한 집안인양 함부로 제가 사는 마을의 이름에 제 성씨를 붙여 뒷골 김씨, 앞골 이씨, 여우골 박씨로 행세하며 향교와 향청을 주름잡고 관의 수령에 빌붙어 결탁하여 스스로는 곡식 한 알, 군포 한 필을 바치지 않으면서 수령보다 더 포악한 또 하나의 나리가 되어 무지렁이 백성을 수탈하는 토호(土豪), 그러니까 향반의 세력도 있었지. 원래 향반이란 도성에서 벼슬을 살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노모를 부양한다거나 선산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여 향리로 돌아와 음풍농월, 유유자적한 노후를 보내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그런 선비이자 충신이며 명유(名儒)들이었지만 차차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가문에서 더 이상은 벼슬아치들이 나오지 않아 아예 조정에 출사하지 못 하고 그저 조상의 이름이나 팔아먹으며 그래도 뼈대 있는 집안으로 자처하는 향반이 되고 나중에는 벼슬을 한 지 가마득할 뿐만 아니라 이제 사서삼경도 잘 모르며 그저 약간의 토지로 연명하는 토반(土班)이 되었다가 그나마 단 한 조각의 땅도 없이 하루하루 끼니걱정을 하면서도 입에 공맹을 달고 살고 가진 것이라고는 족보밖에 없는 잔반(殘班)이 되는 그런 선비 아닌 선비의 집단이 바로 향반인데 그 중 유복한 집안에 약간의 전답까지 들고 또 장성한 딸을 소실이나 노비로 내어주며 일가가 투탁(投託)하는 일도 있어 토색질에 능한 토호들은 점점 더 전답이 늘고 솟을대문이 높아가며 늘어나는 지붕아래에는 하인이, 광에는 곡식이, 후원에는 비첩이 쌓여가는 형편이었지.
 
더더욱 기가 막힌 일은 관아의 서리나 그런 토호의 집에 의탁하여 오랜 기간 주인을 모시며 신임을 받아 스스로 노동을 하기보단 주인의 명을 받아 하인을 다스리고 농사철에 농지를 돌아보고 추수를 감독하여 도조를 받아 창고를 관리하는 상머슴이랄까, 마름, 또는 고직(庫直)이라는 부류가 따로 집을 지니고 별도 살림을 사는 외거노비가 되어 상당한 재력이 있으면 가난한 상민들이 오히려 그 노비 밑에 투탁하는 일이 다 생겨난 것이지. 그야말로 양민이 종놈의 종놈이 되니 그게 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더욱 기가 찬 것은 그런 도망자 중에는 비단 상민이 아닌 양반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네. 배를 곯아도 명색 양반이라고 가만히 앉아 곱다시 굶어죽은 양반이 어디 있으련만 이건 뭐 대대로 내려온 양반이나 사서삼경을 읽은 선비도 아닌 그저 몇 뙈기의 논밭을 갈아 근근이 살아가던 상민이 어느 날 문득 고을수령에게 억지춘향으로 전답과 재물을 바치고 아무 쓸모도 없는 공명첩을 받아 이제 세금도 물지 않고 군포도 물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제 먹을 양식이나 갈아먹을 땅도 없는 판에 세금 물지 않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허울 좋은 양반행세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 하고 그들은 이웃이 부끄럽고 조상이 부끄러워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돌다 그 곳의 상민이나 둔전, 심지어 절간의 불목하니나 공양주로 빌붙으며 장성한 딸을 대처승, 파계승의 노리개로 내어주기가 일쑤이며 심지어 양반으로써 노비의 노비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하니 이게 어디 동방예의지국, 해동성국에서 일어날 일인가?

자네 알다시피 세상에는 역사가 어떻고 전통이 어떻고 민심과 풍속이 어떻고 가문이 어떠하고 개인의 인품이 고매하니 아니니 학문이 깊으니 일천하니 말들이 많지만 그게 다 배부른 소리지 흉년이나 난리 통에 포악한 관리나 향반의 토색질에 모든 것을 다 뺏기고 한 사흘 굶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역사전통, 풍속민심이, 또 가문이나 사서삼경과 학문과 경륜과 도량이 다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쓸모가 있지 끼니를 거르고서는 한갓 공염불인 거지. 그만큼 사람에게는 밥이, 아니 굳이 밥이라기보다는 목구멍을 넘길 곡기(穀氣)가 절실한 것이지.

이건 내가 자네 증조부님, 그러니까 나의 스승인 반동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긴데 우리가 흔히 힘이 없거나 병색이 완연한 사람을 보고 <사흘에 피죽도 한 사발 못 먹었나?>라는 말을 하는데 그 변변찮은 피(稗)도 먼 옛날에는 우리 인간이 주식으로 삼은 매우 중요한 곡식이라는 거야.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곡식은 쌀이 나는 나락 즉 벼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 보리나 밀 또는 옥수수를 제대로 된 곡식으로 치고 그 다음으로는 감자나 고구마를 치지. 그러나 동양사회에서 오곡(五穀)을 곡식을 으뜸으로 삼던 시절에는 옥수수, 고구마, 감자 같은 서양에서 들어온 곡식은 없어 쌀, 보리, 콩, 기장, 조를 오곡으로 치고 가뭄으로 그 오곡 중의 몇 가지가 여물었는지에 따라 기(饑)니 근(饉)이니 따지는 기근으로 또는 흉년과 풍년으로 나누는 기준으로 삶았다고 하네. 

그래서 통감 같은 중국의 옛 역사나 시문(詩文)을 보면 춘추시대의 제후가 만 종(鍾)의 좁쌀을 가졌다든지 귀한 손님을 맞느라 양을 잡고 기장으로 밥을 해서 대접했다는 기록이 다 나온다네. 그런데 좁쌀이나 기장이 나오기 전의 상고시대의 사람에겐 놀랍게도 그 보잘것없이 작고 딱딱해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소화시킬 수 없을 것 같은 피가, 즉 피로 만든 피 쌀과 피로 끓인 피죽이 인간의 주식이었다는 것이지. 

그러나 모든 음식을 익혀서 먹는 요즘의 사람들과 달리 생식을 하던 그 선대인들은 비단 피뿐 아니라 도토리, 칡같이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 엄청나게 질긴 먹을거리들을 튼튼한 어금니로 마치 소나 말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종일을 씹어 소화시켰다는 것이지. 그 뿐 아니라 그 시절의 부엌살림을 사는 원시의 아낙네들은 사냥을 나가 저물도록 순록이나 멧돼지를 쫒을 남편이나 아직 어린 젖먹이를 먹이려 종일 물에 불린 도토리나 칡, 피를 맷돌에 가느라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온몸을 굴신하여 죽은 유골을 보아도 척추가 온전한 사람이 없이 대부분 한두 개가 망가져서 나온다고도 하셨네.

비단 그뿐이 아니라 피 알맹이를 먹던 선조들 보다 더 앞의 사람들은 피보다 훨씬 더 작고 보잘 것 없는 강아지풀, 그러니까 구미초(狗尾草), 낭미초(狼尾草)라고도 부르는 보풀보풀한 긴 이삭에 춤을 발라 개구리를 잡는 그 변변찮은 강아지풀의 자디잔 열매를 먹었고 그 이전에는 띠풀(茅)이나 억새, 갈대의 뿌리를 먹었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지.

 

이제 생각해봐도 참으로 박학다식 세상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지. 기왕 말이 나왔으니 내 한두 가지 더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더 함세. 내가 가운데 끼어 내 스승인 자네 조상의 말씀을 다시 자네에게 전해주는 것도 하나의 도리 또는 보람일 테니까 말이야.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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