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1)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11장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⑦탐관오리 흉흉흉

이득수 승인 2022.02.18 13:32 | 최종 수정 2022.02.21 13:25 의견 0
ⓒ서상균

11. 이 별감댁 패가 전말 ⑦탐관오리 흉흉흉

이방이 남문 밖 방천위에 있는 백정 집을 찾아가 가장 살코기가 부드러운 중소를 한 마리 잡도록 했다. 늙은 암소는 질기기도 하지만 농가의 일소라서 안 되고 송아지는 먹을 게 없을 것이라 좀 아깝기는 하지만 아직 새끼를 배기 직전의 암송아지를 잡기로 했다. 소 값의 절반은 현청에서 내고 구이용 등심과 안심, 육회용의 살코기와 천렵, 간의 일부를 가져가고 나머지 고기는 백정이 장날 저잣거리에서 팔기로 했다. 덕분에 모처럼 온 장터의 장꾼과 백정이 신이 났다. 비싼 살코기도 한 칼씩 잘라 팔았지만 머리와 내장과 온갖 잡동사니에다 뼈다귀까지 몽땅 넣고 이틀이나 고은 소피국물이 모처럼 기름기를 구경하는 촌사람들에게 대단한 보신이요, 커다란 잔치가 된 것이었다. 귀와 혀와 머리고기에 간, 염통, 천렵에 온갖 잡고기가 다 들어간 쇠고기잡탕을 언양에서는 소피국물이라고 불렀는데 아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아낙이든 눈만 붙어있는 사람이면 단돈 한 푼이나 곡식 한 줌에 커다란 바가지로 푹푹 떠서 뚝배기 가득 담아주니 촌사람들의 얼굴에 모처럼 기름기가 배어나는 판이었다.

 

그렇게 해서 작천정 정자 아래의 산기슭과 도랑이 온통 하나의 널찍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호박소(沼) 옆에서 이방이 꾸며서 현감이 베푸는 단풍놀이가 벌어졌다. 숯불에 석쇠를 얹고 등심과 안심, 너비아니를 굽는 한편으로 어느 부지런한 촌부가 벌써 땄는지 도토리묵도 올라오고 가을상추와 쌈배추도 상차림을 장식했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간월산의 단풍잎은 더욱더 붉고 누런 광채로 아롱지고 개울바닥의 자갈과 물고기가 훤히 드러나는 작괘천의 맑은 물이 둥글게 패인 호박소에서 성급하게 떨어진 새빨간 개옻나무의 잎을 안고 빙글빙글 돌고 저 아래 물살이 급하게 돌아가는 여울목에서는 하얗게 부서지며 물안개를 피어올리고 있었고 그 골짝 가까이 쇠고기를 굽는 연기가 고소한 고기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참으로 넉넉하고도 고요한 정오였다. 이 풍요로운 계곡 아래 수많은 백성들이 오늘도 굶주리고 허덕이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가 없을 지경으로...

 

술이 몇 순배 돌자 좌중의 모두가 얼굴이 발그레 화색이 돌면서 눈빛들이 부드럽게 풀렸다. 현감도 오늘따라 온화한 낯빛으로 이윽히 별감을 쳐다볼 뿐이었다,

“허, 거참! 저 호박소 생긴 것 좀 보소. 그 참 묘하게 생겼잖소?”

점잖은 향교전교가 술기운이 도는지 동연배의 좌수를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거문고를 잡은 수월이와 월향이, 유월이, 금홍이, 계월이 다섯 기생의 얼굴을 보다 어깨에서 허리를 거쳐 엉덩이를 훑느라고 눈길이 바쁘게 돌아갔다.

“아니, 전교께서도 그 생각을 하셨단 말이지요. 이 늙은이도 저 호박소에 단풍잎이 빙빙 도는 것을 바라보며 괜히 우리 수월이의 치마 속을 생각했었지요. 허허 그 참 주책이지요.”

도대체 무어라고 없는 공덕을 짜내고 어떻게 문맥을 열어갈지 골똘히 생각하던 별감도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웃고 있는 조글조글한 이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감도 그 검붉은 얼굴가득 웃음을 담고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과연 그랬다. 수수만년 작괘천의 맑은 물이 씻고 닦은 반질반질한 반석위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며 만든 동그랗게 파인 옴팡한 호박소의 물은 누가 보아도 바로 뭇 사내에게는 늘 궁금하고 가슴 설레는 그리운 그 곳처럼 그러니까 점잔은 유생(儒生)들이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다는 그 목불인견처(目不忍見處)의 형상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간월산, 배내봉, 밝얼산, 신불산의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석간수(石間水, 간(澗)이 방금 목욕을 마친 선녀의 가슴골과 배꼽을 타고 흘러 마침내 뭇 생명의 고향이 되는 그곳에 도달한 것처럼 그런 조용하고도 오묘한 회오리로 돌고 있는 것이었다.

 

“자, 우리 이럴 것이 아니라...”

수월이의 거문고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려 좌수가 흘낏 현감의 눈치를 살피며 운을 떼었다.

“목민관이신 현감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준 이렇게 좋은 날, 이 좋은 풍광을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가 있나요? 마땅히 음풍농월(吟風弄月) 시 한 수가 있어야지요.”

“실로 지당한 말씀이시요. 저도 아까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전교가 받았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앉은 자리순서대로 좌에서 우로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구절씩 읊는 것 말입니다.”

“좋지요. 그럼 좌수께서 먼저 운을 떼시지요.”

전교가 좌중을 쓰윽 훑어보았다. 상념에 잠겼던 이별감도 고개를 들어 좌수를 바라보고 이제껏 가는 눈을 뜨고 거문고를 치는 척 시도 때도 없이 이별감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수월이를 바라보느라 가자미눈이 된 현감도 헛헛, 헛기침을 터뜨렸다.

간월단풍 색홍홍 肝月丹楓色紅紅

이윽고 좌수가 첫 율을 짓자

“그 참 좋은 싯귀로다. 간월산의 단풍이 붉디붉게 불탄다니!”

일부러 감탄한 듯 탄성을 지르던 전교가

추수농부 심황황 秋收農夫心遑遑

눈을 지그시 감고 읊자

“옳거니. 가을걷이 하는 농부 마음만 급하도다. 역시 전교님답군요. 절구(絶句)로다. 절구로다. 자, 그럼 이번엔 사또차례인줄 아옵니다.”

좌수가 슬쩍 옆자리의 현감을 쳐다보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현감이 한참이나 끙끙대더니

“나 원 참, 답답한 선비들 하고는. 이 좋은 명산이면 모름지기 활을 쏘고 사냥을 할 일이지. 여봐라! 거기 병방은 내 궁시(弓矢)를 가져왔는가? 어서 포졸더러 과녁을 세우라하게.”

소리치자 안절부절 못 하던 이방이

“사또나리, 호방한 무관이신 사또께서 한량답게 활을 쏘는 대신 소생이 감히 한 구절 대신 하면 어떠하올지요?”

굽실거리는데

“그럼, 그리하시던지.”

병방이 건네준 활을 들고 건들건들 호박소를 건너가자

누상고옹 심청청 樓上孤翁心淸淸

읊자

“정자 위의 외로운 노인 마음은 맑고 맑아. 아이구, 우리 이방께서 아주 절구를 찾았습니다. 고을의 수석 서리께서 이렇게 시심이 깊고 마음이 맑다니 고을 촌민 모두의 홍복입니다. 허허”

좌수가 공치사를 하고 이어 전교가

“이제 고을의 명문(名文)이신 이 별감의 차롑니다.”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천변표모 신적적 川邊漂母身寂寂

읊자

“개울가에 빨래하는 노파 마음 적적 심심하네. 과연 삼동의 증자요, 신동에 명문이란 말이 헛말이 아니군요. 냇가에 빨래하는 할미가 바로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이를 잡아들인 마고(麻姑)할미가 아니신지요? 이 호젓한 골짝에서 동서고금이 다 언급되는 이런 절창을 쏟아내시다니요?”

전교가 감탄을 하자 거문고에서 눈을 뗀 수월이가 이윽히 별감을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은근하기가 여간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촛농이 흐르듯 정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순간 입가에 비죽 웃음을 머금은 별감이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 심청청, 신적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조정은 세도정치에 나라는 흉년에 지방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백성들은 고혈이 다 소진되어 유리걸식 떠돌며 굶어죽기 직전에 말입니다.”

불꽃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는데 마침

“명중이요!”

“일발필중이니 백발백중 신궁이요!”

정자 아래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술 취한 현감이 제대로 시위를 당겼을 리도 없건만 한심한 졸개들이 제 살기 위하여 모두들 명중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어 허허허 헛허허 현감의 너털웃음이 커다랗게 들려왔다.

“차라리 이건 어떻습니까?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바꾸면...”

의미심장하게 좌중을 둘러보던 별감이

“탐관오리 흉흉흉 貪官汚吏 胸凶凶”

차라리 이렇게 고치는 것이, 그러니까 탐욕스런 수령의 마음속엔 검은 흉계만 가득하다고 말입니다. 하하.”

하고는 벌컥벌컥 술잔을 기울였다. 깜짝 놀란 좌수와 전교가 마치 춘향전의 이도령 어사출두에 수령방백들이 떨듯이 정신이 번쩍 들어 목을 움츠리며 저 아래 현감의 동향을 살피는데 이방이 재빨리 수월이와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내 술자리를 걷게 했다.

... ....

“자, 지금까지가 내가 당시 좌수와 이방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그날의 작천정 단풍놀이에서 있었던 일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엮어본 이야기야.

 

늙은 이방의 노심초사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넘어간 단풍놀이가 그날 밤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네. 그것도 이방의 수하이자 같은 집안의 아우나 조카뻘이 되는 호방, 병방, 형방들의 고자질로 말이야. 비록 같은 집안이기는 하지만 집안 전체가 대대로 육방관속을 나누어 가지는 그들로서는 너무 오랫동안 그 수장을 맡은 늙은 이방이 지겨웠겠지. 니도 한번 생각해봐라. 윗사람이 죽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이 올라갈 수 없는 자리에 자기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사람이, 또는 나이가 많아도 너무나 건강하고 지겹도록 오래 사는 사람이 앉았다면 말이야. 그래서 별감이 <탐관오리 흉흉흉>이라는 불손하기 짝이 없는 싯귀를 짓고 이방이 그것을 숨기려고 쉬쉬하며 재빨리 술자리를 거둔 것을 시시콜콜 일러바친 것이었지.

송덕문에다 수청까지 거절당한 데다 안 그래도 단풍놀이의 따분한 시회(詩會)에 짜증이 난 현감의 심통에 그 고자질은 단번에 불을 지르고 말았지. 당장 이방이 불려와 관장을 속이고 희롱한 죄로 곤장을 치려고 형구를 대령하다 너무 늙어 취소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방에서 쫓아내고 말았지. 그리고는 이튿날 별감을 들어오게 해서 바로 곤장을 안기고는 옥에다 처넣고는 초주검으로 몰아넣은 것이었지. 이것 역시 반동선생님의 사후에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이야기를 내가 대충 얽어본 것인데 한 번 들어보시게나.”

ⓒ서상균

현청에 들르라는 기별을 받고 무심코 동헌에 들어서던 별감은 그만 소스라치듯 놀라고 말았네. 동헌 앞마당에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칠 형구를 갖추어놓은 채 이미 먼저 불려온 고령의 전교와 좌수가 맨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것이었지. 별감이 마당에 들어서자 말자

“여봐라, 저놈을 정신이 들 때까지 매우 쳐라!”

마루 위의 현감이 회초리로 별감을 가리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네.

“아니, 현감나으리. 맞을 때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읍시다.”

간신히 제 정신을 수습한 별감이 빤히 쳐다보자

“저 당돌한 인사를 보소. 저 눈빛을 좀 보소. 그래 이 시건방진 작자야, 니가 그렇게 니 입으로 관할 수령을 모욕하고도 감히 살아남을 줄 알았나? 여봐라 저놈을 매우 쳐라!”

“아니, 수령을 모독하다니요? 내가 언제 사또를 모독했단 말이요?”

형틀에 질질 끌려가면서 항의하자

“뭐. 탐관오리 흉흉흉하다고 시를 지어? 그게 날 모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예, 이놈 그래도 네 죄를 모른다고 발뺌할 것이냐?”

“난 그냥 싯귀를 읊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누구를 언급한 적이 없소. 더욱 현 현감인 나으리의 성씨 천자나 함자를 한 자라도 언급한 적이 없소.”

“이런 발칙한 네놈이 이 고을에서 나서 고을 밖을 한 발짝도 나가보지 못 하고 살았는데 수령방백이라면 언양현감, 그러니까 나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러고도 날 모욕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봐라! 저놈이 스스로 발고(發告)할 때까지 매우 쳐라!”

그리고는 좌수와 전교에게 작천정의 시회에서 있었던 일을 되묻고 벌벌 떨던 노인들이 현감의 말이 다 지당하다고 수긍하고 비실비실 물러나자 갈수록 기세등등한 현감에게

“아니 그러면 사또 스스로 탐관인 것을 자복한단 말이요? 쇄마비를 이중으로 받고 공명첩을 팔아 챙기고 은결을 찾아 또 챙기고 군포를 독촉해 챙기고 환곡을 협잡해 또 챙긴 그 많은 죄를 다 자인한단 말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도둑이 제 발 저리 듯이 팔짝 뛸 것이 무어란 말이요?”

“에라이, 이 쳐 죽일 선비나부랭이야! 무어라? 그럼 네놈은 얼마나 깨끗한가 보자.”

그리고는 호방더러 별감의 죄상을 적은 장부를 가져오게 했는데 놀랍게도 거기엔 둔터마을주변에 가난한 농부들이 몇 십 평, 몇 백 평, 간혹 천여 평 묵정밭을 회복시키거나 새밭을 개간한 기록이 적혀있었고 이 모든 것이 민정을 살펴 보고하여야 할 별감이 은폐한 죄라는 것이었지.

별감이 변명하기로 임진란 이후 전국토가 묵고 과세결수가 줄어들자 나라에서도 널리 둔전을 개발하고 골짝골짝에서 세궁민들이 손바닥만큼의 묵정밭을 일구는 일을 말리지 않고 세금도 물리지 않은 것이 관례로 묵인되어 온 일이 아니냐고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어. 아무리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나라님의 땅이며 관할수령의 땅이라 이는 바늘도둑이나 소도둑이나 도둑이란 건 매일반이라면서 더 혹독하게 곤장을 치게 했다네.

그리고 말미엔 일개 백성이 함부로 관아에 소속된 관기와 정분이 나 관장을 능멸하고 기강을 무너뜨렸다는 참으로 엉뚱한 죄목이 다 있었다네.

얼추 열 대가 넘도록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아니 사또, 그렇게 가렴주구 학정을 일삼고 또 이렇게 생사람을 잡고 어떻게 그 죄 값을 다 치르시려우? 하늘을 쳐다보기가 두렵지도 않소? 마른하늘에 벼락은 왜 공연히 치는지 아시우? 이러다 암행어사라도 출두하면 어찌하실 작정이우? 아니 유림이나 백성이 사또의 비행을 적어 조정에 탄원서라도 내면 어쩌시려우?”

따지자

“예 이놈, 너는 국초부터 시행된 수령고발금지법도 모르느냐? 한 집안의 자식이 아비를 발고할 수 없듯이 백성이 어버이와 같은 관할의 관장을 고발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터무니없는 악법을 들고 나왔지.

“사또, 그 법은 풍속과 기강을 순화하기보다 탐관오리들의 행패만 조장시키는 지라 이미 국초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삭제한 악법으로 이미 폐지된 것을 모르시오?”

따져도

“아니, 저놈이 그래도 입만 살아서. 여봐라, 저놈의 못 된 주둥아리를 닥칠 때까지 매우 쳐라!”

더욱 기승을 부리고 몇 달 동안이나 사람을 감금한 채 심심하면 매질을 해대는 것이었다네.

 

저러다 필경 무슨 사고가 나겠다, 고을에서 제일가는 선비라는 젊은 별감이 무슨 변을 당하는 것은 아니냐, 뒤숭숭한 인심에도 정작 무슨 말을 하여야할 좌수와 전교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네. 별감을 구출해야겠다는 마음보다도 자신이라도 그 일에 끌려들어가지 않아 횡액을 면해야 되겠다는 것이 겁쟁이 두 늙은이의 마음이었지.

보다 못 한 전임 이방이 이미 파면되었음에도 한 젊은 선비를 구하려고 나섰지. 그래서 둔터의 논밭을 팔아 사람을 구해내었지. 굳이 따지자면 논밭을 판 뇌물도 뇌물이지만 그동안 너무 심한 매질의 장독과 차디찬 뇌옥의 맨바닥에서 폐질이 심해진 별감을 더 이상 잡아두면 옥사할 염려가 있어 이방의 간청대로 방면한 것이었지.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반동선생은 집에도 닿기 전에 객사를 하고 만 것이었지.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게 반동선생이 돌아가시고 자손들이 뿔뿔이 다 흩어진 뒤에 마침내는 그 표독한 탐관 천 현감도 갈린 뒤에 늙은 이방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묘한 소문하나가 퍼져 나왔지. 별감이 죽은 뒤 며칠 뒤 관기 수월이가 후원의 연당의 수양버들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그게 단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도, 현감의 수청이 지겨워서도, 별감의 죽음이 안타까워서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네.

사실 별감의 구명운동을 하던 이방이 너무나 진척이 없자 하루는 조용히 수월이를 만나 뭐라고 다짐을 받았다네. 그리고 둔터의 전답을 팔아 뇌물을 준 날 수월이가 자청하여 현감의 수청을 들었다네. 그리고 그 이튿날 별감이 풀려났으니 수월이의 수청도 일조를 한 것만은 틀림이 없지.

그러나 그 후 자신이 그렇게도 사모하던 별감이 죽자 수월이도 목숨을 끊은 모양이지. 더 이상 살아갈 목적이 없어졌으니까 말이야.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상상으로 이러쿵저러쿵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연 이 별감과 수월이가 얼마만큼 좋아하고 어디까지 사랑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 그러나 그 사랑 역시 그 억울한 천재와 절색의 죽음만큼 안타까운 것이지. 허허허.”

 

긴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 허망한 이야기가 서글퍼서 그런지 아니면 지쳐서 숨이 찬 건지 석암선생은 한 동안 눈을 감고 나지막이 숨소리를 고르고 있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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