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20)악양정에서 일두 정여창 선생께 석채례 올려
조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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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9 21:34 | 최종 수정 2019.05.1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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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개골에는 사흘째 비가 내리고 있다. 덕분에 화개동천의 수량이 제법 늘었다. 비가 내리는 데도 은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오늘은 음력으로 4월 15일, 양력으로는 5월 19일이다.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에서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께 제례를 올리는 날이다. 해마다 음력 4월 15일 이곳에서 하동유림회와 악양정 유계(儒契) 주관으로 일두 선생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를 기리는 제를 지내는 것이다.
경남 함양 개평마을에서 출생한 일두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였다. 그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악양정에서 공부를 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일두 선생은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 후 1504년 적소에서 세상을 버렸지만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됐다.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으며, 함양의 남계서원 등에 배향돼 있다.
일두 선생은 스승인 김종직이 선비 이전에 사람으로서 갖춰야할 내용이 담겨있는 『소학』을 강조하였기에 스스로도 악양정에서 늘 이 책을 읽었고, 후학들에게도 권했다. 따라서 최근까지 제례를 마친 유림들이 악양정에서 소학을 함께 읽었다.
일두 선생이 사화에 희생되자 악양정은 폐허가 됐다. 이후 관리되지 못하다가 1899년(고종 36) 3월 향내 유림의 발의에 의해 군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1901년(고종 38)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였다.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악양정이 개항기에 중건되자 이후 악양정에서 『소학』을 강학했다. 이러한 것은 악양정 인근에 선조가 물려준 정자인 일신재(日新齋)에 거주하며 공부했던 손광언의 기록이나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진주에서 하동 북천면으로 들어와 은거했던 이택환(1854-1924)이 김현옥(1844-1910)과 함께 악양정의 소학강회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날 행사에는 하동유림회와 악양정 유계 소속 유림 30여 분이 참석했다. 제례의 공식 명칭은 석채례, 즉 ‘덕은사석채의제집사’(德隱祠釋菜儀諸執事)이다. 악양정에서 관계자들이 준비를 하는 동안 이 행사의 총무를 맡고 있는 조영수 하동다원 대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화개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후 화개면 삼신리 법하마을(법하길 34-3)에서 차농사를 지으며, 악양정의 관리와 제례행사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악양정에서 모든 준비를 한 후 정자 뒤쪽에 있는 덕은사(德隱祠)에서 제를 올렸다. 악양정에서 헌자(獻者)·집례(執禮)·축관(祝官)·찬창(贊唱)·찬자(贊者)·진설(陳設)·봉향(奉香)·봉로(奉爐)·봉작(奉爵)·사준(司樽) 등 각자 맡은 일과 이름을 쓴 방을 써 덕은사로 가지고 가 제례를 시작했다. 덕은사는 악양정에서 몇 개의 돌계단으로 연결돼 있다.
비가 내리는 탓에 덕은사의 작은 마당에 천막을 쳤다. 제문을 읽고 젯상에 촛불을 켜고 절을 했다. 제례는 향교와 정자, 그리고 제례의 성격에 따라 다르고,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제가 다 끝나자 덕은사 건물 옆에서 제문을 불태웠다.
덕은사에는 주희(1130~1200),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 돈재(遯齋) 정여해(鄭汝諧) 등 5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행사를 다 마치자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가 점심식사를 했다. 한충영(81) 성균관유도회 하동지부 회장님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공직생활을 하다 정년퇴직을 한 유도회장님은 “하동지역의 20여 곳에서 제례의식을 해 대개 한 달에 두 세 군데의 행사에 참석한다”며, “진주와 산청 등 타 지역의 행사 때도 교류 차원에서 참석한다”고 말했다. 하동 옥종면에 거주하시는 한 회장님은 “하동유도회에 500여 명이 관계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인·역사한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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