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구포 백리길 중심인 두모포에는 황학대가 있다.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일대는 기장에서 문화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 지역은 지형적 해안문화와 역사적 기억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산 윤선도가 즐겨 찾았다는 황학대의 소나무 숲에서 보는 일출 장면은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두호마을은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데, 황학대는 옛날 중국에 신선이 황학을 타고 노닐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황학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국 양쯔 강 하류에 있는 이 황학루에는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놀았다고 한다.
두모포 황학대 곰솔 해송을 비롯한 국수당, 드림성당, 어사암, 거북바위, 마을 뒤 낮은 언덕을 거반 다 차지한 거대한 당산나무 등 삼포왜란 전략기지인 ‘두모포 진성’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가 삼십여 차례나 감옥을 같다는 오래된 교회도 있다.
삼포왜란 때 남해안에 요충지마다 수군진성을 쌓아 해상방어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임진년에 쌓은 죽성리 왜성의 본성과 지성이 있어 조선시대 전쟁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보기 위해 가끔 일본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일본과 인접한 동해안이라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기장 지역 백성들은 왜구로부터 침탈을 당해왔다. 임진왜란 때도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기장읍성을 침략하여 치열한 전투도 없이 순식간에 성이 함락되는 비극을 겪었고, 이후 왜군은 기장 죽성리 왜성과 임랑포 왜성을 쌓아 침략의 전진 기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장은 일본군의 주둔지로서 어느 지역보다 많은 침탈을 겪었다.
굽 높은 제기 익은 감은 까치발로 담아들고
머리에 인 아침 해는 일어서면 쏟아질 판
솔가지 위에 백학은
홍학인 양 하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들숨날숨 발끝에 부려놓고 볕살 밭이 갈매기 떼 꽃차례로
일어서는 바다를 짊어진 어부 귀젖이 발그레 익었다 무쇠 솥 아궁이 괄던 불은
수천열도 끓는 바다 풀무질로 게우는데 대장간 망치소리가 가슴에 뛰는지라
가슴도 열고 보면 대천 한바다가 있어
망망대해 떠오른 해 손차양 짓고 보다
시린 눈 감았다 뜨면
하늘바다가 하나였다
- 박정애 졸시 〈황학대〉 전문
황학대, 하루 태동을 시작하는 아침햇살이 얇은 습자지같이 뿌연 안개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를 때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선명해진다. 이 무렵이 되면 푸른 물결위로 풀리는 햇살을 등지고 연안에서 밤을 새운 고깃배들이 포구로 돌아올 시간이다.
한 없이 넓은 바다라도 누구나 함부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자원관리법에는 허가받지 않은 어업활동은 금지하는데 어업인 아닌 일반인이 수산물을 채취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이 할 수 있는 것은 손과 투망질, 쪽대, 반두, 대낚시 외줄낚시, 가리, 외통발, 집게, 호미, 낫, 갈고리로만 수산물을 채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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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백사장과 짙푸른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어항과 해안 도로 개설로 백사장이 사라졌고 소나무도 병충해와 수해로 예전 같지가 않았다. 여름이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사람들에 의한 쓰레기와 어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최근에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훼손을 막고 있다.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데크를 깔았고 고산 윤선도 시비와 동상을 세웠다.
시비에 새겨진 ‘아버지를 제사하는 글’[1619년 기장 적소에서 쓴 제문]을 보면 이곳에 유배를 온 400년 전 성균관 한양 선비 32살의 청년, 고산 윤선도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살았을 초가집 적거소는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아내와 노비들까지 같이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고산은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황학대를 찾거나 마을 뒤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구해다가 병마에 시달리는 마을사람들을 보살폈고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를 제사하는 글
만력 47년 11월 경진 26일 을사, 불효 고자孤子 선도는 유배지에서 슬픔을 울부짖으며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합니다. 삼가 가노를 보내 현고 통정대부 행병조참의 지제교 부군의 영좌에 변변찮은 음식을 공손히 올립니다.
불초자는 무상하여 밝은 시절에 죄를 얻어 이 먼 곳을 귀양 왔으며 하늘의 가엾게 여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사멸도 못하여 화가 현고께 미치었습니다. 병에 의원을 맞아 약을 쓸 수 없었고, 질병에도 폐상역책에 참여치 못했으며, 건을 들어 머금고, 관에 기대 발을 구르고, 묘혈 사자에 임하여 예를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서리와 이슬이 변하여 분묘의 풀이 묵었는데, 달려가 곡하지 못했으니, 상하사방 불효함을 누가 이와 같다하겠으며 애통함을 품어 누가 이와 같겠습니까? 생각마다 심장을 도려내지 않음이 없고, 그 수를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중략
죄인이라 음식과 거처와 의복과 수레가 남들과 같고, 처노 또한 유배지로 따라와 빈루할 뿐입니다.
-중략
이제 한 광주리 음식을 올립니다. 술은 비록 묽지만 귀하게 채웠고, 과포는 열등하나 귀하게 여겨 부부가 친히 한 것이니, 비록 적지만 자식이 천리 밖에서 보내는 작은 정성이라 여겨주십시오. 대개 면주 건반의 뜻과 간모 요수를 제물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취한 것인데, 다만 정성이 물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아! 말은 다함이 있지만 정은 끝남이 없고, 천지는 다함이 있지만 애통함은 끝이 없습니다. 북쪽을 향해 통곡하니, 창자가 꺾이고 가슴이 찢어져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향(尙饗)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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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조선시대 송강 정철, 박인로 등과 시조 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인물로, 14세부터 시작詩作을 하여 83세에 붓대를 내려놓을 때까지 70년간 시조 75수, 한시 259편을 남겼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30세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밝히는 병진년에 올린 상소문, 일명 [병진소]로 함경도 유배되었다 기장에서 6년, 영덕에서 1년, 삼수 5년, 광양 2년을 합해 무려 16년의 유배 생활을 했다. 패기 넘치는 성균관 젊은 유생으로서 관료의 부당한 정치행동을 지적하다가 유배형을 받은 것이다.
기장에서 유배생활이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인데, 고산은 외롭고 고달픈 귀양살이를 하면서 남긴 한시와 제문 외에도 편지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에 의하면 그의 나이 32세인 1618년 겨울에 기장으로 와서 37세인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풀려날 때까지 기장에서 6년 동안 남긴 글들이 고산유고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마다 해남에서 고산의 후손들이 기장을 찾아와 유거지 일대를 둘러보기도 하고 있다. 윤선도가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부터 보길도 부용동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는 내재화된 기억의 공감이 발현된 것이라 할 것이다.
시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쓴 것들이건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니 장소성이나 어떤 시기에 쓴 작품이건 어느 장소나 공간에서의 경험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발현되기 마련이니까.
◇ 박정애 시인 : ▷기장 출생 ▷199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운포에서》, 《바다악사》 외 8권. ▷이주홍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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