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67명 등 70명의 국회의원이 지난달 24일 검찰에 박근혜 전 대통령 형집행정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수감생활을 나치의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까지 비유했다.
이들은 “우리는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든 오욕의 역사를 지적했던 밀턴 마이어의 경고를 떠올리면서, 나치 당시 아우슈비츠를 묵인했던 저들의 편견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한 잔인한 폭력을 묵인하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이 한 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 174517번으로 불린 이탈리아 유대인. 그가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으로 현대 ‘인간’그 자체의 위기를 증언하고 있다.
그는 1944년 독일 정부가 노동력이 부족해짐에 따라 사형시키려던 포로들의 평균수명을 연장하기로 결정한 뒤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 수용소 인원의 10분의 1은 의무실에 수용되어 있다. 그러나 두 달 이상 입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거나 병이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가고, 회복되어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만 퇴원하여 노역에 복귀한다.
포로들은 만인이 동등한 삶을 산다.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되는 것이다. 배고픔에 금니를 빼어 빵 서너 개와 바꾼다. 배고픔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사회적 습관과 본능은 침묵 속으로 함몰한다. 그들은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지쳐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음을 죽음으로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고참 포로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그 겨울의 의미를 안다.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자기들 열 명 중 일곱 명은 죽는다는 뜻이다. 죽지 않는 사람은 매 순간, 매일매일,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부는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겨울은 또 다른 것을 의미한다. 대형 천막 하나에 1,000명이 넘은 인원이 머물렀다. 두 개다. 겨울이 되어 하나는 해체되었고, 2,000여명이 한 막사로 몰려들었다. 고참 포로들은 안다, 수를 줄이기 위해 가스실로 보낼 사람을 ‘선발’할 것임을. 그러나 배고픔, 추위, 그리고 노동과의 싸움 때문에 생각을 위한 여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이 ‘선발’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말이다.
1944년 10월, 막사 앞에 ss 하급장교가 서 있다. 알몸인 채 10월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온 우리들은 몇 걸음 달려가서 ss 대원에게 카드를 넘기고 다시 숙소로 들어간다. ss 대원은 우리가 행동하는 불과 몇 초 사이에 우리의 얼굴과 등을 한눈에 보고 각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하여 자기가 받은 카드를 오른쪽 남자에게, 혹은 왼쪽 남자에게 건네준다. 이게 우리들 각자의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것이다. 3~4분 사이에 200명이 수용된 한 막사의 선발이 ‘완료’되고, 오후에 1만 2,000명이 수용된 전 수용소의 선발이 끝난다.
우리 막사에서는 이미 선발이 끝났다. 그러나 다른 막사에서는 진행 중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감금되어 있다. 하지만 죽통이 도착했고, 막사반장은 즉시 죽을 배급하기로 결정한다. 선발된 사람에게는 두 배의 죽이 배급될 것이다. ‘선발’과 가스실로 출발 사이의 2~3일 동안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들은 이런 특권을 누린다.
한 포로가 반합을 내밀고 보통 양의 배급을 받은 뒤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다. 막사반장은 밀쳐 쫓아버리지만 그는 다시 돌아와 불쌍하게 계속 고집을 부린다. 그의 카드는 왼쪽으로 넘겨졌고 모두 그것을 보았다. 막사반장은 카드를 확인하러 간다. 그 포로는 두 배의 배급을 받을 권리가 있다. 배급이 정확히 주어지자 그는 죽을 먹으러 조용히 침대로 간다.
쿤은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다. 쿤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옆 침대의 그리스인, 스무 살 먹은 베포가 내일모레 가스실로 가게 되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베포 자신은 그것을 알고 아무 말도 없이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작은 전등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왔을 때, 174000번대에 속하는 우리 이탈이아 인들은 96명이었다. 그중 10월까지 생존한 사람은 불과 29명이었고 이들 중 8명은 ‘선발’되었다. 이제 우리는 21명이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우리들 중 몇 명이 새해를 볼 수 있을까? 봄까지 몇 명이 살아남을까?
수용소의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내일 아침’이다. ‘선발’되지 않았거나 살아남은 사람도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정책에 의해, 수인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3개월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것은 1945년 1월 27일이다. 그 시점까지 살아남은 수인 중 5만 8000명은 퇴각하는 독일군에 의해 연행되어 대부분 ‘죽음의 행진’ 중에 목숨을 잃었다. 구제된 수인은 7,000명에 불과했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들이 있었나? 집단적인 반란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프리모 레비는 답한다.
아우슈비츠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수백 명도 되지 않았고, 그들 중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수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 포로들은 의욕이 없을 뿐 아니라 굶주림과 학대 때문에 극도로 허약한 상태였다. 그들은 완전히 삭발을 하고 금방 눈에 띄는 줄무늬 포로복을 입고 있었다. 소리 없이 빨리 걸을 수 없도록 나무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수용소가 폴란드에 있었는데 포로들은 폴란드의 언어와 지리에 어두웠다.
탈출하다 잡힌 사람은 점호 마당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은 뒤 공개처형되었다. 발각된 탈출자의 친구들은 공범으로 간주되어 독방 감옥에서 굶어죽어야 했고, 그가 소속된 막사의 포로들은 24시간 동안 서 있어야 했다. 가끔은 ‘범죄자’의 부모들이 체포되어 수용소로 수송되어 오기도 했다.
몇몇 수용소에서는 실제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모든 반란은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가진, 그러니까 신체 상태나 정신 상태가 다른 일반 포로들보다 훨씬 나은 포로들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었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비겁해서 반항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고 불쾌하게 들린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 젊고 군사적 훈련을 받고 정치적 의식도 충만하던 러시아 전쟁포로 300명을 대상으로 실험된 곳이라는 것을 떠올려보기만 하면 된다. 러시아인들 역시 저항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내막을 독일인은 알고 있었을까? 수백만 명의 집단학살이 어떻게 유럽 한복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될 수 있었을까? 프리모 레비는 답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 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2019년 4월 대한민국. 독재와 국정농단에 복무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선출된 권력에 대해 독재타도를 외친다. 동물국회를 막기 위해 여야가 2012년 합의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을 동물적 행동으로 무력화하려 한다.
프리모 레비가 통찰했듯, ‘고의적인 태만’도 유죄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이 올라가 있다. 5월 2일 01시 05분 현재 1,637,332명이 참여했다. 인간의 ‘동물적 행동’을 방관함도 그 공범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촛불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프리모 레비/이현경 옮김,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 **강병한, 「“박근혜 수감 생활, 나치 아우슈비츠 연상” 형집행정지 청원서」, 『경향신문』, 2019년 4월 25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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