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강자의 이익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민주정체도 전제정체도 귀족정체도 있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법률을 제정한다.
곧, 민주정체의 경우에는 민중을 중심으로 한 법률을 제정하고, 전제정체에서는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한 법률을 제정하고, 귀족정체에서는 귀족을 중심으로 한 법률을 제정한다. 그들은 그러한 법률을 제정한 연후에, 자기네의 이익이 되는 것은 피지배자들에게도 옳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이것을 어기면 법률을 위반한 자, 또는 정의에 어긋난 범죄자로서 처단한다.
이와 같이 지배자의 이익을 위하는 정의의 원리가 어느 나라에서나 같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배계급이란 요컨대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자의 이익이 되는 일은 어디서나 정의로 통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소피스트)의 ‘정의론’이다. 트라시마코스가 정의(올바름)에 대한 논쟁에 뛰어들게 된 경위는, 케팔로스(무기제조 공장을 경영하는 부자로 믿음이 깊음)와 폴레마르코스(케팔로스의 장남)이 주장하는 ‘관습에 따른 정의’가 소크라테스로부터 논박을 당했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코스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곧 ‘지극히도 순진하신’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양치기의 정의(올바름)는 양의 이익을 위해 양을 잘 돌보는 것이며, 통치자의 정의는 통치를 받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힘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트라시마코스는 양치기들은 양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을 통해 이득을 얻기 위해서 양을 돌보며, 통치자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2300여 년 전 플라톤이 제기한 문제이다. 이 질문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플라톤의 탁월함이다. 2000년 이상 해소되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 더구나 그 질문이 별스레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 탁월함의 표지(標識)가 아니겠는가!
20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맘 따로, 몸 따로’(혹은 ‘내로남불’)에 별로 인지부조화를 느끼지 않는다. 자격시험이나 공직에 나설 때는 ‘양치기는 양을 돌보는 일 그 자체에서, 시민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서’ 보람을 가지며, 그것이 정의라고 답안지를 작성하거나, 출마의 변을 늘어놓는다.
실제로는 이익을 위해 양을 돌보고, 사익을 위해 공직을 활용한다. 인지부조화 때문에 고민을 할 법도 한데, 이 ‘양두구육’이 전혀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너와 나 우리 대부분이 ‘말 따로, 행동 따로’ 놀기에 문제의식조차 갖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가정 출신이다. 정치적 야망도 가졌으나, 정쟁에서 외가 친척들이 살해당하자 정치판에 환멸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스승 소크라테스가 어이없는 이유-신성 모독죄와 젊은 세대를 타락시킨 죄-로 고발당하고, 재판에서 배심원 투표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자, 정치판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후 철학에 전념했다. 공자가 성숙한 나이인 55세 때부터 자신의 정치사상을 펴려 14년간 주유천하에 나섰으나, 어떤 왕에게도 쓰임을 받지 못해 쓸쓸히 귀향,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한 것과 같다.
플라톤이 ‘철인왕’을 내세운 것도 공자가 ‘성인’(聖人)을 희구한 것도 같다. 철인왕은 내적으로는 지성과 절제의 능력을 바탕으로, 사적 이익을 완벽히 억제하며 공익을 앞세워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은 지금 우리가 쓰는 ‘지혜와 덕이 뛰어나 길이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聖者.saint)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공자의 성인은 ‘왕 중에서도 훌륭한 왕에 대한 존칭’이다.
철인왕이나 공자의 성인이나 모두 『장자』/천하편에 나오는 ‘내성외왕’(內聖外王)과 같다. 곧, ‘내적으로는 성인이고 외적으로는 왕’을 가리킨다.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플라톤도 공자도 현실 정치에서 실패하고 난 후,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기획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인가? 우리가 플라톤은 천재이고, 공자는 성인이라는 선입견으로 그들의 기획을 검토하면, 대수로울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상 실존 인물이다. 너와 나와 하등 다를 게 없는 한 인간이다.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그들의 사상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 비로소 ‘신비감’이 제거되고, 탁월함에 경건히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게 된다.
평범한 우리의 이웃인 그들은, 한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데 집중하는 우리와 달리, ‘필연적이고 본질적으로 선을 증진시키면서 보편적인 것’, 곧 정의(올바름)를 실현할 기획에 여생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플라톤은 민중들이 이익을 추구할 뿐, 정의는 개나 물어가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자 역시 의(義·올바름)는 안중에 없고, 이(利·이익)만을 대중이 붙좇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 애써 ‘경이중의’(輕利重義·이익을 낮게 보고, 올바름을 중요하게 여김)를 강조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물론, 플라톤 기획의 탁월함에 경탄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곧, 현실적인 물질생활 그 너머의 ‘진정한 행복’에 대한 통찰이다.
세리포스(에게해에 있는 작은 섬)에서 온 친구가 테미스토클레스(아테네의 장군이며 정치가. 기원전 538년 경~468년 경)에게 트집을 잡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유명하게 된 것은 당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부강한 덕택입니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내가 세리포스 섬 사람이었다면, 유명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테네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유명해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도 이치는 똑같다. 즉 훌륭한 사람도 가난해서는 늙어서 편할 리 없겠으나, 반대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돈이 있어도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최현 옮김/플라톤의 국가론/1.의로운 사람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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