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우리가 만든다. 땅에서 돌출하거나 하늘에서 벼락같이 떨어지는 현실이란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그 예외적인 경우도 사회공동체의 일부만 영향을 받는다.
개인에 따라 앞으로 혹은 뒤로도 가고, 외로 혹은 오르로도 간다. 생명은 곧 ‘움직임’이고, 움직임의 정지는 곧 소멸이다. 하여 현실은 머물지 않고 시간이나 세월에 따라 변화한다. 이 사회공동체의 현실은 행위자인 각 개인들 행동의 합력이 변화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과 뉴노멀. 지금의 현실이 어제의 현실보다 전진이든 퇴보든 간에 예측이 가능했고,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는다면 이는 정상이다. 좋든 궂든 시간에 따른 당연한 변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돌출 변수로 인해 심하게 퇴보하는 경우가 비정상이다. 의도치 않는 도약도 물론 비정상이다. 그러나 역사상 대가 치르지 않은 진보의 도약은 찾기 힘들다. 퇴보의 비정상만 역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비정상은 세인을 눈을 가리는 악마적 기획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는 중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발현된다.
따라서 비정상 상태에서 삶의 조건은 몹시 악화되지만, 좀 더 멀리 보면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다. 왜냐면 비정상을 배태한 누적된 모순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이건 간에 비정상의 씨앗은 배태하고 있다.
종기는 살이 되지 않는다. 종기를 쓰다듬어 다스리는 것보다는 종기를 째어 고름 빼고 종기 뿌리를 도려냄이 더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끔찍하겠지만, 팔다리를 잃는 고통에 비한다면 차라리 가벼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회공동체도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다. 모든 생명체에서 비정상은 일시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비정상은 정상으로 회귀한다. 생명체의 정상회귀 본능은 끈질긴 생명력의 보증이다.
비정상이 고착화되면, 그 사회는 뉴노멀 상태로 변화된다. 격렬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회구성원은 깡그리 도태될 것이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만이 뉴노멀 시대의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접받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남자 카미유와 결혼한 테레즈 라캥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라캥은 로랑을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결국 이 둘은 라캥의 남편인 카미유를 살해한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프랑스 문학의 거장 에밀 졸라(1840~1902)의 소설 「테레즈 라캥」(1867)의 줄거리이다.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이 소설이 바로 졸라의 자연주의를 연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 소설에서 라캥과 로랑은 격렬한 육체적 욕정에 사로잡히는데, 이러한 애정 행각을 담은 소설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졸라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하여 행한 것뿐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졸라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욕정에 사로잡혀서 격렬한 관계를 맺는 과정을 마치 우리에 갇힌 두 마리 돼지의 교미를 관찰하듯이 아무런 감정 없이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는 해부학자나 외과의사가 시신이나 환자의 환부를 어떤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하듯이 그것을 들여다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주의의 핵심이다. 곧, 자연주의는 현실을 아무런 감정의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주의 철학자이자 예술이론가인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는 졸라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현실을 주체의 아무런 개입 없이 중립적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한 어떤 비판의식도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소설 「테레즈 라캥」의 경우에, 여주인공이 하층민 출신이라거나 부르주아지 가정의 허구적 모습 등은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그저 라캥 및 로랑의 애욕과 몰락의 과정만을 두 인물에 현미경을 대고 관찰할 뿐이다. 한마디로 자연주의 소설 속에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계급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은 그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처럼 취급된다. 착취와 억압이 발생하는 현실은 자연주의 소설 세계에서는 실종되고 만다.
루카치에게 현실이란 자연주의 소설 속에 그려진, 인간과 무관한 것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한 노동자 ‘가’의 일상을 현미경을 대고 아무리 들여다본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작업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이 평범한 일상의 모습 어느 곳에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억압이 드러나는가? 그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특정한 관점이 들어갈 경우에만 가능하다.
‘가’가 사회 속의 한 개인이 아닌 노동자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에만 ‘가’의 일상 속에서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가 드러난다. 루카치가 보기에, 주체와 아무런 상관없는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적 관점이야말로 착취와 억압의 흔적을 교묘하게 없애는 부르주아지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박영욱/『듣고 보고 만지는 현대사상』(2024))
대파 한 단이 875원, 이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경악스럽다. 875원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비정상적 사고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대파 경작 농민들은 다 죽으란 말을 그렇게 멀쩡한 표정으로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객관적인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점이 필요하다. 소비자가 있으면 생산자도 있다. 적어도 공적 업무를 할 사람에게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수 요건이다. 비정상적인 가격을 합리적이라고 보는 비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이 어찌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림에는 행동이 필요하다. 작은 하나의 행동 실천이 혁명적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 작은 실천이 없으면 비정상은 고착되고, 개인의 어떤 몸부림도 소용없는 상황인 뉴노멀로 전화한다. 이는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러서 ‘자기혁명’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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