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3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5장 폭발직전 버든마을(1)

이득수 승인 2024.04.25 08:00 의견 0

Ⓒ서상균

19. 폭발직전 버든마을

8박 9일 미국서부지역을 관광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벌써 3년째 해마다 하는 여행이라 열찬씨나 영순씨 둘다 구경을 하면 할 만하지만 뭐 특별히 감회가 깊을 것도 없어 열찬씨는 이번 여행기를 별도로 남기지 않기로 했다.

급한 대로 대충 짐정리를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순씨는 모처럼의 한국소식을 듣느라고 24번 YTN뉴스를 보는데 하도 열심히 집중하는지라 차마 다른 채널로 돌리기가 뭣한 열찬씨가 야구광 설영수씨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이네. 설 사장!”

“아이구! 국장님. 언제 귀국했소.”

“방금 전. 그런데 요새 롯데성적은 어떻소?”

“그럭저럭. 기대하면 실망하고 포기하면 힘을 내는 팀이 롯데 아니겠소. 그럭저럭 반타작이지.”

“올해 포스트시즌에는 나갈 것 같소?”

“글쎄요. 대호가 있는 한 턱걸이는 하겠지.”

“빅 보이 대호는 요새 타격이 좀 어떻소?”

“괜찮은 편이지만 썩 좋은 편은 아니요. 한 30홈런에 3할,타격 10위권에는 들겠지만 타이틀을 따기는 힘들 거요.”

“하긴 해외진출도 지연되고 해서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되었겠지.”

하며 32승 1무 27패의 무난한 성적을 확인하는데

“저녁에 산우회사무실로 나오는 거요? 모처럼 선수들 집합시킬까?”

“아니. 오늘은 쉬어야지.”

하는데

“당신 배고파요? 라면이라도 끓일까?”

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가 다 되었다.

“당신 귀찮을 건데 빵이나 먹고 자지.”

하는데

“엄마, 귀국했어?”

슬비의 전화가 오더니

“잘 다녀오셨어요?”

일부러 짠 듯 서울며느리의 전화도 왔다. 오늘은 늦고 피곤하니 나중에 이야기를 하자며 영순씨가 온수를 부은 컵라면 두 개를 들고 왔다.

이튿날 아침을 먹자말자 구서동 밭으로 향하는데 자동차가 오륜동터널을 지나 멀리 금정산의상봉과 나비바위, 그 아래로 구서동밭과 롯데캐슬아파트가 보이는 순간 가슴이 울렁울렁 하던 열찬씨가 산복도로에 영순씨가 차를 대는 순간

“내 먼저 간데이. 천천히 온나.”

하고 개울을 타고 밭으로 향하는데

“아이구, 국장님 미국여행은 잘 마쳤는가베.”

오각정에서 소리치는 교장선생님을 보고

“수고하셨지요? 고추밭이랑 가지, 오이, 도마도랑 다들 무사한지요?”

“아니, 우리 이 국장이 늙은이 안부는 안 묻고 자기 채소안부만 묻네.”

“아, 참 그렇지. 건강은 좋으시고 사모님도 무탈하신지요?”

“엎드려 절 받기지만 다들 무탈해요. 곡식도 무탈하지만 자꾸만 풀이 나고 칡넝쿨이 번지는데 내가 숨이 차서 말이야.”

대답은 건성으로 듣고 저 안쪽 아침부터 소나무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고추밭을 둘러보고

(많이 자랐네. 밑에 곁순이랑 너무 일찍 핀 꽃을 따주어야겠네.)

하고 오이넝쿨이 올라가게 울타리를 쳐준 곳에 이르러서는

“아이구야!”

절로 탄식이 나왔다. 한창 자라는 오이넝쿨을 제 때에 지지대에 붙잡아 매지 않아 그대로 땅바닥을 기는 줄기에 노란 오이꽃이 피고 일찍 핀 꽃에서는 손가락만 한 오이가 가시오이가 맺혀있었다. 급한 대로 나일론 끈을 끊어 붙잡아매는데

(아뿔사!)

너무 일찍 맺은 오이가 아직 수세가 약해 그런지 이마만 크고 꼬리는 짧은 두타(頭陀)형이 되어 두 개나 땅바닥에 누워있는 것이었다.

(처음 맺는 한 두 개를 너무 늦게 따면 한해 농사 내내 영향을 미치는데...)

한숨을 쉬며 가지와 토마토도 둘러보는데

“성질도 어지간히 급하제? 마누라를 밭에 곡식 보듯이 하면 내가 매일 업어줄 건데.”

이제 도착한 영순씨가

“나오소. 커피나 한 잔 하고 천천히 합시다.”

해서 원두막으로 나가는데

“교장선생님, 뭐 마땅한 선물도 없고 해서 여기 종합비타민 두 통 사왔으니 사모님하고 한 통씩 드세요.”

라스베이거스에서 LA로 들어오던 길목의 여행객을 상대로 한 주유소와 마트가 있는 비스트란 조그만 마을에서 산 비타민을 꺼내주자

“뭐 이런 과분한 걸 다...”

교장선생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여름 한철 하루에 다섯 마디가 자라 하룻밤에 고손자를 본다는 바랭이풀과 개비름과 망초, 광대나물 같은 잡초를 뽑아내고 뒷산 비탈에서 뱀처럼 침입해 구불구불 울타리를 기어올라 골을 타 넘어 고추밭에 깊이 침투한 칡넝쿨도 일일이 잘라냈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 일을 마치고 오늘은 모처럼 같이 식사나 하자면서 금사동의 <석대다리집>을 향하는데 영순씨의 자동차가 저만치 앞서고 뒤따르는 교장선생의 차에 열찬씨가 탔는데 이미 78세의 노령이라 운동신경과 반응속도가 다 느려 차선을 바꿀 때 마다 위태위태했다. 영순씨는 9천원 보통으로 둘은 일만 천 원 특탕으로 보신탕을 시켜

“오랜만이라 맛이 꿀맛이군.”

“남자는 늙어나 젊으나 보신탕 이상이 없어.”

하며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는 사이 시원소주 한 병을 시킨 열찬씨가

“역시 부산사람은 시원이야. 같은 시원도 미국에서보다 제 자리 부산에서 먹으니 더 맛이 좋네. 물론 사직야구장보다는 못 하지만.”

하며 소주 반병을 거의 다 비우는데

(...!)

숟가락을 내려놓으려다 교장선생과 눈이 마주친 영순씨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로 한참이나 마주보다 황급히 눈을 돌렸다.

“이래서 늙으면 죽으라는 거지. 추한 꼴을 보여서 미안해요.”

무엇에 걸렸는지 틀니를 꺼내 휴지로 쓱쓱 문질러 다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삼키기 시작하는 교장선생을 보고 영순씨가 그만 숟가락질을 멈추고 커피를 가지러갔다. .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하나는 거실소파에 하나는 안방침대에 누웠는데 삑삑삑삑 현관의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 할머니 집에 안 왔어?”

소리에

“아이구, 영서야! 내새끼!”

영순씨가 황급히 달려가 아이를 안아 올리고

“영서, 안녕!”

열찬씨도 아이를 한 번 안아보고 내려놓으며

“그 새 많이도 컸네.”

하는데 벌써 빨간 가방을 꺼내온 영순씨가

“아이 예뻐! 이거 내 가방이지. 할머니 고마워.”

영서가 좋아 폴짝폴짝 뛰고

“영서야, 이거 미국하고도 LA, LA하고도 디즈니랜드에서 산 가방이다. 여기 디즈니랜드 마크 좀 봐!”

하며 귀가 쫑긋한 토끼마크를 가리키며

“누가 묻거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미국에서 사왔다고 자랑해도 돼.”

꼭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며 기뻐했다.

슬비네 식구랑 가끔 외식도 하고 구서동 밭에도 부지런히 다니며 오이, 가지, 토마토와 고추의 첫 수확을 하고 열무김치도 맛나게 담갔다. 예나 지금이나 막대기로 호박잎을 뒤지며 애호박을 찾는 재미에 빠진 영순씨가 햇감자와 애호박을 넣고 일품 수제비를 끓여 우리가 이렇게 사는 날이 다 오는구나 하면서 느긋이 하루하루를 즐겼다.

한 가지 걱정꺼리가 생긴 것이 슬비네의 회사가 점점 경영상태가 악화되어 사업을 접나마나 고비에 선 것이었다. 오너의 친구인 김영삼대통령 시절에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낼 만큼 규모나 실적이 당당했던 회사가 늙은 창업주가 차츰 새로운 아이템이나 시설투자에 소극적으로 변하자 밑에 직원들은 슬슬 눈치나 보고 잔꾀를 부리고 아직 과장으로 머무는 후계자 젊은 아들이 너무 귀하게 자라서인지 도무지 경영마인드가 없는 것으로 발주처 나이키에 소문이 나서 더는 신규발주를 주지 않을 방침이어서 회사가 문을 닫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평소 진취성이 부족해 윗사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살아가는 소극적 도연씨와 달리 개발과에서 직접 나이키의 발주사원들과 교섭을 하고 저녁에는 밤새워 접대 술을 마시는 여장부 슬비는 애가 바짝바짝 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며

“엄마, 아빠 우리 애기 하나 더 낳으면 안 될까?”

조심스레 묻는 슬비에게

“지금 회사도 어렵다는데 우째 키울려고?”

영순씨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나는 인자 아아 더 못 본다. 영서 저거 하나 키운다고 양 무릎이 절단이 나서 말이다.”

하는데

“영서 혼자 동생도 없이 자라는 것도 보기 딱하지만 신평의 어머니도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더 낳으면 당장 현금 천만 원을 준다고 난리고 말이다.”

“그라면 니가 돈 천 만원에 넘어갔단 말이가?”

“꼭 그렇기 보다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서.”

“몰라. 니 알아서 해라.”

하는 순간

“참 아빠 생각은?”

해서 기습을 당한 열찬씨가

“아이는 언제라도 축복이지. 자연스레 주어지는 복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지. 영서에게도 동생이 생기고 아들이라도 낳으면 또 외동인 김서방네 대도 이어가고...”

하는 순간

“보소. 시방 당신 그 말 책임질 거요?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고 아아는 당신이 다 키우소.”

어수선한 분위기로 대화가 끝이 났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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