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을 한 가락 사러 농협 농기구 판매 센터에 갔다. 요즘은 낫이 참 잘 나온다. 날이 시퍼렇게 서 있어서, 풀에 대기만 해도 슥삭 베어질 것 같다. 묵정밭의 풀을 당장 베고 싶다. 한 자루 골라 챙기고 센터 앞 나무 그늘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친구가 다가왔다. 또래 친구들 중 담배 피우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사람이다. 내가 한 개비를 꺼내자, 친구는 손사래를 친다. ‘끊은 지 보름 됐다’며 고개 돌려 귀밑을 보여준다. 금연패치를 붙였다. “손자가 건강에 나쁘다며 하도 끊으라고 해서….”
센터에서 농약을 사서 나오는 선배 둘이 옥신각신하며, 우리가 있는 나무그늘로 왔다. “머리 숫자가 맞아야지, 00이 정자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서 고스톱을 치면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안 돼. 마누라가 술 마시면 질색팔색을 한다.”
“형님, 아직은 괜찮네요. 형수님이 걱정을 해 주니까요.” 내가 껴들었다. 그러자 다른 선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은 무슨 걱정. 일 시켜 묵을라고 그러지.”
자전거를 타고 되짚어 집으로 오면서 생각해 본다. 일주일에 한 번쯤 소주 한두 병을 마신다. 사흘에 두 갑 꼴로 담배도 피운다. ‘절대 고독’의 생활이라 눈 흘김 주는 손자나 아내가 없어서인가? 아서라, 애당초 술·담배의 개인적 필요나 긍정적인 효과를 꼬맹이와 아내가 알 턱이 있나!
당구도 칠 줄 모르고, 고스톱은 쳐 본 지가 몇 십 년은 된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본 지도 까마득하다. 현미밥을 먹고 탄산수를 마시지도 간식을 먹지도 않고, 사흘에 두 번 이상은 운동으로 땀을 흘린다.
당뇨도 없고 고혈압도 아니고, 치료약을 먹어야 할 질병도 없다. 감기로 콧물은 흘려봤어도 감기약을 먹어본 적은 없다. 영양제나 건강보조식품은 평생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마는,
술이야 어쩌다 한 번 농협에서 1300원짜리 한두 병을 사와서 책상을 식탁 삼아 마시니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담배다. 실용적으로 따져, 희소자원인 돈이 많이 든다. 그 돈으로 책을 산다면? 대여섯 권을 더 살 수 있다.
그 희소자원을 희생한 결과로, 더 행복해지는가? 단지 니코틴 중독에 굴복한 꼴이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을 일상에서 체현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대의 과학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축적된다. 이를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이 발생하지만, 기존의 과학 공동체는 이에 저항한다. 임계점이 이르고,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자기합리화로 담배를 계속 피우지만 희소자원만 희생할 뿐 행복의 증진은 없다. 금연의 이점을 알지만, 악습관(중독)의 저항을 넘어서지 못한다. 의지박약에 대한 자책과 금연으로 책을 더 살 수 있다는 자각의 누적으로 흡연은 임계점이 이른다. 드디어 금연을 통해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주역』에서는 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단칼에 철저히 결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택화혁(澤火革·䷰)괘를 보자. 위에는 태상절(☱) 못괘이고, 아래에는 이허중(☲)불괘로, 못과 불의 택화이다. 이 택화는 ‘고칠 혁(革)’자의 혁괘이다. 곧, 개혁(改革), 혁신(革新), 혁명(革命)의 뜻이 있다.
위에 있는 못의 물은 흘러내려서 아래에 있는 불을 끄고, 아래에 있는 불은 타올라 위에 있는 못의 물을 말린다. 곧, 서로 상극(相剋)이고, 서로 멸식(滅息)시키는 상멸(相滅) 관계에 있다. 그래서 이런 때에는 개혁이나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혁(革)’에는 세 가지 층위(層位)가 있다. 대인호변(大人虎變)과 군자표변(君子豹變)과 소인혁면(小人革面)이다.
호랑이가 가을이 되면 털갈이를 한다. 여름철에 드문드문 났던 털이 가을이 되면 총총하게 나서 빛이 난다. 완전한 털갈이이다. 이처럼 고치려면 완전히 뜯어고쳐야지 소소하게 고치려 하면, 변혁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는다. 그래서 개혁을 하려면 호랑이가 변하듯이 해야 한다는 말이, 호변이다.
대인은 누구냐? 비룡재천(飛龍在天)의 용대인(龍大人)은 요순(堯舜) 같은 성인을 이른다. 대인호변의 호대인(虎大人)은 탕무(湯武·탕왕과 무왕)에 해당한다. 곧, 오늘날의 대통령이 되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호변하면 하 좋으랴! 마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이겠지. 주역의 고대가 아니라 여기는 현대이니, 혁신은 대통령보다 상위인 주권자 국민의 몫이겠지.
표범도 호랑이만은 못하지만, 완전한 털갈이로 빛이 난다. 고대의 군자는 경·대부 등 지배계층을 이른 말이나, 현대에서는 ‘깨어있는 시민’ 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소인이다. 소인은 혁면(革面)한다. 곧, 마음속을 확 바꾸는 게 아니라, 낯빛만 바꾼다. 현대의 소인은 누구일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하는 ‘무사유(無思惟)의 죄’를 범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이히만은 ‘그저 시키는 대로’ 업무를 한 것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의 업무(죽음의 수용소 소장)가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이나 문제의 장차관들, 아이히만과 다를 바가 있는가?
악을 악마가 저지르는 게 아니다. 악은 평범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다(‘악의 평범성’).아이히만도 훌륭한 국민이었고, 따듯한 아버지였고, 평소 주위의 슬픈 일에 가슴 아파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갈파했다. 생각이 없는, 성찰할 줄 모르는, 타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시민과 관료가 곧 소인이다.
개인사로 돌아와서 금연, 작심삼일의 혁면일까, 단칼에 결행하는 표변일까? 소인과 군자의 갈림길이 담배에 있음이랴!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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