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말했다. “내가 본디 어리석어서 그런 경지까지 나아가지 못하니, 원컨대 선생께서 내 뜻을 도와서 분명히 나에게 가르쳐 주시오. 내 비록 똑똑하지 못하나, 한번 실제로 시행하여 보겠소.”
맹자가 말했다. “일정한 생활근거가 없어도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을 지니는 일은 선비라야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라면 일정한 생활근거가 없으면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이 없게 됩니다. 진실로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이 없게 된다면, 방탕·편벽·사악·사치 등 못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그들이 죄에 빠지게 된 뒤에야 쫓아가 그들을 처벌한다면, 이는 백성들을 그물질하는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하는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양혜왕편 상/제7 제환진문장-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말의 전거(典據)이다. 항산은 일정한 생활근거나 경제적 안정으로, 항심은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이나 도덕적 심성으로 풀어쓸 수 있다.
위 맹자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시대상황(시리즈⓺)과 그 시대의 신분질서(칼럼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법권 독립’과 ‘사법부 독립’으로 착각 말라>)에 대해서 살펴봤다.
‘일정한 생활근거가 없어도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을 지니는 일은 선비라야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라면 일정한 생활근거가 없으면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이 없게 됩니다.’
이 부분의 원문은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이다. 편의상 사(士)를 ‘선비’로, 민(民)을 ‘일반 백성’으로 해석했는데, 현대적 의미와는 매우 다르다.
『논어』나 『맹자』는 2,000여 년 전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의 경서(經書)이다. 이 시대의 낱말의 의미와 현대의 의미는 다르다. 언어도 생물과 마찬가지로 출생-성장(변화)-사멸한다. 한 예로 ‘寺’(사)는 ‘절’을 의미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고문서에서는 ‘관청’이나 ‘호텔’의 의미였다.
‘士’는 현대적 의미의 ‘선비’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사민(四民), 곧 사농공상 중 맨 앞자리인 사민(士民)을 뜻한다. 생업이 ‘공부’다. 공부하여 지배계급의 참모가 되어 밥벌이를 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을 “권력자·대중·역사 모두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사적 경험과 양심에 따라 공적 발언을 감행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대 차이로 인한 사회적 질서만 배제하면, 공자가 중도주의를 표방하며 내세운 ‘사’(士)와 정확히 일치한다.
맹자는 이상적인 사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민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더라도 결코 도덕적 타락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 유학자로서의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이상적인 사민이 몇이나 있었을까마는 말이다.
「주소(周宵)가 말했다. “옛날 군자들도 벼슬살이를 했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사민(士民)은 벼슬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삼 개월 동안 섬길 군주가 없으면 안절부절 벼슬자리를 찾아 다른 고을로 떠났으며 그때는 반드시 임용되면 바칠 예물을 싣고 갔다’고 합니다.
공명의(公明儀)의 말에 의하면, ‘옛날 사람들은 삼 개월 동안 섬길 군주가 없으면, 굶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조문을 갔다’고 합니다.”」 -맹자/등문공 하-
사민과는 달리 왜 민(民, 농공상)은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게 된다고 맹자는 말했는가?
유교를 ‘명교’(名敎)라고도 부른다. 공자가 ‘정명’(正名)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명이란 무엇인가? 왕은 왕답고, 제후는 제후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군자(관장)은 군자답고, 신료는 신료답고, 사민(士民)은 사민답고, 농민은 농민답고, 공민은 공민답고, 상민은 상민답고, 천민은 천민다워야 한다는 게 ‘정명’이다.
정명에 따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사민(四民)의 직분이 겹치지 않도록 주거지역을 엄격히 구분했다.
「환공이 물었다. “민(사농공상)이 각자 자신의 사업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관자(管子)가 대답했다.
“사민(四民, 사농공상)이 섞여 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섞여 살면 말이 난잡해지고 그 사업이 바뀌어버립니다.
옛 성왕들께서는
사민(士民)은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서 살도록 했고
공민은 관청에서 살도록 했으며
상민은 시장에서 살도록 했으며
농민은 논밭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士)의 자제는 언제나 사민(士民)이 되며
공의 자제는 언제나 공민이 되고
상의 자제는 언제나 상민이 되고
농의 자제는 언제나 농민이 되는 것입니다.”」 -국어/제어-
신분제도 하에서 생업이 고정되고 거주지역까지 제한된 사회에서 ‘항산’, 곧 생업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저문화생활 등은 언감생심이고,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굶어 죽는 길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아사(餓死)에 내몰린 급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적이든 계획적이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도적질이든 마다하겠는가. ‘방탕과 사치’는 맹자가 그냥 갖다 붙인 단어일 뿐이다. 굶어죽을 판에 웬 방탕과 사치란 말인가.
당연히 도덕심을 잃고 편벽하고 사악한 일로 생존을 도모하다 죄를 짓게 된다. 그러면 지배계급은 죄인을 잡아 코를 베든 발꿈치를 베든 이마에 자자(刺字)하든 처벌하게 된다. 이를 맹자는 ‘백성들을 그물질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라고 한 맹자의 본의는 무엇일까? “백성들이 생사의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들이 들고 일어나 왕 곧 당신을 왕위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니 왕 자리 보전하고 싶으면, 착취만 하지 말고 백성들이 먹고 살게 해라, 요즘 말로 민생을 돌보라”라고 우회적으로 풍간한 것이다.
『맹자』는 2,000여 년 전의 고문서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살아남이 오늘에까지 읽힌다는 의미에서는 ‘고전’(古典)이다. 그러나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읽기는 오독일 뿐 아니라, 현실 적합성도 가지지 못한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는 구절을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이 말은 ‘군주민주’(君舟民水)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왕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뜨게 하기도 하지만, 뒤엎을 수도 있다. 곧, 왕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