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기가 확 느껴진다. 가을이 대문 앞까지 온 것 같다. 올해는 계절의 전령이 늦어도 한참 늦게 도착했다. 경험상으로 예년에는 광복절을 기점으로 더위가 수그러들었다. 올해는 더위 꼬리가 너무 길었다. 지구 가열(Global Heating)로 여름이 보름 정도 길어지고, 그만큼 겨울이 짧아졌다는 보도를 몸으로 확인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발바닥이 참을 의식한다. 온도계를 본다. 한낮의 방안 온도는 아직도 섭씨 30도를 넘나든다. 그래도 용케도 몸은 방바닥의 냉기를 알아차린다. 냉돌은 바로 군불을 연상시킨다. ‘그래, 가을이 왔으니 땔나무를 준비해야겠구나.’

일찌감치 땔나무 궁리는 하고 있었다. 1.5km 상거의 농협 자재센터 마당 한구석에 나무 파레트(wood pallet)가 쌓여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아두었다. 보름 전쯤 동네 후배인 농협 송 차장에게 가져가도 좋다는 호의도 받아둔 터였다. 문제는 운송 수단이었다. 트럭이 있어야 한다.

트럭을 빌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부탁을 하면 기꺼이 들어줄 친구가 없는 바도 아니지만, 그래도 말 꺼내기가 참 조심스럽다. 하여 파레트 가져오는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이러던 차에 오늘, 점심 후 졸음이 쏟아져 산책길에 나섰다.

한길을 건너 동네 어귀를 벗어나서 들판 초입에 재첩 공장이 있다. 그 앞을 지나는데 마침 사장인 후배가 사무실에서 나온다. 눈이 마주쳐졌다. 바로 그 순간에 그냥 부탁을 했다. 미리 작정을 하고 한 일은 아니다. 후배는 선선히 키는 차에 꽂혀있다고 말했다.

묵은 숙제를 마친 듯이 가벼운 기분으로 트럭을 몰아 파레트 더미 앞에 세웠다. 막상 차에 실으려니, 무게와 부피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좀 거리를 두고 눈대중으로는 봐서는, 하나씩 달랑 들어 옮겨 실을 수 있겠거니 하고, 쉽게 생각했다.

웬걸, 110×120×10(cm)의 부피로 무게는 얼추 20kg이 넘을 성싶었다. 게다가 키 높이 이상으로 쌓여 있다. 낭패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농협자재센터 사무실로 가서 센터장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밝혔다. 센터장은 흔쾌히 지게차로 떠서 실어 주었다.

두 번 왕복하여 파레트를 마당에 부려 놓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이로써 올 겨울은 따뜻하게 날 수 있게 되었다. 이마와 콧잔등의 땀을 한번 훔치고 찬물 한 사발을 들이키고 나서, 축담에 앉아 땔감 벼늘(가리)을 흡족히 바라보며, ‘이타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진화 이론에서는 이타성을 비용과 편익의 관계로 정의한다. 내가 손해를 보면서 남을 돕는 행위만이 이타성이다. 예컨대 궁핍한 친구에게 아무 대가도 없이 생활비 10만 원을 건네는 경우다. 반대로 내가 비용을 치르지 않고 남에게 편익을 제공했다면, 그것은 이타성으로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협에 가는 길에 이웃 할머니의 공과금을 대신 납부해주는 일은, 내게 추가 비용이 들지 않았으므로 이타성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자연 선택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같은 집단 안에서 어떤 형질이 다른 형질보다 번식에 유리하면, 그 형질이 다른 형질보다 더 번성한다. 따라서 자연 선택은 ‘자신의 번식 성공’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이기적 과정이다.

타인(혈연관계가 아닌 사람)은 나와 유전적 관계가 없다. 곧, 내 유전자 번식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내가 타인을 위해 치르는 비용은 나에게는 손실이고, 타인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곧, 내 유전자가 아니라 타인의 유전자 번식에 유리할 뿐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이 빚어내는 이기적 설계를 감안한다면, 비혈연 관계에서 이타성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이타성’ 문제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흡혈박쥐나 침팬지 같은 동물 사회에서조자 이타성이 발견된다. 이는 이타성이 수백만 년 전부터 진화해온 전략임을 보여준다. 이타성에 대한 대표적인 설명은 ‘상호 이타성’ 이론과 ‘간접적 호혜성’ 이론이다.

상호 이타성 이론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편익 제공에 대한 보답을 받기만 한다면, 비혈연 관계의 사람에게 자신이 손실을 보면서도 편익을 제공하는 적응이 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당장은 손실이지만, 장래에 그 손실을 벌충할 만큼의 보답을 받기 때문에 이타성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간접적 호혜성 이론은 내가 직접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남을 돕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어 평판을 높여, 그 결과 더 많은 협력 기회를 얻게 된다는 주장이다. 곧, “내가 너를 돕는다→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고 협력한다”라는 구조이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는 사람들이 ‘이타적’이라고 인식하는 행위 자체에 주목한다. 따라서 내가 비용이 들이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편익을 주면 이타성으로 간주한다. 철학은 더 나아가 ‘순수한 이타성’이 가능한가, 아니면 모든 행위가 결국 자신의 이익(심리적 만족, 사회적 평판, 관계 유지)을 위한 것인가를 놓고 논쟁 중이다.

어쨌건 내 따뜻한 겨울나기는 비혈연 관계에 있는 세 사람의 덕분이다. 그들은 비록 거의 비용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큰 편익을 제공했다. 이타성 여부를 따짐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존재함 자체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다. 더욱이는 타인의 삶에 영감(inspiration)을 주기도 한다. ‘나’라는 존재 자체로 편익을 얻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걸어온 길과 언동거지에 영감을 받는 이가 있을까? 오히려 내 자신이 타인의 반면교사가 되지는 않았을까?

옷깃을 여미며, 가을 문턱 새벽 시냇가에 앉아 내 자신을 돌아본다.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