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재 시인의 렌즈로 보는 풍경 그리고 길] (25) 불교에 심취하게 이끈 승보종찰 송광사를 가다

박홍재 기자 승인 2022.02.15 11:13 | 최종 수정 2022.02.16 11:57 의견 0
즈렌25-1. 송광사 절 입구에 모습
송광사 절 입구

겨울도 이제 막바지 맹추위를 떨치던 소한도 지나고, 대한에는 또 추위가 오려는지 모르지만, 겨울치고는 그리 춥지 않은 1월 15일 8시 구포역 앞에서 후배와 만나 함께 남해고속도로로 달린다. 나의 여행기를 보고 나서 함께 여행하고 싶다고 하여 서로 시간을 조율하여 떠나는 길이다. 우선 후배가 가고 싶은 곳을 전해와 여행 장소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순천에 있는 송광사로 정하였다.

가는 길에 나누는 대화에서 둘이서 서로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중소기업의 대표가 되는 지금까지를 가는 2시간여를 나누었다. 대화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그의 노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게 새롭게 보고 있다는 것과 가난을 딛고 일어서려는 그의 의지와 실천력이 있었다. 어려움을 알기에 남에게 베푸는 넉넉한 마음들이 합쳐져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고 생각이 들었다.

렌즈25-2. 송광사에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들
송광사에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들

송광사는 1970년대 후반 부산에서 활동하던 해동불교청년회에서 4박 5일 수련회를 가면서부터 인연을 맺은 곳이다. 나는 거기에서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그때 맺은 인연들이 살갑게 아직도 주위에 많은 편이다.

수련회에 갔을 때, 송광사 총림에는 방장 스님이신 구산 스님과 무소유의 법정 스님, 첼로와 스님의 돈연 스님, 도법 스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만은 아직도 기억나는 스님들을 만났었다. 스님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불교를 더 깊게 알 기회를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도 사용하는 ‘불법이 비 같이 내려라’는 ‘법우法雨’라는 법명도 구산 스님이 내려주신 이름이지만.

렌즈25-3. 송광사를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
송광사 초입에 있는 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 표지석 

법정 스님이 전해주던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찾곤 했었는데, 80년대 초에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송광사에 갔었다. 국제선원에서 당대의 유명하신 스님들과 교수님들이 하는 세미나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저녁에는 함께 차담을 나누면서 불교에 대한 것을 토론도 하고, 모르는 부분을 묻고 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 다음에 수련회에서는 묵언을 4박 5일 동안 할 때, 그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가면서 기억에 남는다. 절 복을 입고 다니다 보면 보살님들께서 이번에 들어오신 행자님이냐고 묻곤 하였다. 그렇게 나는 부처님의 말씀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런 기억을 가진 곳이지만 근래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였다.

우선 입구로 들어가는 길부터 낯설기 시작했다. 하기야 오랫동안 오지 않았으니 그 세월에 내가 그리던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옛 생각은 깡그리 지워야만 하였다. 주차장부터 시작해서 도로는 물론 전에 없던 건물들이 옛 생각을 아예 무너뜨렸다. 청량각을 지나가니 ‘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란 표지석이 우뚝 서 있다. 왼편으로 편백 숲이 죽죽 뻗어 있다. 부도도 깔끔하게 잘 정돈이 되어 있다. 손을 모은다. 고려 시대 국사들을 비롯하여 고승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일주문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 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僧寶宗刹)의 근본 도량으로서, 한국불교의 역사를 함께 해온 유서 깊은 고찰이다. 신라 말 혜린(慧璘) 선사에 의해 창건되어 송광산 길상사라고 하였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9년 동안의 중창 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 도량으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16분의 국사가 주석했던 선종 사찰로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 사찰로 여겨지고 있다. 그동안 정유재란 및 임인년(헌종 8년 :1842년)의 대화재,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8차례의 대규모 중창 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국보 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43호), 국사전(국보 56호), 금동요령(보물 179호) 하사당(보물 263호), 소조사천왕상(보물 1467호) 등을 비롯해 총 8천여 점의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송광사 안내 표지판 내용>

입구에 올라가니 ‘조계산대승선종송광사(曹溪山 大乘禪宗 松廣寺)’라는 일주문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옛 모습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개울 건너편으로 꽉 들어찬 건물들이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렌즈25-5. 보조 스님이 짚고 온 지팡이가 고향수로 800년을 기다리고 있다
보조 스님이 짚고 온 지팡이가 변한 고향수. 800년을 기다리고 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아치형 건물 위에 지은 우화각과 우리가 수련회 장소로 사용했던 앞에는 사자루로 뒤편에는 침계루 이름을 붙인 강당이 보이고, 임경당의 아름다운 진입공간과 종고루에서 지장전, 관음전, 영산전, 약사전과 대웅보전까지의 중심공간, 대웅보전 축대 뒤의 국사전, 설법전, 상사당(삼일암) 하사당,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부도가 모셔져 있는 풍암영각이 있는 수선사 공간, 주지실인 목우헌, 길상헌, 강원인 법성료와 정혜사, 선열당(공양간), 정수원, 공루, 해청당이 있는 요사채 공간으로 나눈다.

일주문을 지나가면 오른편에 고향수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맞이해 준다. 고향수는 보조국사 지눌(1158~1210)께서 송광사에 오실 때 짚고 오신 지팡이를 꽂으시며 시를 남기셨다. ‘너와 나는 같이 살고 죽으니, 내가 떠날 때 너도 떠나고, 너의 푸른 잎을 다시 보게 되면, 나도 그런 줄 알아라.’ 그 뒤 지팡이에서 잎이 피어 자라다가 보조 스님께서 입적하시니 이 향나무도 말라버리므로 고향수라 하였다. 불가사의하게도 800년 동안을 이 모습으로 보조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제자리에 서 있다.

렌즈25-6. 절 안으로 들어가는 우화각의 모습
절 안으로 안내하는 우화각

아치형 삼청교를 걸어 우화각을 지나가니 발아래 물소리도 겨울이라 얼어붙어 있다. 오른쪽으로 우리가 오래전 수련회를 했던 사자루(침계루)가 나를 반겨주는 듯 아련하다. 그때 그 모습을 떠올리며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필름으로 돌려 보았다. 바로 보이는 종고루의 북이 나를 반긴다. 북을 치던 어린 정호 동자승이 언뜻 지나간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당에 들어서니 대웅보전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난다. 1951년 소실 후 대웅전을 지금의 승보당을 임시로 사용하다, 1988년 8차 중창했다. 대웅보전에는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신, 108평 규모의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렌즈25-7. 송광사의 대웅보전의 모습,
송광사의 대웅보전

마침 사시 공양을 드리는 소리가 밖에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사시 공양을 드리는 동안 함께 합장하고 따라 하였다. 얼마 만에 대웅보전에 서보는지 감회가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수련회 때 예불 때마다 일찍 일어나서 4시에 예불을 드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던 그 순수했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사시 공양 예불을 마치고 스님들이 돌아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각자의 소임을 따라 줄을 지어 가는 모습이 승가의 고전의 멋처럼 비쳤다.

렌즈25-8. 4천명 분 밥을 담아놓는 그릇 비사리구시
4000명 분의 밥을 담아놓는 그릇 비사리구시

옆에는 국가 제사 시에 대중을 위해 밥을 담아 두는 것으로 쌀 7가마(4000명분)의 밥이 들어가는 비사리구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우화각을 근처에 있었다. 절 음식을 담아놓는 일정한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수공예품 그릇인 능견난사와 조계산 마루 천자암 뒤뜰에 있는 곱향나무로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88호인 쌍향수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 중에 하나라고 한다. 능견난사는 보지 못했지만, 쌍향수는 예전에 보았었다.

렌즈25-9. 사시공양을 드리고 나서 나서는 스님들의 모습
사시공양을 드리고 나서는 스님들

두루 살펴보면서 나오는데 스님이 공양간에 가서 공양하고 가라고 일러 주셨다. 네, 하고 대답은 했지만 쭈뼛거리다 ‘빨간 목탁’이라는 공방이 있어 들어가니 차 한 잔을 권하면서 구경하라고 하였다. 목탁 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마침 보살님도 식사하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하여 공양간에 들어가서 식사하였다. 밥과 국, 김밥과 빵 종류, 그리고 가락국수도 있고, 깔끔한 나물 반찬으로 된 절밥을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다.

옛 모습은 군데군데에서 만났지만, 그 숨결을 다시 기억하였다. 후배는 내 설명이 잘 이해되었다고 공치사를 한다. 고마운 마음이다. 돌아 나오면서 마음을 다잡아서 두 손을 모은다.

 

박홍재 시인
박홍재 시인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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