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난다는 것은 가는 곳도 중요하지만, 어떤 길로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그 여행의 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청송이라고 하면 산이 많아 골이 깊고 소나무가 많다. 나의 첫인상도 그렇게 첩첩산중으로 기억하고 있다.
청송은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이 국립공원 주왕산의 웅장한 바위 군을 들 수 있겠다. 백석탄이 있는 신성계곡도 이채로운 곳이다. 달기 약수와 더불어 사과로도 유명하다. 아이스 클라이밍의 메카이기도 하다.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김주영 문학관과 군립 청송 야송미술관 야송 이원좌 작품(가로 46m, 세로 6.7m) 청량대운도로도 유명하다.
경주에서 내가 청송 가는 길을 잘 알아 안내를 했는데, 새로운 길이 생김으로써 기계, 죽장으로 가는 길이 더 멀었다. 다시 돌아서 7번 국도로 길도우미를 따라가기로 하였다. 요즘은 새로 생긴 도로가 많아서 예전 알고 있던 생각으로 감 잡고 가면 잘못 길을 들 수가 있었다.
우리가 늦게 출발한 데다 헤매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우선 점심을 먼저 먹기로 하고, 네이버 검색에서 1박 2일과 식객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서 널리 알려진 진보면에 있는 88식당을 정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식당은 공휴일에는 예약도 받지 않았다. 식당에 1시가 가까워 도착하였다.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의 88식당은 우리가 들어가니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별채에 안내받아 음식을 주문했다. 코로나도 먹는 데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은 모양새다. 우리는 생각했던 대로 닭불백숙을 시켰다. 벽에는 홍보 차원에서 연예인에서부터 알만한 사람들의 사인이 붙어 있고, 주인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그만큼 SNS가 요즈음 먹거리와 구경거리를 주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한쪽 벽면에는 개그맨 김대희, 명품배우 조인성, 1박 2일 팀과 백반 기행 허영만의 식사 장면을 찍어서 걸어 두었다. 음식은 약간 맵기는 해도 먹을 만하였다. 이어서 닭죽이 나와서 함께 먹으며 소주도 한 잔 곁들였다. 점심이 조금 늦은 시간이라 맛은 손가락을 꼽을 만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 멀리 왔던 사람들인 것 같다.
식사 후에 곁에 있는 야송미술관 청량대운도를 구경하려니까 코로나로 문을 닫아 두었다. 예전에 와서 보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웅장한 그림이다.
방향을 돌려서 주산지를 향했다. 주산지에도 코로나 탓인지 드문드문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즐비하던 가게도 황량한 바람만 맞고 한 집만 장사했다.
입구에서 ‘주산지 왕버들길’이라고 안내를 한다. 특히 청송이라는 곳은 지역에는 참 정겨운 이름의 골과 동네 등 이름이 많다. 근처에는 고자리밭재, 흔새골, 회기반골, 금새반골, 담반골과 여기서는 좀 떨어져 있지만, 너구마을이라는 곳도 정겹게 들리는 마을 이름이다. 그만큼 옛 지명이다.
주산지(注山池)는 주왕산 국립공원에 자리 잡고 있어, 대한민국 명승 제105호로 ‘조선 숙종(1720년)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경종 원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주산지 입구 바위에는 영조 47년(1771년) 월성 이씨 이진표(李震杓) 공 후손들과 조세만(趙世萬)이 세운 주산지 제언(堤堰)에 공이 큰 이진표 공의 공덕비가 있다. 저수지는 그리 작지는 않지만, 입구가 협곡이며, 축조 당시 규모는 주위가 1,180척이요 수심이 8척이라고 전하며, 수차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제방 길이 63m, 제방 높이 15m, 총저수량 10만 5천 톤, 관개 면적 13.7㏊이다. 주산지 맑은 물은 주산현(注山峴) 꼭대기 별바위에서 계곡을 따라 흘러 주산지에 머무르고 주왕산 영봉에서 뻗친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준공 이후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고 호수에는 고목의 능수버들과 왕버들 20여 그루가 물속에 자생하고 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주산지 위키백과에서>
주산지 입구 주차장에서 1km, 도보로 걸어가면 청송 산골 바람이 우리를 맞이한다. 골짜기도 얼어붙어 있고, 마른 나무들이 앙상하게 속내를 드러낸 채 맨몸으로 우리를 곁에서 지켜준다. 겨울의 속살을 본다. 누구라도 주산지는 가을 아침에 단풍이 온산을 물들어 있을 즈음 주산지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산 그림자가 물 위에 반영이 되면, 많은 사진작가가 모여들어 북적이며 가장 좋아할 것이다. 아마도《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영화를 보게 되면, 주산지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가장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꼭 그때만이 아닌 것 같았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산골을 스치고 불어오면 몸을 웅크린 채 얼음의 하얀 몸뚱이를 바라본다. 온몸이 싸늘해지지만, 겨울 햇볕이 한 줌 내려오면, 또 그 따사로움에 활짝 몸을 펴면서 겨울의 꽁꽁 언 주산지의 냉엄한 모습에 마냥 잘 왔다는 마음이 생긴다.
얼음을 딛고 선 겨울 버드나무의 처연함은 인고의 세월을 견딘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완성의 경지 같은 엄숙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얼음은 물길을 그림처럼 그려놓고 자신만이 아는 언어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준다. 모든 욕망과 집착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잊은 채 보여준다. 우리 인간들은 그냥 지나칠 뿐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채 곁그림만 바라보다 내려가곤 한다. 그것을 영화에서 잘 나타내어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은 업, 장난에 빠진 아이, 살생의 업을 시작한다. 여름은 욕망, 사랑에 눈뜬 소년, 집착을 알게 된다. 가을은 분노, 살의를 품은 남자, 고통에 빠지다. 겨울은 비움(공:公), 무의미를 느끼는 중년, 내면의 평화를 구하다. 또, 봄.
영화를 만든 김기덕 감독의 미투 사건으로 청송군에서 김기덕 지우기를 했는지, 영화 소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동자승이 주산지 위에서 큰스님의 업이라는 법문을 새기면서 노를 젓던 조각배만이 그때의 아름다움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기만 하다. 사람이 어찌 성인군자처럼 잘한 일만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살다 보면 잘못할 수도 있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 더 새롭게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간통한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을 향해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한 것처럼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은 감춘 채, 남의 잘잘못을 손가락질하고 질타하는 것이다. 잘못은 잘못이고, 잘한 것은 잘한 것이다. 아무리 잘했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가 잘못되면 매장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영웅을 만들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꽁꽁 얼어붙은 주산지에서 햇살이 얼음에 부딪혀서 나에게 비춘다. 교훈으로 삼으라는 이야기인 것 같아 참 잘 왔다는 마음이 든다. 뿌리를 물에 그것도 얼음장에 묶인 채 묵묵히 서 있는 버드나무를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새삼 나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청송 골짜기에서 만난다.
한 줄기 바람이 또 스쳐 지나간다. 마음속에 걸려있던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가뿐한 마음을 안고 업을 안고 있던 그 조각배 뱃전에 앉아 본다.
마침, 내 마음을 알았다는 것처럼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가 쪼르르 산으로 들어가며 여운을 남겼다.
<글, 사진 = 박홍재 객원기자, taeyaa-park@injurytime.kr>
주산지
박홍재
왕버들 적신 물은 흘러가고 머무르고
사계절 보내면서 골짜기 흐름 속에
꽁꽁 언 주산지 위로 햇볕 사리 쏟아낸다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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