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풍을 몰고 오는 바람이 코끝에 닿자, 몸을 꿈틀거리게 한다. 제주도에는 유채꽃 사진과 갖가지 꽃이 피고 있다는 소식을 블로그와 카톡 혹은 카카오 스토리 등 SNS를 통해 각자 나름의 표현 방법으로 재미나게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른 봄은 제주도를 한 바퀴 휘휘 돌아 흠뻑 적셔 놓고 난 후 서서히 바다를 건너 뭍으로 올라오는 모양이다.
봄 향기는 뭐니 뭐니 해도 매화향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부산 주위에도 매화향을 전해주는 곳이 몇 곳이 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홍매화 명소로 통도사 자장매, 김해 건설공고 와룡매, 원동의 순매원 등이 입소문난 곳이다. 어쩐 일인지 이쪽은 예년 같으면 꽃이 절정을 이룰 계절인데도 아직 꽃을 피울 생각조차 않고 있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시간만 지나간다. 아마도 극심한 겨울 가뭄으로 땅에 물기가 없어 나무도 빨아올리지 못하는 것 같다. 생각 같아서 보름 정도는 계절이 더 늦어져서 꽃잎이 아직 작은 망울만 돋아있다. 경북 북부 울진과 강원도 삼척, 그리고 강릉에는 산불로 많은 이재민을 내어 수심이 깊어만 간다.
성급한 마음에 멀리까지 길을 나선다. 다섯 명이 시간을 맞추어 떠난다. 김해에서 출발하여 남해고속도로를 달린다. 차창가로 다가오는 봄빛이 스멀스멀 우리 차창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를 않아서 온 대지가 메말라 있어 식물들도 그만큼 굼뜨고 있다. 달리는 내내 매화 향기에 관한 이야기로 작년 이맘때는 꽃이 끝물이라는 둥 절정이었다는 둥 서로 이야기가 엇갈리면서 주고받는 웃음꽃을 피운다.
진주를 지나서 하동 요금소를 빠져나와 하동군 금남면에 있는 해룡 기사식당으로 간다. 몇 번인가 왔을 때 괜찮았다면서 또 코로나로 한적한 곳을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코로나가 여러 가지로 살아가는데 제약을 받고 있다. 한식 뷔페식인데 깔끔하다. 한 그릇 비빔밥을 비벼 먹었다. 후식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근처에 금오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 공사 중이란다. 지금은 시험 운행 중이라고 한다. 식당 집 따님이 친절하게 우리에게 안내해 준다. 참 싹싹하기도 하다.
식당이라는 게 크게 다를 게 없다. 주인의 말 한마디가 마음을 누그러뜨려서 그 집을 맛집처럼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방면에도 다 그렇지 않을까? 병원에 가도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친절한가에 따라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어 아픈 곳이 나은 기분을 느낀 때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광양 매화마을을 향해 달린다. 부산에서 느끼는 봄기운보다 남도가 더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주고 있다. 그래서 봄꽃도 먼저 피는가 보다.
우리를 먼저 반기는 것은 섬진강 강줄기이다. 하구에 넓은 폭만큼이나 너그러운 마음을 내어주고, 백사장이 품어주는 것 같다. 지금은 길이 왕복 4차선이라 편하지만, 오래전에 지리산을 오르내리면서 오갈 때는 왕복 2차선으로 봄놀이 나들이객들로 몸살을 앓은 곳이기도 하다. 하동 소나무숲을 지나 하동과 광양을 잇는 섬진교를 건너간다. 섬진강 매화로에는 홍매화 붉은 꽃이 가로수로 줄지어 피어 있다. 꽃을 본다는 마음에 가슴이 뛴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도 평일이라 쉽게 주차를 할 수 있다. 우선 섬진강을 내려다본다. 물줄기가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돌담 앞에서 서서 한참 동안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런데 홍매는 꽃잎을 터트렸는데, 청매화는 아직 작게 망울져 있다. 좀 이른 시기에 온 것이다. 그래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길을 따라 오름길을 오른다. 길가에는 이곳의 특산물인 여러 가지 푸성귀에서부터 고구마, 밤, 말린 나물, 버섯, 매실나무 모종 등등 갖가지 물건을 놓고 팔고 있었다.
눈을 다시 돌려 여러 갈래의 길에 수많은 매화나무가 있고, 듬성듬성 홍매화가 붉게 피어 있다. 어느 길이든 걸으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매화나무이다.
‘청매실 농원은 맞은편 지리산과 전남 광양시 다압면 백운산 사이에 흐르는 섬진강 강가에 홍쌍리 여사님이 평생 쏟아부은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시아버지인 고故 김오천 선생님이 섬진강 변 백운산 기슭에 밤나무와 매실나무를 심고, 며느리 홍쌍리 여사를 맞아 재배기술과 매실 식품 상용화 기술을 전수 해 주었다. 선진농업기술 보급으로 농가 소득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5년 산업훈장을 받고, 율산 이라는 아호를 지역주민이 헌정하였다. 홍쌍리 여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시집와서 피땀으로 일구어 지금의 청매실 농원을 이루었다. 지금은 명인의 아드님이 이어받아 꾸려나가고 있다. 홍쌍리 여사는 광양 청매실 농원 영농조합 대표이며, 대한민국 식품 명인 14호이다. 2,000여 개의 한국 전통옹기가 있어 따스한 남녘의 햇살과 이슬을 머금고 자란 청매실을 담아 오랜 시간 동안 발효, 숙성시켜서 우리 옛 선조들의 깊고 진한 맛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청매실농원 간추린 글>
왼편으로 한적한 언덕을 오르며 홍매화의 붉은 꽃잎에 젖어 들고, 망울져 곧 터트릴 것 같은 청매실의 꽃망울에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밤나무밭을 지나가는데 작년 가을에 떨어진 밤알이 말라서 뒹굴고 있다. 한 바퀴 휘돌아 나오니 무성한 대밭에 굵직한 대나무가 바람에 쏴! 하고 소리를 낸다.
길가에는 장독이며 돌담이 어우러져 자꾸 눈길을 끈다. 3대로 가꾸어 놓은 농장이니 얼마나 정성이 들었을까? 농사는 힘과 노동으로 가꾸어지는 직업이다. 그래서 홍쌍리 여사도 허리가 굽었는가 보다. 나의 누님도 시골에서 사과밭 두 곳을 일구시어 놓은 후 요즘 허리가 굽어 계시는 것을 보면 평생 골수를 땅에 묻었다고밖에 더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산기슭 경사도가 그리 녹록한 곳도 아니다. 지금이야 기계로 영농기로 옮기고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시절이다. 그 어디에도 뼈마디가 스치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 같다. 여자로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감히 누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할 것인가?
밭길을 걸으면서 수십 번 오르내리고 했을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다.
정자에는 사람들이 추억을 남기려고 들어차 있고, 초가집에는 고즈넉한 고요가 흐르면서 옛 고향을 떠올리게 해 놓았다. 대청마루에 장독에 꺾어 장식한 홍매화 가지는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은 모양으로 자태가 경이롭다. 들창문 밖으로 비추는 빛과 어우러져 은은한 맛이 선비가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아궁이에는 불 땐 흔적이 잿빛으로 남아 곧 불이 살아날 것 같다. 그을음이 덧칠하여 더욱 마음마저 칠을 해 주는 것 같다. 초가집 근처에서 괜히 서성이며 이곳저곳을 뜯어보면서 어린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 본다.
여기에 오는 이들도 나와 다름이 아니리라. 자녀와 함께 온 부부가 이야기해 준다. 자녀들은 박물관을 구경하는 듯 신기해하고 있다. 그럴 것이다.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 나 역시 구경하기 힘든 풍경이다.
한 무더기 구경꾼들이 사립으로 들어온다. 우리도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 대청마루에 앉아 팔베개하고 한참 누워 있고 싶은 곳이다.
밖으로 나오니 청춘 남녀들이 추억 쌓기에 바쁘다. 갖가지 손짓으로 웃음 지며 사진을 찍어주곤 한다. 좋은 시절이다.
매화향이 바람에 실려 코끝에 스쳐 지나간다. 이 향기를 언제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까? 아마도 한 번씩 청매실 농원을 생각하다 보면 그 향기는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을 고이 가다듬으면서 섬진강 강변을 따라 되돌아온다. 섬진강 매화로 가로수가 홍매화를 붉게 피워내어 우리를 마중 나와 주었다. 강물도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다. 우리만 들떠 차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느라 바쁘다.
<글, 사진 = 박홍재 객원기자, taeyaa-park@injurytime.kr>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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