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재 시인의 렌즈로 보는 풍경 그리고 길] (36) 어린시절 추억을 찾아 고향 기계 삼태사를 둘러보다

박홍재 기자 승인 2022.05.03 09:22 | 최종 수정 2022.05.08 11:41 의견 0

우리는 항상 고향을 생각하면 아련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움을 찾아 어머니가 계시던 고향을 향해 간다. 그 발걸음이 남다르다. 오늘은 부산에 사는 후배(김병진)와 함께 길을 나섰다.

낙동강을 벗어나는 동안 금정산 고당봉은 부리를 곧추세우고 독수리 모양으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갈 듯하고 있다. 자연이 부산에 오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건천 요금소를 지나 고향 기계를 향해 달린다.

기계면은 포항에서 청송과 안동 등 북부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31번 국도 길목에 있다. 비학산, 운주산 등 준봉이 사방을 호위하고 있는 곳이다.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삼태사로 윤태사, 유태사, 신태사가 있다. 태사(太師)는 고려 시대 삼사(三師)의 하나로 정일품의 벼슬을 말한다.

렌즈36-1. 신라아찬유삼재유허비 모습
 신라아찬유삼재유허비 

후배가 형님 댁에 점심을 부탁드렸다며 기계면 소재지에서 무얼 하나 사려고 차를 세웠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가고자 하는 유태사 기계 유씨 시조 신라아찬유삼재 공이 사시던 집터 앞이다. 신라아찬유공유허비와 안내 표지판이 있다. 고향에서도 여기에 이런 유허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포항시 향토 문화유산 유형 2017-1,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현내리 490번지. 이곳은 기계 유씨 시조 신라아찬 유삼재 공이 사시던 옛 집터이다. 정조 19년(1795)에 경주부윤 유한모가 시조가 사시던 옛 집터를 찾아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의 앞면에‘신라아찬유공유허비(新羅阿飡兪公遺墟碑)’뒷면에‘조선칠병진춘후손수경주부유한모립(朝鮮七丙辰春後孫守慶州府兪漢模立)이라 새겨져 있다. 고종 3년(1866)에 유석환이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비각을 중수하고 1984년에 대종회에서 이를 다시 건축하였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 겹처마 남향 건물이다.’<유허비 내용에서>

렌즈36-2. 대한불교진각종 초전법륜지 정자
 대한불교진각종 초전법륜지 정자

기계면 소재지에서 오른편 길을 따라가면 입구에 박목월 시인의‘기계 장날’이란 시비가 서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산골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로 이어진다. 계전리에 후배의 형님이 사는 고향 집으로 간다.

대문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투박한 손을 내미신다. 농촌의 소박하고 후한 모습이 내외분께서 느꼈다. 점심을 먹으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나의 부모 형제들의 이야기와 닮았다. 동네 집안 어른들을 잠시 뵙고 가자고 하여 갔더니 집성촌의 할머니들이 질부, 동서, 숙모 등등 모인 사람들이 후배를 반겨준다. 농촌에서 보는 정겨운 한 장면이다.

또 계전리는 대한불교진각종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진각성종 손규상 대종사의 초전 법륜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심인당의 4대 성지 중 하나다.

렌즈36-3. 유삼재 유택을 지키는 부운재 모습
 유삼재 유택을 지키는 부운재

기계면 사람들과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삼태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봄, 가을 소풍에서 꼭 삼태사를 돌아가면서 다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다시 가본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십몇 년 전에 삼태사를 우리 가족들과 함께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기계 유씨 시조 유삼재 유택이 있는 부운재로 간다. 역시 후배도 이웃 마을이지만, 와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학교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반세기가 흐른 후인지라 많은 변화가 있어 온 것 같다.

‘유삼재는 기계 유씨의 시조로 신라 시대에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 벼슬을 지냈다. 유삼재 묘소는 기계면 미현리에 있다. 신라가 쇠하고 그의 후손 유의신이 고려에 불복하자, 태조 왕건이 그를 기계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이후 그 후손들은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부운재는 숙종 15년(1689년) 유하겸 경주 부윤이 관내 연세 높은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계 유씨 시조 묘를 찾아 그다음 해에 표석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크고 작은 증축을 이어왔다.’<부운재 표지에서>

렌즈36-4. 기계 유씨 사적비
 기계 유씨 사적비

유택을 오르려니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생략하였다.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오면서 내가 기계면 출신이라고 하면 유씨 성을 가진 사람 중에는 내가 기계 유씨라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그때는 참 뭔지 모르지만 뿌듯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느끼곤 하였었다.

차를 돌려 신태사를 향해 간다. 기동저수지가 자리 잡은 안쪽에 자리한 화봉재는 아늑해 보인다. 저수지의 넓은 품에 안긴 모습이다.

렌즈36-5. 화봉재 경내 체단
화봉재 경내 체단

화봉초교는 폐교가 되어 기동 작가촌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기계면에 5개 학교가 있었는데 모두 폐교가 되고, 기계초교만 유지되고 있다. 전교생이 100명이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다닐 때만 해도 2,000 학도였다. 2021년에 백 주년이었지만, 코로나로 미루고 있다. 시골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없어 폐교되고 있다. 어쩌면 전 세계적, 인류적 문제로 앞으로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숙제이다.

화봉재는 코로나로 대문을 개방하지 않고 있다. 밖에서 안쪽을 기웃거릴 뿐이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를 않는다. 유택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렌즈36-6. 담 너머로 보이는 화봉재사 모습
담 너머로 보이는 화봉재사 

화봉재(禾峯齋)는‘심몽삼(辛夢森)은 영산인 4세손 시조 1세 정의공(貞懿公)의 증손이다. 고려 의종(毅宗) 20년(1166년)생이다. 명종(明宗) 19년(1189년)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검교태사영원부원군에 올랐다. 묘는 기계면 화봉리에 있으며 무오(1918년)에 지석이 발견되었는데‘태사영주신공몽삼지묘(太師寧州辛公夢森之墓), 배위에 정부인 기계현 북 화봉동 오리 재목곡 소재 자좌 오향 경양 4년 9월 2일’이란 해자(垓字)가 되어 있다. 원래는 영주신씨(靈州辛氏)였다. 숱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창건은 흥해에 있던 망진루를 헐어다 지었다가, 1981년 해체 복원한 건물을 다시 종인의 성금으로 1993년 재중건하여 숭조의 도장이 되게 보전관리 중이다. 상계 조상 26위를 봉행하고 태사공 묘사를 지낸다’<기계 유적지에서>.

다시 마지막 봉강재를 향해 간다. 기계면 소재지에 있는 서숲을 지나간다. 평지에 소나무와 낙엽송밭이 있는 곳이다. 기계천을 지나 고지 들판을 지나간다. 여기 입향조께서 임란 후에 고척암에 자리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곳, 내가 12대째 이어오다 태어난 고지리이다. 마봉산 두 봉우리가 아담하게 감싸 안고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그 너머 기계천이 흘러가고 있다.

렌즈36-7. 화봉재 신태사 전체 모습
 화봉재 신태사 전경

윗마을인 봉계2리에 자리 잡은 봉강재는 우리는 윤태사로 더 잘 통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숲에는 황새와 백로가 있어 아침이면 들판을 가로질러 포항 앞바다로, 저녁에는 돌아오는 무리를 보고 자라왔다.

봉강재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윤신달의 28대손인 윤광소가 파평 윤씨의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영조 27년(1751)에 지은 재실이다. 1762년에 한 번 고치고, 1763년에 터를 넓힌 이후에 한 번 더 고쳐 지었다. 윤신달은 고려 태조인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워‘벽상삼한익찬공신’이라는 훈공과 삼중대광태사 관직을 받은 인물이다.

렌즈36-8. 봉강재 내부 모습. 건축 양식이 뛰어나다
 봉강재 내부. 건축 양식이 뛰어나다

또한 1868년 내려진 서원철폐령으로 부서진 봉강서원 자리에 세워진 유허비 역시 파평 윤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재로 꼽힌다. 봉강재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띠고 있다. 전체적으로 나무를 다듬고 짜 맞춘 기법이 우수하며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봉강재 표지판에서>

내 기억으로 중학교 지리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이 흙을 모아서 이렇게 만들려고 해도 이렇게는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명당이라고 한 것이 기억이 나고 봄, 가을 소풍에는 꼭 빠지지 않은 곳이었다. 한국 8대 명당 중 한 곳이라고도 한다.

렌즈36-9. 윤태사 묘에서 봉강재를 향해 바라본 풍경
윤태사 묘에서 봉강재를 향해 바라본 풍경

나지막한 산, 언덕에 자리 잡은 윤태사 묘에서 바라보면 앞이 확 트인 것이 마음도 확 트이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곳 출신 출향민들은 모임이나 순례할 때는 윤태사를 찾아오곤 한다. 옛 아련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후배는 오랜만에 와 보니 모든 게 다 새롭고 새로 보는 것 같다면서 참 오기를 잘했다고 손을 치켜세운다.

사람은 고향 쪽만 바라봐도 눈물이 났다는데, 고향에 와서 이곳에 업적을 남긴 인물의 유적을 발로 밟아보면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후배의 웃는 모습이 환하다. 뿌듯하다.

렌즈36-10. 뒤에 봉좌산이 마봉산을 감싸고 있는 내고향 마을
 뒤에 봉좌산이 마봉산을 감싸고 있는 필자의 고향 마을

해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운주산을 넘어가고 있다. 우리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아쉬움을 다음에 한 번 더 오자! 라는 말로 대신한다.

오늘 유태사 부운재, 신태사 화봉재, 윤태사 봉강재를 둘러보면서 어린 시절 소풍 왔던 기억을 새삼 되새기며 그 옛날로 돌아가 보았다. 다시 뒤돌아다 보면서 고향 나들이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다.

 

삼태사
                         
박홍재

 

유태사 신태사와 윤태사를 돌아본다
코흘리개 소풍 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잊었던 추억 하나를 일기장에 남긴다

잊었던 동무들이 하나둘 따라와서
지금은 무엇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주머니 손을 넣고서 서쪽 하늘 바라본다

 

<글, 사진 = 박홍재 객원기자, taeyaa-park@injurytime.kr>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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