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 곳곳으로 떠돌다 보면 현지 특별 음식을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그 정보를 가지고 가면, 실패할 확률도 있다. 블로거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지 않은 채 올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식사하고 나오는 손님을 관찰한다. 나오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만족도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판단한다. 또 멀리 있는 맛집을 가기보다 우리가 주위에서 찾는다. 그러면 대부분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 우리도 맛 블로거 이상으로 맛에 대한 감각을 익혔기 때문이다.
담양에는 고서면 옛날 창평국밥으로 간다. 차량으로 꽉 차 있다. 넓은 가게에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다. 우리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우리끼리 앉아서 국밥을 시켜 먹는다. 이곳 국밥은 국물이 맑다. 부산 국밥은 걸쭉한 데 비해 맑은 것이 그런대로 새로운 맛이 난다. 하지만 국밥은 걸쭉한 맛이 제격이다. 그만큼 우리 입맛이 걸쭉한 맛에 길들여 있는 것이다.
여행객도 있지만, 현지인들도 많이 보인다. 맛있게 먹으면서 곁들인 소주 한 잔이 여름이라 얼굴에 열기가 돋는다. 여름 날씨라 몸은 끈적거린다.
식영정으로 간다. ‘담양 식영정은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星山祠)가 있었는데, 없어진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석천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이들 네 명을 <식영정사선(息影亭四仙>이라 불렀다. 이런 이유로 식영정을 <사선정 四仙亭>이라 달리 불리기도 한다. 정철은 이곳 뛰어난 경치를 무대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한 많은 시가를 지어 송강 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정자는 팔작집(건물의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전남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국가 지정 제57호(2009년 9월 18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식영정 소개> 글에서
식영정을 오르는 동안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주위의 나무들이 젖는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굵은 목소리를 내면서 뚝! 뚝! 모자에 닿는다.
긴 송곳처럼 세워진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사 성산별곡 원전을 비롯하여 배경, 풀이 등 가사에 대한 안내가 새겨져 있다. 근처에 가사문학관이 위용도 크게 서 있다.
‘오동 사이 가을 달이 사경(四更)에 돋아 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밝고 아름답도다./ 호주(湖洲)의 수정궁(水晶宮)을 누가 여기 옮겨 왔는고/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廣寒殿)에 올라 있는 듯/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고/ 잔구름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물결이 잔잔한데/ 하늘에 돋은 달이 솔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다가 물에 빠진 이백의 옛일이 야단스럽구나. (성산별곡, 정철)’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이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휘젓다가 낙향하여 지었다.
비스듬한 언덕에 띄엄띄엄 정자가 보인다. 우선 보이는 것이 부용당이다. 서하당 앞에 작은 연못에는 연꽃이 한두 송이 피어 있다. 정자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무언가 둘이서 마주 보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정자도 즐기는 사람의 것이다. 아마 자주 오는 것 같다. 오롯이 그들의 정자이다.
그 곁에 서하당이 텅텅 빈 채로 비를 맞고 있다. 약간 대조적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여행객도 보이지 않는다. 한 가족끼리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을 찍느라고 여기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여행객 중에서 정자에 와서 정자에 대한 깊은 뜻을 새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다. 앞으로 그냥 지나쳐 가는 관광지가 아니길 바란다.
나도 휘돌아서 식영정이 있는 언덕으로 내려간다. 정자에서 오른편으로 광주호 물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것이 7월의 빛을 띠고 있다. 물과 바람과 비가 어우러져 풍경은 깨끗하다. 빗소리를 들으며 노래라도 한 곡 뽑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기둥에 기대앉아 송강도 이런 심정으로 성산별곡을 생각해 내었을까?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노닐면서 풍류를 읊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풍요로웠을까? 저 논밭에서 무지렁이 서민들은 피와 땀을 흘리면서 곡식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말이다. 잠시 그런 생각 하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서 우두둑! 소나무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진다. 깜짝 잠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돌려보니 언덕 아래 자동차 소리만 요란하게 오고 가고 있다. 예와 지금의 사이에서 얼마나 조화를 이루어지고 있는가?
건너편 작은 언덕에도 소나무 숲이 조성된 것을 보니 저기도 정자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거기에는 취가정과 환벽당이 있는 곳이다.
식영정을 내려오는 길에 돌을 하나하나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 빗물에 반짝하고 빛이 난다. 솔가지가 조금 얹혀 있다. 아직도 비는 추적거리고 있다.
식영정은 전남 담양에 자리하지만, 취가정과 환벽당은 광주 북구 환벽당길에 자리한다. 광주호로 흘러들어오는 증암천 물줄기가 언덕 아래 흐르고 있다. 담양에서 광주로 증암천을 건너가야만 환벽당과 취가정을 만날 수 있다.
취가정을 오르는 길가에 논에는 벼들이 비를 맞아 싱싱한 연초록과 녹색 이파리가 여행에 지친 눈을 시원스럽게 치유해준다. 들판 너머에 작은 집들이 아슴아슴하게 보이고 산에는 안개가 덮여 있어 동양화 한 폭을 구경하는 것 같다. 길가 둑에는 백일홍이 붉게 피어 있다. 흰색 무궁화와 붉은색 무궁화가 피어 있고, 능소화도 비를 맞고 소담스레 담장 위에 깃들어 있다.
1코스 무돌 아랫길은 주차장-평모들-취가정-조대·용소·쌍송-김덕령 장군 생가터-왕버들 나무-생태원-환벽당으로 1.9km를 돌아도 좋은 듯하다.
‘취가정은 임진왜란 때 조선 의병의 총지휘관이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혼을 위로하고 충정을 기리려고 후손들이 세웠다. 권필의 꿈에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거실 한 칸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광주시 지정 문화재자료 제30호이다.’<취가정 소개> 글에서.
외 돌아져 있어 시골 마을 옆에 자리한 정자로의 멋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 식영정, 환벽당보다 안쪽에 있지만, 가까워서 걸어서도 만날 수 있다. 그 정자 나름의 정취가 있다. 환벽당과 같은 언덕 위에 있어 형제 정자 같다. 굵은 팽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소나무가 곁에서 보조하는 것 같다.
돌로 된 계단을 내려와서 환벽당으로 간다. 가는 길에서 비는 잠시 멈추었다. 다행이다. 취가정은 울타리 담이지만, 환벽당은 흙담이 둘러쳐져 있다.
담 너머로 보이는 환벽당은 더욱더 덩그러니 앉아 있고, 뒤에는 붉은 소나무 군락이 환벽당을 감싸듯 둘러쳐져 있다. 앞에는 붉은 연꽃이 연못에 피어서 비 맞은 청초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환벽당은 조선 명종(1540년대) 김윤제(1501~1572)가 자연을 벗 삼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남도의 전형적인 정자이다. 환벽당 뒤는 소나무와 대숲으로 둘러있고, 앞산은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아래 증암천에는 김윤제와 정철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11월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승격되었다.’<환벽당 소개>.
취가정과 곁에 있지만,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아마도 무관을 위해 지은 것과 문관을 위해 지은 집의 차이라 해야 할까? 글쎄이다. 분위기 자체도 다를 뿐만 아니라, 차지하고 있는 면적도 그만큼 넓고 크다. 앞에는 작은 연못도 있어 연분홍 연꽃이 꽃망울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뒤편 흙 담길을 돌아서 내려오는데 담 너머로 바라보는 환벽당은 또 다른 위엄으로 앉아 있는 것 같다. 자꾸 뒤돌아보고 정취 넘치는 흙담에 얹어진 이끼 낀 기와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경사진 담을 끼고 걷는 길이 마침 비가 내린 후 풍경과 어우러진다.
내려서니 앞에는 증암천이 흐르는 쪽에 벼들이 비를 맞은 채 자기 모습을 싱싱하게 내비치고 있다. 건너편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집들을 감싸고 있다.
나도 저 벼들처럼 지금은 비록 고개를 숙이지 못할지언정 나중에는 고개를 숙이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글, 사진 = 박홍재 객원기자, taeyaa-park@injurytime.kr>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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