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240) - 열광(熱狂)과 번잡(煩雜)에서 벗어나 차분한 가운데 한가한 재미를 누려야 하리
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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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7 17:23 | 최종 수정 2021.08.2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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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 열광(熱狂)과 번잡(煩雜)에서 벗어나 차분한 가운데 한가한 재미를 누려야 하리
냉정한 마음으로 열광했을 때를 살펴본 뒤에야
열광의 분주함이 무익(無益)함을 알게 되고
번거로움에서 한가함으로 접어들어가 본 뒤에야
한가한 재미가 가장 오래감(悠長함)을 알게 된다.
- 從(종) : ~로부터. ‘自(자 form)' 의 뜻이다.
- 冷(냉) : 냉정함. / 熱(열) : 열광(熱狂)함.
- 冗(용) : 분주함. 번거로움. / 閒(한) : 한가함. 여유로움. * 冗의 본자(本字)는 宂이며, 閒은 閑과 동자(同字)이다.
- 滋味(자미) : 맛, 재미.
- 最長(최장) : 최고이다.
* 특별히 ‘가장 오래간다’ 라고 번역한 까닭은 모든 다른 재미는 오직 그 한 때뿐 곧 싫증을 느끼지만 한가한 가운데 느끼는 재미는 유장(悠長)하기 때문이다.
* 長은 본래 ‘머리털이 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 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원래 ‘어른’ 의 뜻이나 ‘길다, 오래다’ 의 뜻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長 : 길다→키가 크다→어른(성인) // 자라다(成長), 기르다(養育) // 오래다, 영원하다, 늘 // 낫다, 뛰어나다(秀)→우두머리(首領)
◈ 김삿갓 시 <구월산음(九月山吟)>
昨年九月過九月 (작년구월과구월) 작년 구월에 구월산을 지났는데
今年九月過九月 (금년구월과구월) 금년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가네
年年九月過九月 (년년구월과구월) 해마다 구월이면 구월산을 지나지만
九月山光長九月 (구월산광장구월) 구월산의 풍광은 늘 그대로이네
* 얼핏 보아 김삿갓 특유의 장기(長技)인 언어유희시(言語遊戱詩)이지만, 이 시를 한갓 장난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힘은 마지막 구(句)인 ‘九月山光長九月’ 에 있고, 그 중에서도 ‘長’ 이라는 이 한 글자에 매달려 있다.
여기서 長은 『노자(老子)』 제7장에서 말한 ‘天長地久(천장지구) -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는 그 長이다. 경상도 말에서 ‘그 사람이야 장 그렇지, 뭐’ 라고 할 때의 그 長이기도 하다. ‘변함없이 늘 그렇다’ 는 것이다.구월산은 ‘변함없이 늘 그렇기에 언제 보아도 늘 좋다’ 는 것이다. 그것이 구월산의 참 모습이요, 구월산이 다른 산과 다른 구월산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 구월산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그 구월산의 진경(眞景)이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이것이 이 시의 요체(要諦)이다.
말하자면 이 시를 한갓 장난시로 전락시키지 않고 높은 품격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長 자 한 글자의 힘이다. 長은 이 시의 버팀목이자 지렛대이다.
* 박생광(朴生光) 화백의 호(號)는 ‘乃古(내고)’ 이다. 대체 ‘乃古’ 가 무슨 뜻일까?
동학의 ‘人乃天(인내천)’ 을 통해 乃 자의 쓰임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乃古라는 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선생의 이니셜 중에 ‘그대로’ 라는 한글 서명(書名)도 종종 눈이 띄어 비로소 乃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乃古란 말 그대로 ‘그대로’ 이다. ‘옛 모습 그대로 변함없는 것’ 이 乃古이다.
선생의 이름 자인 ‘生光’ 은 우리말로 하면 ‘빛나다’ 이다. 경상도에서는 ‘생광스럽다’ 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마침 그 때에 그 물건이나 사람이 소용(所用)에 닿아 고마움을 느꼈을 때에’ 쓰는 말이다. 즉 적시적소(適時適所-알맞은 때와 꼭 알맞은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옛 전통을 되살려 오늘에 다시 빛내신> 선생의 일생의 화업(畵業) - 한 평생 그대로가 선생의 이름과 호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乃古/生光’ 은 곧 ‘법고창신(法古創新)’ 인 것이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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