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287) -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둥근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허섭 승인 2021.10.12 18:00 | 최종 수정 2021.10.15 10:05 의견 0
287 임량(林良 추정 1416~1480) 추응도(秋鷹圖) 136.8+74.8 대북 고궁박물원
임량(林良, 추정 1416~1480) - 추응도(秋鷹圖)

287 -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둥근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옛 고승대덕(高僧大德)이 말하기를,
《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은 일지 않고
둥근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 하였으며

우리 유가(儒家)의 선비가 말하기를,
《 물길은 빠르게 흘러도 물가는 늘 고요하고
꽃은 자주 떨어져도 마음은 절로 한가하네 》 하였으니

사람이 늘 이런 뜻을 지니고 살아가면 몸과 마음이 어찌 자유롭지 않으리오

  • 古德(고덕) : 옛날 덕이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  * 인용한 선시(禪詩)는 당(唐) 설봉화상(雪峰和尙 882~908) 또는 조등선사(祖燈禪師)의 법어(法語)라고 한다.
  •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 대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일지 않는다.
  • 月輪穿沼水無痕(월륜천소수무흔) : 둥근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
  • 吾儒(오유) : 우리 유가(儒家)의 선비.  * 인용한 시는 송(宋) 성리학자 소강절(邵康節) 선생이 지은 것이라 한다.
  • 水流任急境常靜(수류임급경상정) : 물은 급하게 흘러도 그 주변은 늘 고요하다.  境은 ‘주위, 둘레’ 의 뜻이다.  * 후집 36장 참조
  • 花落雖頻意自閑(화락수빈의자한) : 꽃은 어지럽게 떨어져도 마음은 절로 한가롭다.
  • 持此意(지차의) : 이 뜻을 지니고.  持는 ‘가지다, 보존하다, 지키다’ 의 뜻.
  • 應事接物(응사접물) :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촉함. 곧 우리의 일상생활을 말함이다.
  • 何等(하등) : 얼마나 ~하리오, 얼마나 ~한가.
  • 自在(자재) : 자유로운 것, 자유자재(自由自在) 함.

◈ 『보등록(普燈錄)』에

借婆衫子拜婆門 (차파삼자배파문)  고쟁이 빌려 입고 노파에게 절하나니
禮數周旋巳十分 (예수주선이십분)  예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대 그림자 뜰을 쓰나 먼지 전혀 일지 않고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달이 물밑을 뚫고 들어가도 흔적이 없네

※ 할머니 속옷을 빌려 입고 할머니에게 절을 올리는 일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선시를 번역한 석지현(釋智賢) 시인은 앞의 두 구를 굳이 옮기지 않으면서 이것을 번역해 내려면 원고지 10만 장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너스레를 떨었으니, 선(禪)의 비의(秘義)를 그 누가 알리? 깨달은 이도 우리처럼 생각에 바람이 일고 감정에 물이 젖지만, 그러나 그는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는 저 대나무의 그림자처럼 연못 밑에 비치는 저 둥근 달처럼 …

◈ 선시(禪詩)의 제일인자(第一人者)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시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이고    
月輪穿沼水無痕 (월륜천소수무흔)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 흔적이 남지 않네   
智慧存於明者心 (지혜존어명자심)  지혜는 밝은 사람 마음에 있는데,  
如淸水在於深井 (여청수재어심정)  맑은 물이 깊은 샘에 있는 것과 같다네.   
三日修心千載寶 (삼일수심천재보)  단 삼 일이라도 마음 닦으면 천 년이나 가는 보배요  
百季貪物一朝塵 (백계탐물일조진)  백 년을 탐한 재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티끌과 같네.  

※ 이 시의 정확한 출전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1~2구와 3~4구 그리고 5~6구의 내용이 서로 따로 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나마 3~6구는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는 있겠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1~2구는 야보도천 선사의 작품이 아닐 것이다.l

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천척의 낚싯줄을 곧게 드리우니 
一波載動萬波隨 (일파재동만파수)  한 물결 일어나 많은 물결 따라 이네.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한어불식)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서 고기는 물지 않으니 
滿船空載月明歸 (만선공재월명귀)  빈 배 가득 밝은 달빛만 싣고 돌아오누나.

※ 이 시는 야보도천(冶父道川 1127~1130)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원전(原典)은 船子德誠(선자덕성 생몰연대 미상)의 어부사(漁父詞)이다. 이 시는 어부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시이다. 그는 약산유엄(藥山惟儼 751~834)을 30년 시봉하며 그 법을 이어받았으며, 소주(蘇州) 화정현(華亭縣) 오강(吳江)에서 작은 배를 젓는 뱃사공 노릇을 했기 때문에 선자화상(船子和尙)이라고 했다.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를 만나 그에게 법을 부촉(咐囑)하고 스스로 배를 뒤집고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시조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월산대군의 시조이다. 나는 이 시조를 우리나라 시조 문학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왔었는데 아쉽게도 당대(唐代)의 선승(禪僧)인 선자화상(船子和尙) 또는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시를 패러디 - 말이 좋아 패러디이지 거의 표절(剽竊) 수준이다 - 한 것임을 알고는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원작인 선시보다 3줄로 줄인 시조가 훨씬 작품성이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노매라’ 의 각운(脚韻)을 살린 것이 절묘하다.

※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은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의 맏이로 일찍 요절한 의경세자(懿敬世子-德宗으로 추존)의 맏아들이다. 나중에 동생인 잘산대군(乽山大君)이 복위에 올라 성종(成宗)이 되었다. 서예에 뛰어났으나 임진강 하류인 고양에 별장을 짓고 세월을 낚는 어부로 살았으니, 임금의 친형이기에 평생 풍류객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 조등선사(祖燈禪師 唐) 게송(偈頌)

竹密何妨而水過 (죽밀하방이수과)  대나무가 빽빽해도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山高不礙而雲飛 (산고불애이운비)  산이 높아도 구름이 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淸風偃草而不搖 (청풍언초이불요)  청풍은 풀을 넘어뜨리되 요란하게 흔들지는 않고
晧月普天而非照 (호월보천이비조)  밝은 달은 하늘을 꽉 채우나 눈부시게 비추지는 않는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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