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중섭의 생애와 그림으로 본 박미서의 시 ‘겨울나무’

박미서의 시를 이중섭의 그림에 포개놓고 나오려니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윤동주이다.
그도 봄을 기다렸지만 끝내 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인저리타임 승인 2019.12.22 23:36 | 최종 수정 2020.01.06 22:37 의견 0

플라톤은 글과 그림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책에는 어떤 그림도 도형도 없다. 심지어는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면서도 한 점의 동굴 그림 없이 글로만 그의 이데아론을 설명한다. 현대 뇌 연구에 의하면 좌뇌는 글을, 우뇌는 그림을 인식한다고 한다. 플라톤의 고집스런 글과 그림의 분리는 결국 그의 좌뇌·남성·이성 우월주의 그리고 우뇌·여성·감정 열등주의적으로 글과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당시에 뇌 과학이 발달한 것을 아니지만 글이 그림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확신했던 것 같다.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거의 2000년 이상 서양 문명사를 지배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부터 포스트모던니즘에 의해 표음 문자가 인간의 좌뇌를 비정상적으로 자극해 남성우월과 자연파괴 그리고 관념론의 비대로 문명을 파괴했다고 보면서 그림 문자인 상형문자의 재발견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동양에서는 그림과 글을 분리한 적이 없어서 서예를 하나의 예술의 경지까지 진화·발전시켰다.

우리 말 ‘글’과 ‘그림’은 동근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글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글을 ‘그리워’한다고 하여 이 세 어휘는 모두 동근이다. 그러나 글과 그림은 서로 ‘그리워’할 뿐, 한 번도 일치된 적도 없고 동일시 된 적도 없다. 글과 그림 사이의 간격은 라깡은 ‘대상 a’로 남게 되고, 항상 양자 사이에는 ‘모자람’과 ‘채움’이란 애탐 즉 그리움으로 남는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채웠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모자람으로 변해 버리고 글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한다. 그리고 그림은 새로운 글을 쓰려 한다. 결국 인간은 글과 그림 사이에서 무엇인가 즐기고 있는 데 그것을 라깡은 ‘쥬이상스’라고 한다. 동물은 채움을 즐기지만 인간은 모자람과 채움 사이 그 자체를 즐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쥬이상스 즉, ‘행락行樂’이 그림과 글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미서의 시 '겨울나무'

박미서의 시의 특징은 모자람과 채움 사이에서 행락 즉, 쥬이상스를 추구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면서 감상문을 시작하려 한다. 이러한 시의 특징은 박미서의 시를 이중섭의 그림을 옆에 두고 감상을 해 볼 때에, 그림과 글 사이에서 어떤 대상 a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중섭의 그림과 박미서의 시어 거기에 감상자의 글이 중첩될 때에 그림이 글이 되고 다시 ‘글의 글’이 그림과 중첩될 것이다.

이러한 한 시도는 시인의 시작 동기를 훼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이중섭의 생애와 그림 사이를 하나의 글과 그림의 관계로 설정을 하고, 박미서의 시를 이중섭의 삶과 그림에 대입을 하면 어느 정도 감상자의 주장이 타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상자의 글 자체가 메타-언어가 되어 시의 글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언어로서의 감상자의 글과 시인의 시어 사이에 또 하나의 다른 대상 a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감상자는 이를 자기의 행락으로 삼고 즐길 것이다.

겨울나무 같은 시절의 이중섭

겨울나무 자체가 모자람의 비움과 채움 사이에 존재한다. 겨울과 봄 사이에서 인고를 즐기는 쥬이상스적 존재가 겨울나무이다. 이중섭의 짧은 삶은 마치 이러한 겨울나무와 같았고, 그에게 결코 봄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과 봄 사이의 그의 그림들은 하나의 행락 같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중섭에 대한 간단한 생애의 연보와 그의 작품 세계를 일별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 이중섭에게도 성하의 여름철 같은 시절이 있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대지주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의 유년 시절은 유복했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전공도 부잣집 자식답게 자기가 하고 싶었던 미술을 할 수 있었다. 일본 사립 미술대학 분카 학원에 입학했고, 여러 미술전에 출품해 수상도 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지병으로 2년간 휴학했다가 복학하면서 후배였던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1945년 결혼해 슬하에 2남을 뒀다. 차라리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내와 행복했을 것이고 작가로도 성공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은 말 그대로 그를 겨울나무의 나목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의 부산 피난민 시절, 그리고 그 이후의 통영 시대의 작품 들 속에는 겨울나무 같은 그림 흔적들이 많이 나타난다. 감상자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박미서 시인의 시와 대비해 보려 한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에 가정을 꾸렸던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 이듬해에는 제주도 서귀포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폐결핵을 앓게 되었고,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힘든 상황이 계속된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에서 장인이 돌아가자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중에 이중섭이 일본으로 가 함께 생활한다는 계획을 세운 후 잠시 떠난다고 한 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물론 잠시 일본을 방문해 한 주 정도 가족들과 지내다 한국으로 되돌아온다. 해방 후 일본사회에서 이중섭에 대한 눈총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도 아내에게도 이중섭은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반드시 아내와 자녀들을 다시 만날 것을 한 시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바로 이 시기, 나목과 같았던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이 바로 그의 쥬이상스가 반영된 것들이다. 그가 1956년 41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 꿈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모자람과 채움의 간격의 공간 속에서 그는 예술적 향락에 빠져 들었다. 가족과 떨어져 가난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우던 이중섭은 마흔한 살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 받다 쓸쓸히 숨을 거둔다. 봄을 기다리다 겨울나무는 끝내 겨울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이룰 수 없는 꿈인 쥬이상스는 그로 하여금 계속 그리게 했다. 박미서의 글과 이중섭의 글을 포개어 보았다. 이러한 이중섭의 쥬이상스를 두고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서커스 장에서 동물을 확대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나무의 사람 이중섭에게는 결코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봄이 올 것을 그리며 편지를 쉴 새 없이 아내에게 보냈다. 편지 봉투와 편지 쓸 종이 조차 없어서 담배 봉투 겉 종이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엽서 등 빈공간은 모두 그의 유토피아의 공간이었다. 쥬이상스가 향락, 환락, 희열로 번역되나 그 어느 것도 마땅하지 않다. 여기서는 ‘행락’이라고 해두자.

아래 감상문은 이중섭의 서간집 모음인 <<이중섭의 편지>>(현실문학, 2015)에 의존하고 있다. 이 서간집은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을 연대기 별로 나누어 편집한 것이다. 편지는 주로 일본어로 된 것이지만 양억관이 번역하였다. 박미서의 ‘겨울나무’는 인저리타임(2019년 1월 7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겨울나무의 사람 이중섭

겨울 나뭇가지, 도시에서
별밭을 들어 올릴 때
꽃볼을 가진 새벽 노을 보네.

에메랄드빛 눈물을
마시고 노래하는
어미새가 날아온다네.

(나무와 달과 하안섀, 1955년)
나무와 달과 하안새, 1955년

이 작품은 1955년 이중섭이 죽기 1년 전, 그의 나이 40세 때 그린 것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 있고 하얀 새들이 나무 가지에 날아들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나목에 새들이 온다는 것은 피곤한 몸으로 쉬러 오는 이유밖에 없다. 하얀 새, 그리고 겨울, 추운 한기를 더 느끼게 한다. 이중섭은 이 때에 심한 각혈을 하고 있었으며 몸은 쇠할 대로 다 쇠해 있었다.

새벽달이 나뭇가지에 걸렸고 새벽노을 드리운 갓밝의 시간에 어미새가 나뭇가지에 날아오는 한 장면은 시인의 글이 한 그리움으로 그려낸다. 만약에 막상 이중섭이 자기의 그림과 시인의 글을 같이 읽는다면 데자뷰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중섭은 희망을 잃지 않고 이 그림과 함께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가장 소중한 남덕 씨(‘남덕’은 중섭이 자기 아내를 부르던 이름이다), 건강하게 힘내서 큰 기대를 품고 기다려줘요,...나의 생명이며 기쁨인 소중한 사람이여!!! 아무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 태현이 태서이랑 하께 기다려줘요”(이중섭 편지, 224 쪽) 느낌표를 세 번이나 !!! 라고 하면서 절실한 심경을 드려내고 있다. 그러나 끝내 중섭에게 봄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목이 아닌 나무에 잎이 무성하고 새들이 날아오고 아내의 무릎 곁에서 행복에 겨운 때도 있었다. 시인은 이때를 

태고적 상처 끌어안고
울음에 젖은 황소와 함께

라고 한다.

(‘소와 여인’ 1941년 5월 29일 작)
‘소와 여인’. 1941년 5월 29일 작.

1941년 26세 때 작품 ‘소와 여인’. 이 작품 안에서 여인은 누구이고 황소는, 그리고 새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여인은 머리 모양hair style으로 보아 중섭의 아내 마사코(남덕)라고 한다. 이 작품은 ‘망월’ ‘소묘’와 함께 중섭이 화단에 등단하게 만든 작품이다. 여인은 나체이고 오른손으로는 새에게 모이를 주고 있고, 왼손으로는 황소를 쓰다듬고 있다. 새는 자녀들일 것이고 황소는 중섭 자신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소의 얼굴은 평온하고 여인에게 무엇인가 간절히 갈구하고 있는 표정이다. 새는 여인의 유방을 바라보고 있고 소는 여인을 응시하고 있다. 새는 젖을 갈구하는 아이들이고 소는 중섭 자신이다. 중섭은 그림에서 아내와 성교하는 장면도 적나라하게 그렸지만 그 누구도 외설적이라 하지 않는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에로스와 문명>의 그러한 에로스이었기 때문이리라. 마르쿠제는 에로스야 말로 문명의 본질이라고 한다. 예술은 에로스의 승화이다. 그러나 법의 잣대는 외설이라고 한다.

‘소와 여인’에서 소는 시 속의 소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시 속의 소는 ‘태고적 상처 끌어안고 울음에 젖은 황소’이기 때문이다. 1941년의 소가 1953년에 와 얼마나 달라지고 말았는가? 그 사이에 해방(1945년)이 있었고 전쟁(1950년)이 있었다. 1951년 서귀포 피난 시절 이중섭은 ‘소의 말’이란 시를 지어 방에 부쳐 놓았다. “...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 가슴 환히 헤치다.” 이미 소의 곁에 여인도 새도 없다.

여름의 풍요 속의 소가 10여년 만에 이렇게도 표정이 변할 수 있는가? 1953년 의 ‘노을을 등지고 울부짓는 소’를 보라.

(1953년 작, ‘노을을 등지고 울부짓는 소’
‘노을을 등지고 울부짓는 소’. 1953년 작.

1941년의 황소와 1953년의 황소를 비교해 보라. 10년 사이에 한 작가가 이렇게도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 박미서 시의 ‘태고적 상처 끌어안고’는 이중섭 그림의 ‘노을을 등지고’를 수사학적으로 바꾸어 놓은 차이 뿐이다. 시 속의 소와 그림 속의 소는 모두 울고 혹은 울부짖고 있다. 시인이 이중섭의 시를 옆에 두고 시작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글과 그림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같다. 그림과 글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어 보인다.

10년 후 중섭의 소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한국전쟁 직후, 1950년 3월부터 죽을 때까지는 일본의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이다. 그 해 7월 말에는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아들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어야 할 해후였다. 시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처한 현실. 이때 중섭은 이미 죽음을 예고했던지 불상을 비롯한 그동안 간직했던 작품들을 대부분 아내에게 맡겼다. 중섭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지만 고비마다 좌절당하고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삶을 나날이 보내던 와중에 ‘떠받으려는 소’ ‘흰소’ ‘부부’ 등을 그렸다.

울부짖는 이유는 두 가지 불행했던 시대와 내면의 탈출할 수 없었던 욕동desire 이 그것이다. 구비마다 시대가 가로막는 데 대한 분노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에로스에 대한 갈구가 모두 좌절된 자화상을 소를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황소와 여인’과 ‘울부짓는 소’는 실로 이중섭의 모습 그대로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구need가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욕동desire으로 변하고 그 간격에서 쥬이상스가 생긴다고 했다. ‘울부짓는’ 그리고 ‘떠받으려는’ 소는 모두 그의 쥬이상스가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언어의 기표가 기의를 다 그려내지 못할 때에 저 울부짓는 황소 같이 언어는 변한다. 

그것이 시에서 “황소와 함께 어디서든 꿈 속에서의 긍지, 그 꿈결 맞부딪쳐 느꼈다네”라고 한다.

이중섭의 쥬이상스와 함께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의 쥬이상스로서의 황소는 아래 1954년 작 ‘길 떠나는 가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봄날 먹을 것과 꽃노래 부르며 따스한 남쪽 나라로 길 떠나는 마차를 끄는 황소이다. 소를 끄는 남자는 중섭 자신 그리고 소는 중섭의 쥬이상스이다. 멍에를 맨 소가 끄는 마차 위에서 중섭의 가족들은 춤추고 노래한다. 이것을 이중섭은 즐기고 있다. 행락의 극치이다.

(1954년 ‘길떠나는 가족’)
‘길떠나는 가족’. 1954년 작.

행락 혹은 쥬이상스라 하는 이유는 이 그림이 현재로서가 아니고 욕구와 욕동 사이에 끼어 있는 환락(쥬이상스)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에 분노와 울분으로 변하든지, 아니면 환상 속에서 환락을 즐긴다. ‘길 떠나는 가족은 이중섭이 당시 처한 현실과는 정 반대인 상상 속에만 있던 현실이다. 시의 ‘꿈속에서의 긍지’ 같은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중섭의 편지는 “아빠는 앞 쪽에서 소를 끌면서... 따스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소 위에는 구름이 떠 있네요”라고 했다.

중섭의 가족이 환상 속에 길 떠나 향한 남쪽 나라 그 어느 곳은 '찬바람 잦아드는 외딴 꽃집' 이었다. 1956년 죽던 해 쓴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나의 소중한 남덕씨... 이제는 그림도 그리고 씩씩하게 생활하니 기뻐해줘요. 도꾜에서 그대들이 오는 방법과 내가 가는 방법... 서로 잘 조사해 완벽하고 빠른 길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럼 건강하게, 답장 부탁드리오. 중섭.”

1956년 9월 6일 중섭은 죽었다. 중섭의 삶은 이 시대를 산 거의 모든 사람들의 그것과 같았다.

서로 온전한 비상의 작은
반짝임은 야생오리떼 성단처럼
측량할 수 없었지.

찬바람 잦아드는
외딴 꽃집의
작은 잎새 등이 켜질 때,

(1956년 작 ‘돌아오지 않는 강’)
‘돌아오지 않는 강’. 1956년 작.

여운의 쥬이상스를 더 노래하고 있다면. 이중섭이 떠나 간 그 나라에서 이 나라를 내려다보며 부르는 노래,

새들의 하늘빛 앙상한 곳간마다
봄의 가교,
웃음 한 자락씩 덮혀 있지.

창에 황금빛 지도를 밝히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무한한 노래를 수호한다네.

(1953-1954년 통영시절의 ‘봄의 아이들’
1953-1954년 통영시절의 ‘봄의 아이들’

“요즘 매일 야외로 나가 봄 경치를 화폭에 담고 있어요. 하루 빨리 그대들을 만나려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열심히 힘을 내어 그림을 그린다오(서기 1954년, 그러나 서기 4591년의 글). 이 그림은 죽기 직전에 살아 있을 미래를 내다보고 그린 것이다. 중섭은 없을 대상을 그렸다.

새싹들이 거두는
내밀한 품,
밤은 인자仁慈의
파도소리를 두른다네. 

(1951년 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년 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

“가능한 한 매일 편지를 쓸 생각이에요. 그대로 가능하다면 매일 편지를 보내주세요. 그럼 몸 튼튼히, 편지 기다릴게요. 이중섭.”

이중섭은 가족들을 다시 만나 파도 소리 들리는 어느 섬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는 없는 배를 타고 그 섬으로 가려했었다.

중섭과 동주가 기다리던 봄날에

박미서의 시를 이중섭의 그림에 포개놓고 나오려 하니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윤동주이다. 그도 봄을 기다렸지만 끝내 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중섭보다 일찍 죽었지만 같은 질곡의 세월과 일본이란 공간과 대상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공동 운명의 주인공들이다. 둘은 똑 같은 겨울나무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똑같이 봄을 기다리다 죽었다.

윤동주는 ‘별헤는 밤’(1941년 11월 5일 작시)에서 어머니를 그리다 죽었고, 시 4연에서 어머니를 두 번이나 부르면서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위에/내 이름을 써보고/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로 끝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이 뭔가 아쉽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 10연,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이다.

이 시를 남기고 1945년 2월 16일, 입춘을 불과 얼마 안 남기고 후꾸오까 감옥에서 죽고 만다. 이중섭보다 11년 전에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기다리던 봄을 보지 못하고 갔다. 시대가 타살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겨울나무의 주인공들이다.

운동주로 시로 이중섭은 그림으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남기고 갔다. 중섭은 어느 봄날 가족들과 배타고 남쪽 나라 어느 섬으로 소풍 갈 것을 그렸다.

(1955-1956 대구, 그리고 마지막 시절)
1955-1956 대구, 그리고 마지막 시절

윤동주는 이름 석 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만을 바라며 갔다. 그러나 동주의 무덤에 찾아 온 봄은 친구가 가져다 준 것, 모두 쥬이상스일 뿐이다.

시인은 겨울나무의 사람들 이중섭과 윤동주가 기다리던 봄날에

새들의 하늘빛 앙상한 곳간마다
봄의 가교,
웃음 한 자락씩 덮혀 있지

라고 헌시를 하는 느낌이 든다.

감상자는 이 ‘겨울나무’의 배경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시인의 무의식의 세계를 막연하게 가지고 와 시와 그림을 연결했지만 남은 이야기는 삶과 삶과의 연결고리일 것이다. 시를 읽는 독자가 받아들인 그것을 독자 반응이라 한다. 그것은 폭 넓은 작품의 한 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읽는 사람들에 따라 다른 느낌을 많이 열어준다면 시인은 매번 그 시로부터 자유로워질 터이다.

이중섭의 그림에 대한 박미서의 시, 그리고 그림과 글에 대한 감상문이라는 또 하나의 글이 중층으로 겹침을 하였다. 모자람을 채우려는 이중섭의 삶아 녹아 든 그림, 그리고 시인의 봄의 가교를 놓으려는 갈구가 구름과 비의 관계와 같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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